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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민희 Feb 07. 2022

지하철 수면의 고수

보다 못한 아주머니가 나를 깨웠다

대학 때부터 지금까지 거의 매일 지하철을 탄다. 휴학이나 백수 생활 등 주기적으로 탈 일이 없을 때에도 일주일에 한 번 이상 무조건 탔다. 내가 지하철에서 보낸 시간이 얼마나 될까 궁금해서 대략 계산해봤다. 안산에 살았던 날을 기준으로 왕복 2시간, 한 달에 15번, 10년을 곱했더니 3600시간이다. 결혼 후에는 왕복 1시간, 한 달에 20번, 4년을 곱했더니 960시간이 나왔다. 이 정도면 삶의 다양하고 중요한 일들이 지하철에서 일어났을 만하다. 1만 시간의 법칙은 나의 지하철 라이프를 두고 하는 말일까?(응 아니야.)


지하철을 그만큼 타고 다니면 별별 것을 다 할 수 있다. 사람들은 지하철에서 음식도 먹고, 싸움도 하고, 노래도 부르고, 담배도 피운다. 경의 중앙선 한남역 부근에서 흡연 장면은 딱 한 번 봤는데 너무 충격적이라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이런 놀라운 일 말고 보편적으로 지하철에서 스마트폰 외에 가장 많이 하는 일은 눈을 붙이는 일이다. 지하철에서 청하는 잠은 고단한 현대인의 피로를 풀어주는 소중한 시간이다.


지하철에서 자야겠다면 양끝 자리를 사수하는 게 무조건 좋다. 머리를 기댈 기둥이 있으면 수면의 질이 달라진다. 꿈도 아주 야무지게 꿀 수 있을 정도. 하지만 양끝 자리의 행운은 열차 한량 당 12명에게만 주어진다. 양 옆에 사람이 있는 자리에 앉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사람은 왜 자면서 중심을 제대로 지킬 수 없는 걸까? 자꾸만 한쪽으로 기우는 스스로가 야속하지만 어쩔 수 없이 누군가에게 민폐를 끼치게 된다. 옆 사람의 반응도 가지각색이다. 아침에 어딘가로 향하는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짜증이 50% 정도 차 있는 상태다. 그런데 자꾸 낯선 옆 사람의 머리가 은근히 힘을 가해 오면 짜증이 증폭될 수밖에. 조심스럽게 천천히 은근히 밀어내는 사람도 있지만 온 짜증을 담아 정말 세게 밀치는 사람도 많았다. 잠결에 미안하다고 사과를 하고는 또 그 짓을 반복한다.


어떤 경우에는 이상하게 너무 편하게 자고 있다고 자각하며 눈을 뜰 때가 있다. 옆에 사람이 천사인지 뭔지 곤히 참고 있어 준 거다. 그럴 때도 똑같이 민망하다. 대학교 1~2학년 때쯤, 동작역 부근에서 내 왼쪽에 앉아 있던 아주머니가 나를 깨웠다. 내 오른쪽에 앉은 다른 내 또래 여성한테 너무 심하게 부딪혀 가며 자고 있었는데 젊은 처자는 말도 못 하고 불편해하는 걸 보다 못한 아주머니가 대신 나를 깨운 것이었다. 지하철에서 일어난 사건사고 Top 3에 드는 일이다. 그 와중에 동작역 다음인 이촌역에서 내려야 하는 데 때 맞춰 깨워주신 거에 작은 감사를.


무슨 꿈을 꿨는지 자다가 갑자기 화들짝 놀라 내려야 할 역을 지나친 줄 알고 남태령역에서 내려버린 것(남태령역에는 승하차하는 사람이 정말 없다), 출근길 명동에서 내려야 하는데 충무로역까지 갔다가 계단 오르내리기 귀찮아서 아예 동대문역사문화공원까지 가서 하행선으로 갈아타고 오느라 지각한 일 등 소소한 사건은 이외에도 많다.


지하철에서 잘 때는 자세도 매우 중요하다. 가만히 앉아서 고개를 빳빳하게 세우고 잘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되려나? 나는 늘 고개를 푹 숙이고 잤다. 그리고 그게 어깨와 목에 늘 무리가 됐다. 현대인이라면 누구나 어깨와 목에 그만한 통증을 달고 사는 줄 알고 아파도 참았는데 서울로 이사를 오고 지하철에서 잠을 안 자게 되니까 그 통증이 싹 사라졌다. 당연한 사실인데 몸으로 차이를 느끼고 나니까 나름 충격적이기까지 했다.


지하철에서 세상모르고 자는 사람들을 보면 짠한 마음이 든다. 오랜 시간 지하철에서 부족한 잠을 채우던 내 모습이 보이고, 가끔 안산 본가에 갔다가 노원 집에 돌아오는 길 지루함을 참지 못해 쪽잠을 자는 내 모습이 보인다. 긴 시간 지하철을 타는 게 얼마나 고단한지 누구보다 잘 안다. 어디서든 눈 붙일 수 있을 때 붙여야 한다. 옆 자리에서 은근한 압박감이 나를 누를 때 살짝 반대쪽으로 (기분 나쁘지 않게) 밀어준다. 마음 수양을 잘하면 마음껏 자라고 어깨를 내줄 만큼의 배려심도 생기려나? 지하철 쪽잠을 청하는 모든 이들의 삶이 평온하기를.     



Photo by Felix Wiedemann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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