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인색해지지 않기
어릴 때부터 엄마 곁에서 드라마 보는 걸 좋아했다. 그래서인지 내 인생도 드라마처럼 극적일 거라고, 어떤 사건들이 늘 일어나야만 한다고, 그 와중에도 늘 길은 생길 거라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인생은 그리 쉽게, 드라마틱하게 풀릴 리 없었다. 내가 인정하기 어려운 일들이, 꿈꾼 적 없던 일들이 누구나의 생이 그렇듯 내게도 일어났다. 그것이 인생이라는 것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던 나는 갖가지 거짓들로 나를 치장하곤 했다. 실은 겁이 난 거면서.
어떤 때는 그 거짓이 합리화가 되기도 했고,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한 채 억지로 이어가려 하기도 했으며, 다른 이들과 비교하게 될까 외면하고 살던 때도 있었다. 이어 그 나약한 나의 모습에 취해 나를 더 비련의 여주인공처럼 여기기까지. 그것이 스스로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내 모습이었다는 걸 깨달았을 때는, 내가 1인분의 삶을 잘 살아내고 있을 때였다. 어쩌면 겁내고 약해졌던 시간은 ‘내가 나로 살기’를 제대로 해내기까지의 과정이었던 게 아니었을까.
나는 어떤 사람인가 하는 물음을 종종 생각한다. 평생 그 답을 찾는 게 인생이라지만 나는 순간순간의 내가 어떤 결정을 내리며, 그 결정을 어떻게 책임져가는지 궁금하다. 어쩌면 내 삶을 들여다보는 걸 이야기를 쓴다는 생각으로 살아가는지도 모르겠다. 지나온 시간을 자주 들여다보는 내 습성 역시 이야기를 꺼내어 읽는 과정일지도. 앞으로 일어날 일이 기대되지 않아서가 아니라, 이전의 이야기들이 너무 재미있고 소중해서 가끔 꺼내어 본다.
과거의 내가 했던 어떤 선택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고, 그 시절의 내가 함께 했던 사람들과는 어떤 이야기들을 나누었는지 돌이켜보면 나는 누구인지, 누구였는지 답하기에 훨씬 수월해진다. 그리고 이제는 그런 나여도 앞으로 어떻게 바뀔지는 장담할 수 없다는 걸 안다. 사람은 변한다는 걸 알고 있으니까. 나의 중심만 잘 알고 있다면 어떤 모습으로 변해도 나는 내가 될 것이다.
아침에 일어나서 내가 눈치를 봐야 할 사람은 나다. 내 인생이 내 마음에 들지 않을 때 우리는 흔들린다. 나는 무얼 원하지? 어디에 있고 싶지? 내가 정말 바라는 것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 내 노력을 내가 결정하기. 당신이 아니라 날 위해 노력하기. 싸울 가치가 있을 땐 싸우기. 끊임없이 나로부터 떠나 다시 나로 돌아오기. _박연준, 『고요한 포옹』 중에서
이제는 나를 치장하지 않으려 애써본다. 약해지는 때가 있으면 다시 강해지는 때가 올 거란 걸 안다. 나는 그만큼의 회복력은 있는 사람이니까. 나에게 박하게 굴면 굴수록 움츠러드는 것도 나다. 엄마가 늘 하는 말처럼 ‘되는대로’ 산다는 건, 매일의 내가 행하는 모든 것들을 내가 흔들리지 않고 받아들일 준비가 돼 있다는 말이다. 내 선택을 믿으면 된다.
다행히도 나는 부모로부터 나를 사랑하는 방법을 아주 잘 물려받았다.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다고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바라봐주신 덕분에 혹여 잘못된 길을 내가 택한다 하더라도 그만큼의 책임을 질 줄도 알고, 잘 헤쳐 나가리라는 믿음도 갖고 있다. 그리고 시간을 내어 나를 위한 시간을 마련해야 한다는 것까지도.
부모님은 늘 일상의 작은 여유들을 내게 가르쳐주셨다. 아침에 손수 내린 커피 한 잔을, 좋아하는 음악을 늘 곁에 두는 것을, 찰나의 산책이라도 나를 위해 쓸 마음을, 케이크 한 조각의 달콤함을 자주 깨달을 수 있게 해주셨다. 덕분에 이제는 힘든 일이 닥쳐와도, 예상치 못한 일이 생겨나도 그 속에서 나만의 기쁨을 누릴 수 있게 됐다. 그 기쁨은 나를 일으켜 세우고, 더 단단한 나를 만들어준다. 나에게 인색해지지 않게 될 때가 오면, 세상도 나에게 조금씩 곁을 내어준다.
바로 선 내가 되어야 누군가와 살아갈 때도 사는 기쁨을, 함께 한다는 행복을, 이 모든 것을 가능케 하는 사랑을 나눌 수 있다. 앞으로 내가 살아가는 동안 원하는 건 내가 나로 살아가는 동안 마르지 않는 사랑을 함께 나누면서 사는 것. 그러니 계속 해야 한다. 있는 그대로의 내가 잘 살아갈 수 있게 나를 다독여주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