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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루 Oct 19. 2021

봄이의 4월_1

봄은 왜 침몰하지 않는지 몰라

“봄이씨……, 어, 어리네. 자기소개 해봐요.”

여자면접관이 구두에서 눈까지 홅는다. 흐린 4월의 눈빛이다. 반말과 존댓말이 섞인 목소리는 까칠하다. 불편해진다. 언제나 그렇듯 불편하게 만드는 건 공간이 아니라 사람이다. 허공을 헤매던 시선이 여자를 향하자, 여자는 검은 머리칼을 쓸어내리고 책상 위 서류로 시선을 돌린다. 눈에 칼이 돋아난다. 여자는 내가 쓴 이력서와 자기소개서를 비웃고 있다. 여자도 초라한 내 이력이 우습고, 감동 없는 자기소개가 지루한가 보다. 어쩌면 한 줄도 읽지 않았을지 모른다. 면접관이라는 지위를 이용해 보잘 것 없는 나를 조롱하고 있다. 참았던 숨이 쏟아진다. 손톱으로 손바닥을 긁는다. 질 수 없다. 포기하면 안 된다. 여기서 나가면 갈 곳이 없다. 목적지 없는 길을 헤매다 별들이 어깨를 두드리면 또 주저앉아 울지도 모른다. 나는 전사다. 전의를 불태운다. 싸워야 한다. 살아남아야 한다. 다리를 모으고 고쳐 앉는다. 의자가 삐걱 운다. 꺼둔 휴대폰이 스스로 깨어나 허벅지를 두드린다.      


면접을 본다. 잘 봐야 한다. 꼭 합격해야 한다. 캣맘 할머니는 공무원 비슷한 대우를 받는 곳이라며 여기를 소개했다. 나이도 학력도 외모도 보지 않으니, 자기소개서만 진솔하게 쓰면 합격할 거라고 했다. 할머니는 손녀 같은 나와 함께 일했으면 좋겠다고 백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백구는 알아들었다는 듯, 그랬으면 좋겠다고 컹, 컹, 짖었다.


진실 없는 자기소개서가 생각나지 않는다. 나는 욕을 잘하고 도움을 받아도 고맙다는 말 안 하는 못된 여자라고 쓰지 않았다. 지지리 가난해 수학여행도 못 가고, 고등학교도 졸업하지 못했다고 쓸 수 없었다. 몸뚱어리 전체가 상처투성이라 사람을 믿지 못한다. 믿는 것은 동네 떠돌이개 백구밖에 없다, 투덜대고 싶지 않았다. 사는 게 외롭고, 밉고, 슬퍼서, 아팠던 기억밖에 없다, 나를 소개하긴 싫었다.      


인생은 연극이다. 대본도 외우지 못하고 연습 한 번 없이 무대에 올랐다. 그날 죽지 못해 아쉬워 죽겠다고 발악했던 기억이 난다. 나는 무대에 오를 자격이 없는 배우일지 모른다. 어른들은 너무나 쉽게 말했다. 얼마나 가난한지 증명해봐, 그럼 도와줄 수도 있단다. 됐다, 그런 도움 따위 필요 없었다. 이제 나도 어른이다. 어른들은 말하기 싫은, 그럼에도 말해야 속이 후련해지는 그날의 기억을 토해내면 외면했다. 아닌 어른도 있었지만 좋은 기억은 이상하게 쉬이 잊혀졌다. 아무렇지 않은 척, 괜찮은 척, 강한 척, 가면을 쓰고 사는 게 이젠 너무 버겁다.


사방 흰 벽과 흰 바닥, 중앙에 덩그러니 놓인 검은색 의자에 앉아 있다. 흰 바다에 검은 섬이 떠있는 것 같다. 무인도다. 아무도 나를 도와주지 않는다. 나는 스스로 탈출해야 한다. 못된 어른들이 더는 나를 함부로 대하지 못하게, 보란 듯이 살아남고 싶다. 할머니는 모든 사람들과 친구가 될 수 없다고 했다. 좋은 사람도 있고 나쁜 사람도 있으니, 사람 때문에 상처받지 말라 했다.      


여자는 황사에 점령당한 봄이다. 여자는 좋은 사람이 아니다. 여자와 나는 친구가 될 수 없다. 자기소개서의 첫 문장밖에 생각나지 않는다.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눈물이 쏟아질 것 같다. 도망치고 싶다. 담임쌤 앞에서 죄인처럼 앉아 왜 돈이 없니? 라는 말에 비참해졌던 기억이, 심리상담쌤에게 죽지 못해 아쉽다 말했던 기억이, 눈앞에 펼쳐진다. 호루라기를 불고 싶다. 지금 당장 면접이 끝나기를 바란다. 나의 4월도 행복했으면 좋겠다. 칼 품은 눈이 여자를 노려본다. 무대에 올라 대사 한 마디 못하고, 울면서 도망치면 전사가 아니다. 나는 전사다.

“저는 1998년 인천에서 태어나 화목한 가정에서 자랐습니다.”      




아이씨, 봄은 왜 침몰하지 않는지 몰라.

나는 뿌연 4월의 하늘에 짜증을 냈다. 또 지겨운 봄이 왔다. 매달 거르지 않는 생리통처럼 매년 봄을 앓는 게 싫었다. 봄 따위 영원히 침몰해버렸으면 좋겠다. 봄이면 찾아오는 황사에 미세먼지까지 매우 나쁨인 날, 나는 미니스커트에 굽 높은 운동화를 신고 차들 사이를 총총 뛰어다녔다. 출렁대는 가슴과 씰룩이는 엉덩이에 점수를 매기고 있을 남자들에게, 나는 썩소와 가운데 손가락을 날렸다.

그래 괜찮다. 마음대로 평가하고 입맛을 다셔라. 난 타인의 시선 따위 1도 신경 쓰지 않으니깐. 아이씨, 다들 마스크 하는데 저 인간은 마스크도 못하게 하고.

나는 책상에 발을 올리고 반쯤 누워 휴대폰으로 화투를 치는 사장을 째려보았다. 사장은 백구의 똥보다 못한 짐승이다. 월급 주는 날 빼곤 말 한 마디 섞고 싶지 않은 인간쓰레기다. 손님이 없으면 사무실에 들어가 쉴 수 있었다. 나는 사무실에 들어가는 걸 봄만큼 싫어했다. 사장은 월급을 자동이체 해주지 않고, 직접 손에 쥐어주었다. 월급봉투를 침대 삼아 손을 눕히고 덮쳤다. 눈으로는 희롱을 멈추지 않았다. 나는 손톱으로 손바닥을 긁었다. 월급날마다 억지웃음을 지으며 위기를 넘겼다. 더러운 손이 더 못된 짓을 하면 불알을 차버릴 거다. 마음속으로는 전의를 불태웠다. 다행히 아직 그 상황까지 온 적은 없다. 손바닥을 긁는 버릇이 생긴 건 주유소에서 일하고부터였다. 물을 마시러 사무실에 들어갔다. 어김없이 몸에 달라붙는 음흉한 시선에 진저리친다.

“우리 막내 엉덩인 달덩이야. 빵빵한 보름달.”

사장은 손모양으로 주무르는 시늉을 한다. 입술을 쪽쪽 빨고 입맛을 쩝쩝 다신다. 나도 미투! 그러나 외칠 수 없다. 내가 미투를 외친다면 사장은, 딸처럼 예뻐서 그런 건데 기분 나빴니? 예민하네. 하여간 미안. 이제 불편해서 같이 일 못하겠지. 고등학교도 못 나온 거 불쌍해서 일 시켜줬더니. 내일부터 나오지 마. 나를 해고했을 것이다. 나는 뒤통수에도 눈이 있다. 사장의 눈이 옷을 벗기고 몸을 만지고 있는 게 보인다. 개, 새, 끼, 숨어서 눈으로 하는 강간 따위 반사다. 나는 호루라기를 입에 물고 마음을 다잡는다. 무서움은 견디면 되고 서러움은 참으면 된다. 그래도 화가 나고 겁이 나는 건 어쩔 수 없다. 나는 당장 일을 그만두고 사장을 고발하고 싶다. 하지만 엄마를 생각하면 참을 수밖에 없다. 나는 견디며 싸웠다. 낭만적 사랑도 지루한 틈도 없었다. 나는 계절의 갈피를 넘기며 강해졌다. 마침내 전사가 되기로 결심했다. 내가 있는 이곳이 총알이 날아드는 전쟁터일지라도. 사는 날까지 그냥 열심히 살아내겠다고. 죽는 날까지 씩씩하게 살아가겠다고.

“막내야, 어깨 좀 주물러봐. 용돈 줄게.”

인간쓰레기가 다시 몸을 더듬었다. 입맛이 더럽다. 사는 맛이 딱 바닥을 치는 똥맛이다. 나는 속으로 치를 떨면서 웃었다.

“사장님. 퇴근할게요.”

나는 도망치듯 벗어났다. 꽃잎이 눈발처럼 날린다. 마스크를 한 사람들이 무심하게 스쳐간다. 나는 화장실에서 옷을 갈아입는다. 사무실 안 탈의실 자물쇠는 고장이었고 가림막은 시스루처럼 비쳤다. 천장엔 구멍이 있었다. 모기가 드나들 만큼 아주 작은 구멍이. 화장실은 경찰차가 수시로 주유를 하러 드나들었기에 안전했다. 나는 쉬는 날이면 황학동 벼룩시장에서 옷을 사곤 했다. 바닥에 마구잡이 펼쳐놓은 데를 이 잡는 뒤져 이삼천원짜리 옷을 계절별로 서너 벌 샀다. 깨끗이 빨고 수선하면 명품 빈티지샵에서 산 옷처럼 괜찮았다. 오늘 나는 발목까지 오는, 체크무늬 화려한 긴 치마와 흰 셔츠를 입었다. 가면 같은 못난 미소는 눈앞 거울에 포스트잇처럼 붙였다. 나는 며칠 안 남은 월급날을 헤아리며 종종걸음쳤다. 은색 호루라기가 흔들리며 빗장뼈를 간질였다. 영화만 보면 된다고 했다.

유럽영화 봐야지. 저녁도 먹었으면 좋겠다. 크림파스타. 떨린다, 떨려. 봄이야, 힘내자.      


토요일 저녁 7시, 스타벅스는 빈 자리가 없었다. 남자를 찾아 주위를 둘러본다. 혼자 앉아 창밖을 보며 다리를 떨고 있는 남자가 있다. 나는 단박에 남자를 알아봤다. 나는 의자를 바짝 당겨 앉았다.

“아저씨 유럽영화 좋아해요?”

남자의 요구사항은 어리고 명랑한 여자와 영화를 보고 싶다는 것이었다. 나는 처음  남자를 오래된 친구를 오랜만에 만난 것처럼 과하게 반겼다. 어린 여자가 나이 많은 남자를 상대할  두려움을 감추려는 허세였을 것이다. 어쩌면 강자에게 약해보이지 않으려는 약자의 보호본능인지 모른다. 나는 도발하듯 눈을 똑바로 맞췄다. 쑥스러움이나 부끄러움을 느낄 여유가 없다.  눈동자는 결코 흔들리지 는다. 남자는 흠칫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아무도 관심이 없다. 남자는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는 사람이었다. 남자가 입술을 핥고 나를 보았다. 남자는  얼굴과 몸매를 평가하고 선택할 것이다.

싫다. 싫다. 정말 싫다. 이렇게 돈을 벌어야 하는 상황이 너무 싫다. 아니, 아니, 너무 무섭다.

160센티미터 안 되는 키, 볼륨 있는 가슴과 엉덩이, 반달모양의 작은 눈, 얇고 좁은 입술, 푸른 실을 물고 있는 듯 핏줄이 보이는 입가, 광대뼈 언저리는 잘 익은 복숭아빛, 쌍꺼풀 없는 왼쪽 눈 밑 점, 진한 핑크빛 색조화장 때문에 더 앳돼 보이는 여자와, 남자는 무엇을 할지 머리를 굴리고 있다. 겁먹은 눈동자는 조명을 받아 빛난다. 남자에게 두려움을 들킬 수 없다. 어리숙하게 보이거나 약해보이면 안 된다. 나는 강해진다. 지독히 미운 봄을 견뎌왔듯 두려움을 참는다. 나는 하악질 하는 고양이처럼 손톱을 세우고 눈에 힘을 준다. 남자가 경계를 풀고 웃는다. 맹랑한 내 태도가 밉살맞진 않은 모양이다. 나는 손톱으로 손바닥을 긁는다. 남자가 내 쪽으로 기울이며 속삭인다.

“시간당 삼만원짜리치곤 나쁘지 않다. 근데 유럽영화가 왜 좋니?”

“유럽영환 솔직하니깐. 주인공이 타인 눈치 안 봐서 좋아요. 난 눈치 보며 사는 거 딱 질색이거든요.”

나는 당당하게 말했다. 당당하지 못하기 때문에 더 당당하게 말했다. 남자는 이십 년 전 봤던 프랑스영화, 뽀네뜨가 생각난다고 했다. 엄마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인형과 대화를 나누는 아이가 주인공인, 슬프지만 아름다운 이야기라고 했다. 남자는 나에게 뽀네뜨라는 별명을 붙였다.

“뽀네뜨, 유럽영화 보러가자.”     


유럽영화전용관은 철 지난 해변처럼 썰렁했다. 둘만의 전용관 같았다. 남자는 프랑스영화, 노작가와 창녀의 사랑이야기를 골랐다. 맨 뒷자리에 앉았다. 나는 양반다리로 앉아 치마를 여몄다. 광고가 끝나고 조명이 꺼졌다. 나는 두 손을 맞잡고 손톱으로 손바닥을 긁었다.

“그러지 마. 불안해 보여.”

남자가 들릴 듯 말 듯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못 들은 척했다. 남자가 내 손에 손을 올렸다. 일순 숨이 막혔다. 나는 계속 손바닥을 긁었다. 남자 손에 힘이 들어갔다. 나는 손바닥 긁는 걸 멈추고, 왼손으로 호루라기를 입에 물었다. 남자가 넌지시 나를 훔쳐봤다. 남자 손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나는 한여름 한낮 아스팔트에 떨어진 얼음처럼 녹아내렸다. 영화는 엔딩을 향해 달려 나갔다. 반전은 없었다. 노작가의 자살에 창녀는 오열했다. 극장 안이 울음소리로 가득 찼을 때, 남자가 내 손을 놓았다. 영화는 비극으로 끝났다. 조명이 켜졌다. 나는 일어나 치마를 가지런히 쓸어내렸다. 손을 비비며 남자를 내려다보았다. 남자는 손으로 밥을 떠먹는 시늉을 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크림파스타를 급하게 먹었다. 입속에 있는 걸 삼키지 않고 입속으로 또 밀어 넣었다. 야생동물이 천적을 경계하느라 씹지도 않고 허겁지겁, 아직 살아있는 먹이를 집어삼키듯. 남자도 그런 적이 있었다고 말했다. 밥이 있을 때 먹어두지 않으면 언제 또 배고픔이 찾아올지 몰랐다고. 남자가 입모양으로 말했다. 천천히 먹으라고. 남자는 주위의 시선을 살피고 냅킨에 싼 돈을 건넸다. 나는 손가락으로 숫자를 셌다.

“이십만원. 나 조건 안 해요.”

“알았다. 오늘 기분 좋아서 두 배로 주는 거야.”

남자는 내 정수리를 쓰다듬고 화장실에 갔다. 기분이 이상했다. 몇 시간 만에 좋아하는 유럽영화를 보고, 좋아하는 크림파스타를 먹고, 좋아하는 돈을 이십 만원이나 벌었는데 마음이 편치 않았다. 한숨이 나왔다. 숨을 쉴수록 불편해졌다. 나는 돈을 챙기고 일어났다. 남자의 돈을 훔친 것도 아닌데 발걸음이 빨라졌다.       


팔뚝만한 개껌 뼈다귀를 샀다. 백구에게 빨리 주고 싶어 달렸다. 컹, 컹, 공원 입구에 들어서자 백구가 짖었다. 컹, 컹, 난 집도 가족도 없지만 언제나 즐거워. 컹, 컹, 봄이언니도 나처럼 즐겁게 살아. 백구는 앞발로 박자를 맞추며 반겼다. 한때 나는 백구를 외면했다. 이유 없이 미웠다. 백구는 유독 나에게 관심을 보였다. 마주칠 때마다 꼬리에 엉덩이까지 흔들었다. 껑충껑충 뛰어오르며 좋아했다. 나는 백구가 싫었다. 사고가 난 후 사람도 개도 모든 게 미웠다. 어느 날 백구가 요란하게 아는 척을 했다. 할머니에게 안겨 애교를 부리다 말고, 앞발을 들고 허공을 휘저었다. 나는 고개를 돌렸다. 다음날도 나는 백구를 외면했다. 백구는 한결같았다. 언제나 나를 반겼다. 몸 전체를 흔들며 만져달라고 애교를 부렸다. 나는 화가 났다. 이유 같은 건 없었다. 그냥 화가 났고, 그래서 화풀이를 하고 싶었다. 나는 백구에게 다가갔다. 백구가 벌러덩 누워 배를 내보였다. 나는 백구를 한참 내려다보았다. 백구는 왜 배를 만져주지 않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고개를 좌우로 돌리다 일어나려 몸을 뒤틀 때, 나는 백구 머리통을 걷어찼다. 깽. 백구는 외마디 신음을 토하고 도망쳤다. 나도 무서워 도망쳤다. 이틀 뒤, 백구를 찾아갔다. 다친 건 아닌지, 걱정되는 마음이 가라앉지 않았다. 살금살금 공원에 들어섰다. 컹, 컹, 백구가 짖었다. 앞발을 휘저으며 나를 반겼다. 할머니가 백구 엉덩이를 밀었다. 백구가 달려와 안겼다. 가슴이 쓰라렸다. 코끝이 찡 울렸다. 나는 백구를 끌어안았다.

“빼꾸야, 미안해. 언니가 잘못했어.”

그날 백구는 얼굴이 부르틀 때까지 마사지를 해주었다. 지금 백구는 둘도 없는 깐부다. 백구는 한 발로 내 발등을 붙잡고 정신없이 개껌을 씹고 있다.

“빼구야. 언니 오늘 쫌 무서웠다. 아무리 돈이 좋아도 다신 안 할래.”

백구 머리를 쓰담쓰담하며 호루라기를 물었다. 나는 늦은 밤 모르는 길을 무작정 걷곤 했다. 몸을 피곤하게 만들면 마음도 지쳐, 그나마 잠들 수 있던 시절이었다. 방황하다 고개를 들면 멍든 밤하늘이 슬퍼 보이고, 어른들 말만 믿다 별이 된 친구들이 보였다. 별들이 내려와 내 어깨 위를 사뿐사뿐 걸었다. 나는 멈춰 서서 젖은 머리칼을 털었다. 눈에 돋아난 가시를 뽑고 계속 걸었다. 막다른 골목 끝에서 마주친 검은 그림자. 역시 사람이 제일 무섭다. 그림자가 움직였다. 소리 없이 성큼성큼 다가왔다. 삐익. 삐익. 나는 쪼그려 앉아 호루라기를 불었다. 그림자는 사라졌고, 그 순간 나는 전사처럼 용감해졌다. 호루라기는 그 어떤 무기보다 강했다.      


그해 봄, 엄마는 수학여행비 삼십이만 원 때문에 애를 녹였다. 팔지 못한 무른 딸기를 사과깎듯 다듬던 엄마가 칼을 내려놓고 한숨을 쉬었다. 미안하단 말을 하고 또 하는 엄마가 싫었다. 빨간 딸기가 참외처럼 희노랗게 변했다. 나는 엄마가 내민 딸기를 먹지 않았다. 나는 수학여행을 가지 못했다. 그래서 바다에 빠져 죽지 않았다. 살아남은 학생들은 심리치료를 받았다. 나는 심리치료쌤 앞에서 한 달 넘도록 입을 열지 않았다. 심리치료 마지막 날 심리치료쌤이 애원하듯 뭐든 말하면 도와주겠다고 했다. 힘들어도 견뎌라, 다들 참고 산다. 돈이 사람을 잡아먹고, 돈에 잡아먹힌 사람이 돈으로 부활하고, 그래서 돈이 사람을 편히 살게 한다는 말이 진리가 되더라도. 세상은 아름답다, 살아갈 만하단 거짓말을 하겠지. 나는 침묵을 견디지 못하는 심리치료쌤이 안쓰러워 입을 열었다.

“그날 나도 수학여행 갔어야 했어요. 보상금이 10억이 넘는다면서요. 그 돈으로 아픈 엄말 부자로 만들어줬어야 했는데 넘 아쉬워요. 그때 나도 바다에 빠져 죽었어야 했는데, 진짜 너무너무 아쉬워요.”

나는 덤덤하게 말했다. 심리치료쌤이 나를 끌어안고 울었다. 나는 울지 않았다. 안으로 삼킨 울음이 바깥에서 허물어졌다. 둥근 어깨가 조금씩, 조금씩 무너져 내렸다. 나는 입가에 묻은 침을 닦아내고 마네킹처럼 가만히 있었다.      


그때부터 봄은, 지긋지긋한 계절이었다. 다시 봄이 왔다. 엄마는 몸이 아파 일을 나가지 못했다. 약을 먹으라고, 병원에 가라고 해도 엄마는 대꾸 없이 앓기만 했다. 지겨워 죽을 것 같았다. 이렇게 구질구질하게 사는 거 정말 싫었다. 나는 문을 쾅 닫고 집을 나섰다. 목적지 없이 걷고 또 걷었다. 빚만 한바가지 떠넘기고, 여자 셋 버리고 도망친 찌질아. 잘먹고 잘싸고 잘자고 잘살고 있냐. 나쁜 새끼. 니가 인간이냐. 나는 아빠를 욕하며 미친년처럼 밤거리를 헤맸다. 날이 어두워졌다. 봄밤은 한기를 몸속 깊이 찔러 넣었다. 발바닥이 아프고 추웠다. 무엇보다 배가 너무 고팠다. 경찰지구대 간판이 보였다. 나는 문을 열고 들어갔다. 티브이에선 진실을 인양하라는 집회가 방영되고 있었다. 나는 소파에 쓰러지듯 주저앉았다. 경찰관들이 나를 바라보았다.

“배고파 죽을 것 같은 사람 있으면, 경찰이 도와주나요?”

경찰들은 이유를 묻지도 설명을 요구하지도 않았다. 제일 젊은 경찰이 햇반과 컵라면을 가져왔다. 나는 순식간에 배를 채웠다. 살 것 같았다. 나는 일어나 문 쪽으로 걸어갔다. 경찰 한 명이 따라 나와 내 손에 호루라기를 쥐어주었다. 은색 금속호루라기였다. 은장도처럼 예뻤다.

“호신용 호루라기야. 위험한 일, 힘든 일 생기면 불어. 경찰아저씨가 언제든 달려가 도와줄게.”

 흥, 나는 콧방귀를 뀌었다.

“차비 있니? 아니다, 집까지 데려다줄까?”

“됐거든요.”

나는 고맙다는 인사도 안 하고 등을 돌렸다.      


“빼꾸야. 엄마 병원도 가봐야 되는데 통 시간이 없네. 저번에 병원 갔을 때, 엄마 나 졸라 힘들어. 땡깡 부리고 겨드랑이 꼬집고 그랬다. 근데 엄마가 내 쪽으로 고갤 돌리고 웃었어. 언니 진짜 못됐지. 빼꾸야. 엄만 언제쯤 깨어날까. 빼꾸, 너 언니 얘기 듣고 있어?”

백구는 고개를 좌우로 돌려가며 개껌을 먹느라 내 얘긴 안중에도 없었다.

“오구오구, 마시쪄영.”

컹, 컹, 백구가 짖었다. 멀리서 할머니가 다가오고 있었다. 우리 동네 길고양이들을 다 챙기는 백발의 캣맘 할머니다. 요즘 할머니들처럼 염색도 안 하고 화장도 안 하는 요상한 할머니다. 나는 백구 콧잔등과 목덜미를 쓰담쓰담 해주고 일어났다. 묻지도 않았는데 세상은 이렇다, 사람은 이렇다, 일장 연설을 하는 할머니와 말을 섞고 싶지 않았다. 백구는 개껌을 물었다, 나를 올려다보다, 할머니를 건너다보다, 갈팡질팡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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