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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민희 Feb 03. 2022

청계천을 걷던 18세 소녀에게

눈에 보이는 모든 풍경이 수능을 한 달 앞둔 나의 마음과는 딴판이었다

고3 수험생이던 2005년. 세상은 온통 10월에 완공하는 청계천에 대한 뉴스로 가득했다. 청계천의 과거 모습을 모르는 나는 천을 복원한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잘 몰랐다. 수년 동안 복원을 하는 게 마땅한지 아닌지를 두고 싸우더니 마무리가 되기는 하는구나, 하는 정도로만 생각했다. 실상은 이랬다. 1976년 개통한 청계천 고가도로는 1990년대 들어 노후화 문제가 본격화됐다. 서울 도심을 가로지르는 도로가 무너지면 어떤 일이 일어날지 사람들은 잘 알고 있었다. 삼풍백화점과 성수대교의 붕괴 사고로 인한 트라우마가 사람들의 머릿속에 선명하던 시기였다. 2002년 이명박 서울시장 후보는 고가도로를 철거하고 청계천을 시민의 품에 돌려주겠다는 공약을 내세워 당선됐고, 이듬해인 2003년 7월, 도로는 철거되기 시작했다.


2005년 10월, 드디어 새로이 정비한 청계천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이틀간 100만 명이 찾아갈 정도로 도심의 명소가 된 청계천에 대한 소식은 안산에 살던 고3 학생인 내 귀에도 들어왔다. 뭐든지 친구들과 함께 하기를 좋아했던 시기였는데 청계천만큼은 혼자 가서 시간을 보내야겠다고 생각했다. 당시 학교에서는 일요일에도 자율학습을 했는데 그날은 핑계를 대고 빠졌는지 어쨌는지, 시간을 내 혼자서 광화문역까지 갔다. 광화문역에는 온통 ‘청계천 가는 길’이라는 임시 안내판이 붙어 있었다. 출구를 나오자 보이는 10월의 서울 하늘은 그야말로 높고 푸르렀다. 도심에 생긴 새로운 공원을 즐기는 사람들의 얼굴에는 설렘과 기대가 가득했고, 복원을 기념하는 각종 행사가 열려 축제 분위기를 더했다. 눈에 보이는 모든 풍경이 수능을 한 달 앞둔 나의 마음과는 딴판이었다.


인파에 휩쓸려 동아일보 사옥에서 시작해 동대문 방향으로 쭉 걷기 시작했다. 천 주변으로 높게 솟은 빌딩을 보며 ‘여기 있는 수많은 회사 중 한 곳에라도 내 자리를 만들 수 있게 열심히 하겠다’는 생각을 했다. 정말 온 마음을 다해 생각했다. 그렇게 간절했으면 청계천이 아니라 독서실에 가서 공부를 하는 게 낫지 않았을까 싶지만, 그때는 그렇게 마음을 정비하는 시간이 꼭 필요했다. 활기찬 사람들 사이를 지나며 혼자 결연한 각오를 다지고 있자니 서러워 눈물이 날 것 같기도 했다. 이 도시에서 자기 몫을 하며 사는 어른으로 성장할 수 있을까? 모든 게 흐리고 두려웠다. 어른들이 수험생에게 “수능이 인생에서 전부는 아니다”라고 말하는 게 지금은 어떤 의미인지 알지만, 그때는 절대 알 수 없었다. 그 시험을 제대로 치르지 못하면 삶이 전부 망하는 줄만 알았던 시기였으니까.


십수 년이 지난 지금, 청계천 10분 거리에 위치한 곳에서 수년 째 밥벌이를 하고 있다. 회사에서 조금만 나가면 보이는 청계천은 이제 일상의 풍경이 됐다. 청계천 주변에 가도 아무 생각 없이 목적지를 향해 바쁘게 발걸음을 옮길 때가 더 많다. 그러다 천 주변 이팝나무의 꽃잎이 흐드러진 봄이나 웃으며 걷는 다정한 사람들을 볼 때면 미지의 앞날에 두려워하던 소녀와 그날의 다짐이 떠오른다. 가능하다면 그때의 나에게 말해주고 싶다. 너는 좋은 사람들과 함께 행복하고 좋은 삶을 살 것이다. 그것이 이 주변 회사에 취직을 하느냐 마느냐보다 훨씬 더 중요한 문제이니 너무 두려워할 필요 없다. 어른의 말이면 뭐든지 귀를 막아버렸던 당시의 내가 그 말을 들어줄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오늘은 겨울의 한기 속에도 꿋꿋하게 흐르는 청계천의 물소리를 듣고 싶다.







Photo by Ethan Brooke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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