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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엘사 Jun 07. 2022

'기획자 무용론'의 쓸모

그렇게 쓸모 없다는 말을 몇년째 하고 있나요


그리고 밥값을 해야하는 사람.  


기획자로서의 업을 시작했던 그 해부터 기획자 무용론 이야기를 들었다. 호기롭게 선택한 직업을 누군가 끊임없이 필요없다, 무용(無用)하다고 말하면, 열심히 하고자 하는 노력조차 폄훼되는 느낌이라 초반 몇 년간은 아주 마음이 불편했다. 특히나 업계의 이야기를 많이 논의하는 곳에서 유독 이런 내용들을 보게 되면, 더 잘하고자 공부하고 찾는 입장에서 상처받을 수 밖에 없게 된다. 어떤 프로젝트를 맡든, 프로젝트에 대한 집중보다도 나의 '쓸모'를 증명하기 위해 아등바등해야한다. 


(기획자 무용론 자체는 브런치에서 검색만 해도 우수수 나오므로 해당 내용에 대한 요약은 생략한다.) 


나는 데이터분석가인가요, Product Manager인가요, Product Owner인가요. 


보다 좋은 기획자로 거듭나기 위해서 고민하는 상사의 질문에, 또 다시 과거의 기억이 되살아났다. 기획팀이라고 할 때 Planning이라는 명칭으로 번역되기도 하고 PM이라는 명칭을 받기도 했다. 그런데 또 어느 시기에는 기획자와 PM은 다른 것이라는 말을 듣기도 한다. 


나는 가만히 있는데 직무에 대한 정의가 자꾸 바뀐다.


내가 노력해서 바뀐 포지션이라기보다는 나는 그저 하던 일을 하고, 맡은 바를 정리하고, 필요한 과정을 추진하고 있을 뿐인데 타이틀이 자꾸 바뀌고는 했다. 기획자에서 프로젝트 매니저, 그리고 프로덕트 매니저 등등 용어간의 위계도 생기고 어떤 직책이냐는 질문을 받기도 한다. 


비앰비셔스 중 '주 장르 없음' 댄서 

엠넷 예능을 보다가 '주 장르 없음' 을 걸고 나온 분을 보고 동질감을 느꼈다. 기획자가 PM, PO, 데이터분석, UX기획 등등 어떤 포지션이다라고 장르를 말할 수 있을까 생각이 들었다. 어떠한 일이든 할 수 있어야 하고 상황에 따라 필요한 장르를 흡수하여 실행하는 게 맞지 않을까 싶었다. 


개발자처럼 언어를 새로 배워야하는 것도 아니고, 해당 분야에 대한 이해만 있다면 뭐든 할 수 있어야 하니까.


이 생각은 사실 뒤집어 생각하면 무엇도 제대로 할 줄 모르는 사람이란 뜻과도 통한다. 뭐 하나 잘하는 게 없으니 누구든 그 일을 대신 맡아서 하기 어렵지 않다는 이야기가 된다. 


기획자 필요없다, 는 말을 듣는 (사람) 기획자 있어요.


별도의 자격시험이 없어서인지, 아니면 되고 난 이후에 성장을 위한 커리큘럼 자체가 존재하지 않아서인지 해당 일을 하는 내내 그 문장과 싸워야하는 게 애달팠다. 열심히 하기도 빠듯한데, 싸움도 해야하다니 너무 가혹하다. 그렇지만 그 말 들은지 10년이 지났는데도 여전히 잘 밥벌이를 하고 있는 것을 보면 쓸모 없다는 말에서 나왔던 '과도기'가 생각보다 오래 이어지는 것이 아닐까? 


문장의 쓸모가 더욱 옅어진 것은 최근 주니어 기획자들과 이야기할 때 느껴졌다. 그토록 필요없다 외치더니 결국 새롭게 이 직군을 선택하는 이들이 있고, IT업계는 시장 규모가 더 커졌으며 기획자가 맡은 역할들은 조금씩 더 넓어지고 있다. 


조직 내 업무구분이 세분화되어있지 않으면 영역이 명확한 디자인, 개발의 범위 이외의 모든 업무를 맡는다. 조직 내 업무구분이 세분화되어있다면, 해당 담당자들 사이의 커뮤니케이션을 도맡게 된다. 혹은 그들 사이의 R&R 정리까지 해주는 경우가 있다. 개발 담당이 서로 나누어져있다면 그들 사이의 커뮤니케이션 마저 맡는다. 그저 말하는 역할로 볼 수 있지만, 그 '말'이 모든 일을 이끄는 환경에서 나서서 말하는 자의 역할은 중요하다. 처음 이런 상처줄만한 말을 꺼낸 사람은 이 모든 일까지 개발자가 직접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생각보다 한국의 업무환경은 이들에게 말할 여유를 주지 않고 진행되고 있고, 그 조건이 향후 몇년 사이에 개선될 여지도 없어보인다. 


이제 밥값은 하는 것 같아요 


2014년 지금의 회사에 입사하고 당시 팀 내 시니어였던 다른 분에게 내가 했던 말이다. 한 달 이상 새롭게 맡게 된 서비스에 대한 이해를 하고 나서, 이번 주는 어땠냐는 질문에 대한 대답이었다. 무엇인가 증명하지 않으면 불편했던 시절, 일을 했다면 한 내용이 티가 날 정도로 드러내야 했던 시기였으니까. 기획자 무용론이 어쩌면 내면에 마지노선처럼 작용해서 빡빡한 자기검열 속에서 살았다. 그저 나보다 늦게 기획직군을 선택한 이들은 그 문장에 지배되지 않고 자유롭게 하고자 하는 일을 했으면 한다. 


뭐든 따지고 보면 쓸모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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