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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루 Oct 19. 2021

엄마가 웃는다_2

지금 당장 엄마에게 달려가고 싶다

서울보다 높은 파리의 하늘이 가슴을 트이게 만든다. 그녀는 저만치 서너 걸음 앞서 나간다. 이따금 뒤를 돌아보며 내가 따라오는지 확인한다. 나무로 만들어진 퐁네프의 다리에는 연인들이 많다. 그들은 세느강을 내려다보며 사랑을 속삭인다. 타인의 시선 따위 아랑곳 않고 키스를 하는 커플도 많다. 특히 백발이 성성한 노부부의 볼키스는 참 아름답다. 책을 읽고 있는 할아버지 어깨에 할머니가 기댄다. 할머니는 할아버지의 오른손을 잡고 있다. 할아버지는 한손으로 어렵게 책장을 넘긴다. 할머니가 고개를 돌리면 할아버지는 볼에 키스를 한다. 그녀가 조각상처럼 내 무릎에 앉는다.

“우아, 감동이야. 저 할머닌 백 살도 넘은 것 같아. 내 소원은 저런 예쁜 사랑, 하는 거야.”

그녀는 노부부를 향한 시샘어린 시선을 거두지 못한다. 그녀는 맥주 한 캔을 마시고 취한다. 나는 네 캔을 마셨다. 나는 취하지 않는다. 비둘기들이 벤치 주위에 몰려든다. 그녀가 내 어깨에 기댄다. 그녀만의 독특한 살냄새가 난다. 그녀는 내 무릎을 베고 누워 눈을 끔벅인다. 희미하던 초승달 윤곽이 선명해진다. 숨이 기분 좋게 가빠온다. 몸이 달아오르기 시작한다. 그녀가 눈을 감는다. 나도 눈을 감고 그녀 머리칼을 쓸어내린다. 유람선을 탄 사람들이 손을 흔들며 환호성이 지른다. 그녀가 눈을 뜬다. 그녀는 반쯤 감긴 눈으로 나를 올려다본다. 내 뺨을 어루만진다. 몸을 일으키고 눈을 똑바로 맞춘다. 그녀가 스스럼없이 내 목을 감싸 안는다. 나는 그녀 허리를 받치며 로댕의 키스처럼 껴안는다. 그녀 속눈썹이 떨리는 게 눈에 스친다. 그녀만의 냄새를 깊이 들이마신다. 열기가 올라온다. 그녀 입술에 내 입술을 포갠다. 모든 게 자연스럽다. 서서히 벌어지는 입술에서 따스한 입김이 나온다. 말랑말랑해진 사탕이 내 입속으로 넘어온다. 그녀 혀가 내 혀를 만지고 맛보고 느낀다. 나도 페퍼민트향 배어있는 그녀 혀의 돌기를 만지고 맛보고 느낀다. 우리는 누구의 시선도 의식하지 않는다. 나는 그녀가 멈출 때까지 키스할 수 있다. 비둘기들이 요란한 날갯짓 소리를 내며 날아올랐다. 그 소리에 놀란 그녀가 입술을 닫는다. 보조개가 쏙 들어간다. 그녀는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린다. 나는 거칠어진 숨소리를 들키지 않으려 애쓴다. 나는 그녀 등에 손을 대고 말한다.

“소는 풀을 소화시킬 수 있는 효소 없이 태어난대. 어미가 새끼 입을 핥아서 효소를 넘겨주는 거래. 신기하지? 너, 이젠 술 마셔도 취하지 않을 거야. 난 취하지 않거든.”

그녀는 눈을 감은 채 고개를 끄덕인다. 그녀 숨소리가 잦아든다. 내 열기는 좀처럼 식지 않는다. 비둘기 수십 마리가 다시 벤치 앞에 내려앉았다.


호텔방에 들어오자마자 그녀는 창가 쪽으로 몸을 돌리더니 스스럼없이 옷을 벗는다. 등뼈의 윤곽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엄마의 몸과는 전혀 다른, 건강한 몸이다. 그녀는 엉덩이까지 내려오는  티셔츠를 입고 돌아선다. 그리고 장난치듯 어깨를 으쓱 올렸다 내린다. 싱글침대  개가 나란히 있는 방이다.  침대 맞은편에 그녀가 눕는다. 그녀는 눈만 나오게 담요를 끌어올린다. 에어컨을  방이 춥다. 나는 그녀의 눈동자를 따라다니며 침대에 눕는다. 그녀처럼 나도 눈만 나오게 담요를 끌어올린다. 서로 눈동자를 빤히 바라보다가 같은 타이밍에 , 웃었다.

“난 첫사랑 기억 안나. 넌 첫사랑 언제 해봤어?”

그녀는 첫사랑이야기를 해달라고 졸랐다. 내 첫사랑은 고2때였다. 무모한 가출이었기에 또렷이 기억나는 일이다. 쓴웃음이 얼굴근육을 팽팽히 당겼다. 사랑을 받아본 적 없는 사람은 어느 누구에게도 사랑을 줄 수 없다. 나는 길에서 주워들은 싸구려 사랑이야기를 주절거리기 시작했다.

야외골프연습장에서 먹고 자며 일하는 남자가 있었다. 여자가 아침마다 그에게 커피를 타줬다. 남자는 여자가 고마웠다. 어느  라커에서 여자가 골프백을 꺼내려고 했다. 이층에 쌓아놓은 골프백들이 무너졌다. 그때 남자가 몸을 날려서 여자를 구해줬다. 연습장이 쉬는 , 여자가 남자에게 밥을 사주고 영화를 보여줬다.  데이트였다. 남자는 여자를 좋아하게 됐다. 남자는 막무가내로 덤벼들었다. 공원벤치에서 그들은 키스를 했다. 여자는 남자의 무릎에 걸터앉아 키스를 했다.  시간 넘도록 오래오래 키스를 했다. 며칠  남자는 로댕의 키스라는 조각을 보게 됐다. 자신을 보는 듯했다. 남자는  포스터를 뜯어와 방에 붙여놓고 날마다 여자와 키스하는 상상을 했다. 언젠가부터 여자는 이유 없이 남자를 멀리했다. 남자가 다가가면 갈수록 여자는 멀어졌다. 늦은  남자가 연습장 숙소에 들어가는데, 손님차가 길가에 주차해 있었다. 남자는 손님들 차번호를 모두 외우고 있었다. 1억이 넘는 비싼 차였다.  차안에서 여자가 나왔다. 손이 여자의 엉덩이를 훑었다. 남자는 화가 나는  아니라 도망치고 싶었다. 다음날 남자는 그동안 모은  전부로 목걸이와 반지를 샀다. 여자는 받지 않았다. 아무  없이 여자는 연습장을 그만뒀다. 남자는 여자가 부잣집에 시집  행복하게  산다는 말을 들었다. 남자는 가슴이 아팠지만 어쩔  없다고 사랑을 포기했다. 얼마   남자가 연습장에 왔다. 남자는  남자의 골프백을 꺼내 타석으로 가지 않고 주차장으로 갔다. 남자는 7 아이언으로 차를 부숴버렸다.

“그래서 난 사람도 사랑도 믿지 않아. 차라리 돈을 믿지.”

“우쭈쭈쭈, 맘 아팠겠다. 이리와. 안아줄게.”

“싫어.”

“왜? 나도 그년처럼 도망칠 거 같아서. 난 아냐.”

“웃기시네. 너도 그 여자랑 똑같아. 하나도 다를 것 같지 않은데. 아냐?”

비아냥대는 내 목소리에 냉소가 가득하다. 그녀는 석고상처럼 굳는다. 정적이 흐른다. 그때 침대 위에서 그녀 휴대폰이 요동친다. 그녀는 짐짓 내 눈치를 살피며 욕실에 들어가 통화를 한다. 연달아 담배 세 대를 피울 때까지 그녀는 나오지 않는다. 더는 참지 못하고 욕실 문을 연다. 그녀는 휴대폰을 부여잡고 울고 있다. 그녀는 내일 돌아가야 한다고 했다. 일주일 예정인 여행이었다. 그런데 이틀 만에 돌아가야 한다고 했다. 나도 함께 가겠다고 했지만 그녀는 한사코 여행을 더 하라고 했다. 그녀는 캐리어를 정리하고 벽을 보고 누웠다. 그녀는 밤새 뒤척였다. 이별이 현실로 다가오는 듯했다. 첫사랑처럼 그녀도 말없이 떠나갈 것 같았다. 나도 짐을 정리하고 누웠다. 잠이 오지 않는다. 나는 그녀 머리맡에 앉는다. 모로 누워있는 그녀 얼굴에 손을 가져간다. 손끝이 그녀 귓불에 살짝 닿는다.

“싫어, 싫어. 내 몸에 손대지 마.”

그녀가 잠꼬대한다. 그녀는 몸을 더 작게 웅크린다. 가슴이 먹먹하다. 일방적인 이별통보를 받았다. 이유가 뭐냐고 묻지 못했다.      


그녀가 볼에 뽀뽀를 하며 사랑해, 속삭였다. 밤새 잠적한 연인이 어김없는 아침처럼 돌아온 듯했다. 우리는 이제  시작하는 연인처럼 깍지  손을 흔들며 파리 시내를 돌아다녔다. 나에게  다른 꿈이 생겼다. 그녀와 함께 사랑하며 살아가며 미래를 상상하게된 것이다. 그러나 예쁜 사랑이라는 새로운 꿈이 가슴에서 자라기 시작하자, 불안이 몰려왔다. 그녀 손을  잡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녀 존재를 수시로 확인했다. 손바닥이 축축해졌다. 땀이 접착제로 변해 그녀 손을  손에 영원히 붙여버렸으면 싶었다. 창밖이 희뿌옇게 밝아왔다. 꿈은 깨지고 아침이 왔다.      


그녀는 비행기가 이륙하자 서울에 돌아가면 보기 힘들 거라고 했다. 그리고 다른  없어? 사뭇 진지하게 물었다. 나는 새로운 꿈이 생겼다고 말하지 못했다. 내가 말문을 닫자 그녀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눈을 감고 잠을 청했다. 비행하는 11시간 동안  상상력은 비극으로 치달을 것이었다. 그녀는 내가 다가오는  겁났을 것이고, 나는 그녀가 첫사랑처럼 떠나는  겁났다. 그녀는 도망치고 있다. 나는 그녀를 붙잡고 싶다. 그러나 용기가 없다. 지갑이 얇아지면 비겁해진다. 나는 알고 있다. 서울에 도착하면 그녀는 나를 떠날 것이다. 이별에 맞서지 못하는 무력감에 가슴이 찢어진다. 그녀는 위로가 되지 않는 말로 나를 위로한다.

‘미안해. 이런 말까지 해서 정말 미안한데, 난 니 가난을 감당할 자신이 없어.’     


인천공항에 도착해 택시를 탄다. 그녀는 따로 가지고 밀어냈지만 나는 막무가내로 같이 탄다. 서울로 가는 내내 무거운 침묵이 흐른다. 택시에서 내린다. 그녀는 집으로 가지 않고 멈춘다. 2억이 넘는 차에 기댄  팔짱을 끼고 노려보는 남자가 있다. 전에 내가 부쉈던 차와 비슷하다. 나는 긴장하고 있는데 남자는 동요하지 않는다. 힘을 가진 자의 여유가 느껴진다. 나는 남자의 맞수가   없다. 그녀는 종종걸음으로 남자에게 간다. 남자는 따지듯 소리친다. 그녀는 고개를 숙인  아무 말도 못한다. 내가 아는 그녀의 당찬 모습은 온데간데없다.  남자가 그녀를 구원해주겠다고   남자인가 보다. 남자는 바늘에 걸린 물고기를 요리조리 끌고 다니며 즐기듯 그녀를 당겼다 놓았다 한다. 나에게 자격이 있었다면 남자에게 달려가 주먹을 날렸을 것이다. 예전처럼 세상일에 무모했다면 차를 부쉈을지도 모른다. 그때 여자가 도와주지 않았다면 나는 감옥에 갔을 것이었다. 남자가 호탕하게 웃는다. 화가 풀린 모양이다. 남자가 그녀를 끌어안고 키스한다. 그녀가 구원받는 순간이다. 그녀의 구원을 축하해야 한다. 이미  존재는 사라지고 없다. 나는 주먹을 쥐고 어금니를 문다. 차를 부수지 않기 위해 돌아선다. 아니다. 내가 먼저 도망치는 것이다. 에어컨 없는 집은 한증막이다. 엄마를 찾아 두리번거린다. 히히 웃으며 아들을 기다리고 있어야 하는데, 엄마가 보이지 않는다. 엄마 없는 집이 사무치게 쓸쓸하다.      


다음날 그녀는 차에 타지 않았다.  다음날 그녀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분명 내가 먼저 도망쳤는데, 이미 현실로 받아들었는데, 날마다 다가오는 새벽 2시는 지옥이었다. 마지막으로  번만이라도 보고 싶었다. 소원을 이루게 해줘 고맙다. 행복하게  살아. 하기 싫지만 해야만 하는 사람의 도리를 지키고 싶었다. 그녀  앞에서 기다렸다. 해가  때까지 그녀는 나타나지 않았다.

나는 내가 제어할 수 있는 속도와, 그럴 수 없는 경계를 넘나들며 달린다. 차안으로 칼을 치듯 바람이 몰아친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속도를 이기지 못할 만큼 달리다보면 머릿속이 하얘진다. 이윽고 속도감을 잃는다. 핸들을 놓을 용기가 생기거나, 막다른 길이 나타나기를 바란다. 눈을 감고 비현실적인 속도를 느낀다. 진한 화장에 낯선 그녀가 차 옆을 지나간다. 나는 차에서 내려 그녀를 따라간다. 그녀가 멈춘다. 그녀는 뒤돌아 나를 본다. 나는 달려가 그녀 손을 잡는다. 손이 너무 차갑다. 아무 느낌도 없다. 가슴이 시리다. 그녀가 내 앞에 서있다. 파리에서 키스하던 순간이 떠오른다. 그녀를 꼭 끌어안는다. 그녀 몸에 힘이 전혀 없다. 그녀 입술에 내 입술을 가까이 가져간다. 그녀가 짧게 숨을 들이마시고 길게 내뱉는다. 술 냄새가 진동한다. 나는 그녀 입술에 내 입술을 댄다. 그녀는 고개를 돌리고 나를 밀친다. 현실과 꿈이 뒤엉킨다. 마음과 몸이 따로 놀고 있다. 몸은 오래도록 그녀를 붙잡고 싶은데, 마음은 다급히 도망치고 있다. 나는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천천히 뒤돌아서 걸어간다. 그 순간 나는 혹여 그녀가 달려와 등을 부여잡고 매달리면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는지 모른다. 뒷덜미를 잡아채는 울먹이는 목소리가 아득히 멀어진다. 눈물이 날 것 같다. 내 말이 맞다. 그녀도 그 여자와 다르지 않다. 당연한 일이다. 억울하지 않다. 눈물을 참는다. 나는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누구보다 씩씩하게 걸어간다. 히히, 웃는 엄마가 도로 끝에서 달려온다. 나는 엄마를 부른다. 엄마…….

끼이익!

나는 브레이크를 밟았다. 인정하기 싫어도 인정해야만 하는 일이 있다. 하고 싶지 않지만 해야만 하는 일도 있다. 안개는 물러나고 하늘이 밝아오기 시작했다. 여름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오늘도 무더운 날이 될 것 같다.      


손수레에 폐지를 산더미 같이 싣고 언덕길을 오르는 할아버지가 있다. 느린 걸음이 고단한 하루를 증명하고 있다. 얼굴에 깊은 주름살이 빗살처럼 그어져 있다. 할아버지는 혼자 언덕을 오르기 벅차다. 멈춰선 손수레 뒤에서 할머니가 나타난다. 할머니는  손으로 손수레를 잡고 복대에서 손수건을 꺼내 할아버지 이마를 닦아준다. 할아버지는 할머니 허리를 다정하게 두드린다. 할머니는 손사래를 친다. 할아버지가 할머니에게 물병을 건네며 미소 짓는다. 예쁜 사랑이다. 별안간 하늘이 무너진  가깝게 느껴진다. 손을 뻗으면 잡을  있을  같다. 한달음에 달려가 그녀를 끌어안고 싶다. 시간을 멈추고 오래오래 키스를 하고 싶다.     


엄마가 퇴원하는 날이다. 그녀가 병실 안에 있다. 나는 숨어서 엄마와 그녀를 지켜본다. 엄마와 그녀는 마치  몸처럼 달라붙어 체온을 나누고 있다. 그녀는 엄마를 부둥켜안고 귓속말을 한다. 울먹이는 목소리다.

“엄마……, 힘들어 해요……. 이제 그만해요…….”

“으응…….”

엄마가 끄덕인다. 바보처럼 히히 웃는 게 아니다. 정확하게 이해했다는 듯 긍정하고 있다. 엄마가 그녀 눈 밑을 닦아준다. 소름이 돋는다. 엄마는 그녀의 젖은 눈가를 계속 어루만진다. 그녀가 왜 울고 있는지 이해되지 않는다. 엄마의 정확한 발음과 자연스러운 손놀림도 이해할 수 없다. 그녀가 병실을 나와 아래층 남자병실로 향한다. 나는 그녀 뒤를 몰래 쫓는다. 그녀가 복도 끝 병실로 들어간다. 문틈 사이로 고개를 숙이고 있는 그녀가 보인다. 그녀는 의식 없는 노인 앞에 서서 또 눈물을 흘린다.

“아빠, 나 정말 힘들어. 제발 빨리 죽어.”

여자는 아빠에게 소원을 빌고 있다. 나는 당장 엄마에게 달려가고 싶다. 주차장에서 남자의 차를 봤다. 그녀 집 앞에서 봤던 차넘버를 기억해냈다. 그녀는 병원장실에 들어가 오래도록 나오지 않았다.     


휴대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한다. 10 10. 오늘도 지각이다. 사무실문이 열려 있다. 사무실이 난장판이다. 땅을 계약한 직원들이 부장을 다그치고 있다. 딸에게 땅을  할머니는 사색이 되어 의자에 널브러져 있다. 할머니는 내가 미쳤지, 내가 미쳤지, 가슴을 쥐어뜯는다. 용문신 부장이 멱살을 잡고 늘어지는 할머니를 뿌리친다.  와중에 다른 부장은 사무실에서 도망친다. 직원들도 하나  사무실을 떠난다. 나는 의자에 앉아 전화번호부를 뒤적인다. 아직 지워지지 않은 이름을 연필로 지운다. 연필이  부러진다. 아수라 같던 사무실이 아늑하다. 친구에게 전화가 왔다.

그 욕쟁이아줌마, 사장이랑 짜고 쇼한 거야. 나 다른 사무실로 메뚜기 뛸 건데, 같이 갈래?

나는 대꾸하지 않고 전화를 끊는다. 텅 빈 사무실을 둘러본다. 보타이를 찢어 쓰레기통에 버린다. 계급장을 떼니 대통령도 부럽지 않다. 쓸모 있는 노란연필 몇 자루를 챙긴다. 오늘은 집에 가서 엄마에게 점심을 해드려야겠다.     


히히.”

엄마가 웃는다. 타월로 물기를 닦고 엄마를 안아든다. 내 뺨을 만지려고 엄마가 손을 뻗는다. 엄마 손에서 체온이 느껴진다. 엄마를 방에 눕히고 호박을 따러 밖으로 나온다. 바람이 시원하다. 여름이 끝난 듯하다. 잘 익은 호박을 딴다. 거미줄과 흙먼지를 씻어낸다. 윤기가 흐른다. 호박을 반으로 자른다. 씨를 하나 집어 입안에 넣는다. 사탕을 녹여먹듯 혀로 살살 굴려 본다. 씁쓸한 맛이 나는가 싶더니 단맛이 느껴진다. 처음 만들어보는 호박죽은 맛이 어떨지 궁금하다. 호박을 잘게 썰어 죽을 만든다. 엄마는 입을 오물거리며 나를 보고 있다. 찬물에 죽을 담가 식힌다. 적당한 온도가 된다. 한입 먹어본다. 내 입엔 맛있다. 엄마 입속으로 죽을 밀어 넣는다. 입가에서 죽이 흘러내린다. 어떤 욕망도 남아있지 않은 엄마 눈빛에 먹먹해진다. 입가를 닦는다. 몸이 닿는다. 아, 미처 기억해내지 못했던 엄마냄새가 난다. 나는 어미소가 새끼를 핥아주듯이 입술 언저리를 닦아준다.

“히히.”

엄마가 또 웃는다. 기분이 좋아진다. 엄마냄새가 손끝에 닿는다. 엄마의 볼에 내 볼을 가만히 대본다. 기분이 더 좋아진다. 입꼬리가 올라간다. 눈동자가 따끔따끔 아프다. 불현듯 허기가 느껴진다. 나는 기억에 없는, 그러나 분명히 존재하는 오래전 기억을 되살려 엄마의 젖을 찾는다. 조금 부끄러워진다. 얼굴이 달아오른다. 입가에 미소가 번진다. 첫키스를 하듯 두근거린다. 기억난다. 나는 먹고 살겠다고 울부짖는다. 엄마가 젖을 먹인다. 나는 있는 힘껏 젖을 빤다. 첫젖을 배불리 먹고 새근거리는 나를 상상한다. 젖을 물자, 엄마가 웃는다.

“히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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