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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밴쿠버 딸기아빠 Oct 24. 2019

40대 아재 캐나다에서 취직하다-3. 한 달 출근후기

* 이 글은 약 3년 전, Electrical Apprentice로 일하기 시작한 지 한 달쯤 된 시점에 쓴 글을 다시 정리한 것입니다. 저도 다시 보니, '아~ 이 때는 이런 마음이었구나'싶은 마음이 들고 새롭네요. 이민 가서 Blue Color로 살아간다는 것이 어떤 일인지에 대해 피상적인 수준에서나마 간접 체험이 되지 않을까 싶어서 정리해서 옮겨 봅니다.


1. 요즘은 한국에서도 널리 알려져 쓰이는 영어 표현 중에 Work-life Balance라는 것이 있다. 번역하자면 '일과 삶의 균형'정도 될 텐데,  하나의 관용 어구이자 일반적으로 공유되는 개념이다. 다시 말해, 모든 사람들의 마음속에 Work-life balance라는 개념이 자리 잡고 있다는 이야기다.  가장 쉽게는 돈을 벌기 위해 일하는 시간 대비, 가족과 함께 혹은 개인적으로 쓸 수 있는 시간이 어느 정도 되느냐를 두고 Work-life Balance가 어느 정도인지를 가늠한다.

반면에 '일과 삶의 균형'이라는 자연스러운 표현으로 번역이 됨에도 불구하고, 한국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이런 개념이 특별히 자리 잡고 있는 것은 아닌 것 같다.(나 자신도 그랬다)  한국은 은연중에 '일이 곧 삶'이라는 마인드가 널리 퍼져있고, 개인의 여가나 휴식도 '일'을 하기 위한 재충전의 개념으로 인식되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극단적으로 이야기하면 영어권에서는 '삶'이 중심에 있고, 이 '삶'을 영위하기 위하여 '일'을 하는 반면, 한국에서는 '일'이 중심에 있으며 '일'이 곧 '삶의 핵심'으로 여겨지고 있는 경향이 큰 것 같다.



2. 왜 1과 같은 생각을 하게 되었을까? 일하다 보니 그냥 자연스럽게 머릿속에서 이런 생각이 생겨났다. 그렇다면, 나의 Work-life Balance는 어떠한가? 하루가 24시간인데, 7시간을 잔다고 치면 유효하게 사용할 수 있는 시간은 하루 17시간이고, 일주일이면 119시간이다. 일을 하는데 쓰는 시간은 주당 8시간 X5일=40시간이고, 출퇴근에 걸리는 시간과 출퇴근 준비에 걸리는 시간을 넉넉하게 하루에 2시간이라치면 주당 10시간이 된다. 즉 주당 119시간의 수면 시간을 제외한 유효 시간 중에 50시간을 일에 사용하는 셈이 된다. 시간적인 측면에서만 보자면 내 시간은 일 42%, 삶 58%의 비율로 사용되고 있는 셈이다. 생활을 영위하기 위해 일을 하는데 투입되는 시간이 삶을 살아가는 시간보다 상당히 적으니, 이 정도면 나의 Work-life Balance는 그럭저럭 괜찮은 셈이라고 보아도 괜찮을 것 같다. (물론 퇴근하고 집에 오면 치쳐서 널브러지기 일쑤이고, 그 많은 여유시간을 아무것도 안 하고 그냥 흘려보내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 함정이라면 함정)



3. 이런 계산까지 하게 된 것은 역설적으로 '일이 만족스럽지 않고 힘들어서'일 지도 모르겠다. 직업에는 귀천이 없고, 특히 캐나다에서는 힘든 일 하는 사람이 대접받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지만, 그래서 한국에서 40년 넘게 살아온 지라 '사농공상'의 마인드가 은연중에 뼛속 깊이 자리 잡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먼지 밥 먹는다'라는 표현이 있는데, construction site에서 일을 하다 보니 이 말이 뼈속까지 깊게 공감된다. 일터는 한 마디로 '먼지 구덩이'다. 주말에 깨끗하게 세탁한 작업복을 입고 출근해도 한두 시간이면 다시 먼지투성이가 된다. 공구나 공구가방이 먼지투성이가 되어도 이제 굳이 털어내려고 하지도 않는 경지(?)에 이르렀다. 흙먼지, 시멘트 먼지, 나무 먼지, 금속 먼지... 기타 등등의 갖가지 먼지 속에서 뒹굴며 하는 일이다 보니 '먼지 밥 먹는다'라는 표현이 생긴 것 같다. 그러다 보니 이런 일 하는 사람들의 비주얼은 없어 보이기 마련이다. 육체적으로도 힘이 든다. 더 힘든 날도 있고 덜 힘든 날도 있지만, 안 힘든 날은 없다. 힘든 일을 하면서 살아가다 보면, 아무래도 인생 전체가 좀 힘겹게 느껴지기는 한다.



4. 하루 중에 제일 싫은 시간은 아침에 눈 뜨는 시간이다. 5시 반에 일어나서 대충 주워 먹고 대충 챙겨 입고 일터로 가다 보면, '정말 일하러 가기 싫다. 새벽밥 먹고 일하러 가는 생활을 언제까지 해야 하는 걸까?'라는 부정적인 생각이 매일 든다. 사실 월요병을 모르고 살아온 기간이 꽤 된다. 그래서 이런 싫은 마음이 일의 종류 때문에 생기는 것인지, 아니면 기술적이건 사무직이건 원래 다 생기는 것인지 잘 모르겠다. 기술직이나 사무직이나 다 생기지만 기술직이라서 좀 더 심하게 생기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5. 반면에 하루 중 가장 좋은 시간은 퇴근 시간이다. 한국 같으면 점심 먹고 와서 오후 일과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을 무렵인 2시 반에 중천에 뜬 해를 보며 퇴근을 하다 보면 '이거 꽤 괜찮은 직업인 것 같아'라는 생각이 든다. 사람의 마음이 이렇게 간사하다.



6. 다행한(?) 일은 일을 하는 동안 시간은 참 잘 간다는 점이다. 특히 pipe bending이나 wiring 같이 머리와 몸을 동시에 써야 하는 일을 하다 보면 어느새 두세 시간이 훌쩍 지나가 있다. 그렇게 일하다가 퇴근 시간이 되면 정말 '보~람찬 하루 일을 끝내고 나서~' 노래가 (속으로) 절로 나온다.



7. 이 직업의 장점은 비교적 짧은 기간 안에 급여가 많이 오르고(4년 동안 100% 이상 인상), 일도 점점 덜 힘들어지게 된다는 것이다. 명퇴나 정리해고를 걱정할 일도 없고(lay off 당할 수는 있으나, 같은 직종 다른 회사로 재취업은 비교적 쉬움), 정년이 보장된 것이 다름없다.  어쨌거나, 한국에 계속 남아있었다면 아예 선택지에 올라올 수도 없는 길이었고, 그런 의미에서 감사하게 생각하고 열심히 하는 것이 맞는 것 같다고 생각된다.



8. 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고 했다. 위에서도 언급한 부분들 이외의 장점을 굳이 더 찾아보자면, 몸은 힘들지만 정신적인 스트레스가 적다는 점이 아닐까 싶다. 사람 상대하는 일이 아니라 몸으로 하는 일이다 보니, 일단 사람 관계에서 오는 스트레스가 없다. 자기에게 주어진 일만 성실하게 잘해 낸다면 누가 뭐라는 사람도 없고 실적으로 쪼임 당할 일도 없다. 그리고 일단 퇴근하면 일에 대해서는 깡그리 잊어버릴 수 있다.  사실 이건 꽤 큰 장점인 것 같다. 회사에서 있었던 일로 퇴근 후에도 기분이 엉망이 되는 경험을 직장인이라면 누구나 해 보았을 것이다. 진행 중인 프로젝트나 실적에 대한 부담이 퇴근 후에도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 경우도 많은데, 이런 스트레스로부터 정신적으로 자유롭다는 것은 어쩌면 참 큰 장점일지도 모르겠다. (물론, journeyman 되어서 apprentice들 관리해야 하고, foreman 되어서 경영진들과 부대끼게 되면 좀 달라질지도 모르겠다)



9. 일을 안 하고도 생계를 꾸려갈 수 있다면, 일을 안 하는 것이 하는 것보다는 훨씬 좋을 것 같다. 일을 통한 자아실현... 이라고는 하지만, 사실은 기껏해야 '자기만족'에 불과한 경우가 태반이고, '자아실현'까지 가능한 직업은 매우 한정적이다. (그나마 그 한정적인 자리를 차지한 사람들도 그 자리에서 자아실현을 하기보다는 그 자리가 주는 부, 명예, 권력 따위를 누리는 데만 정신이 팔려있는 경우가 더 많은 것 같다.) 결국 대부분의 경우에 '일'은 생계를 해결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한 것이고, 그렇게 본다면 생계에 문제가 없어서 일을 안 해도 되는 상태에 있는 것이 생계를 해결하기 위해 시간과 노력을 투자해서 일을 해야 하는 것보다 훨씬 나은 상황인 것은 분명한 것 같다. 하지만 불행히도 그런 복은 아무나 타고나는 게 아니다. 만일 지상의 모든 사람이 일을 안 한다면 세상은 유지될 수가 없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인간이라면 누구나 어느 정도의 일과 노동에 대한 부담을 나누어지고 살아가는 것이 공정하고 마땅한 일일 것이다. 그러니 내가 일을 해서 돈을 벌어야만 생활이 가능하다는 점에 대해 불만을 가져서는 안 되는 것 역시 마땅한 것 같다. 다행히도 내가 일해서 버는 수입으로 가족의 생계가 유지되고 더 나은 미래를 꿈꿔볼 수도 있으니, 이 정도면 감사히 생각하고 묵묵히 주어진 일을 하는 것이 맞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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