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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도를 모으는 날들

파도 곁에서 요동치는 마음

by 영롱할영

한 달만에 글을 쓴다. 한 달 전에 남편의 회사에서 지냈던 인턴 생활이 끝났고, 끝나자마자 꽤 바빴다. 프리랜서로 조금씩 일하게 된 어느 대학교의 웹진 인터뷰 기사를 위해 지역을 돌아다녔다. 그리고 바로 엄마의 수술이 있어 엄마와 함께 1년 전 그날처럼 병원으로 향했다. 병원에서의 날들은 요일을 알 수 없을 만큼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게 흘러간다. 한 번 해 봤다고 보호자 노릇이 조금은 할 만해졌다. 어쩌면 그때보다 지금의 내가 조금 더 비워낼 줄 아는 사람이 되어서 그랬던 건지도 모르겠다.


엄마의 퇴원 이후, 잠시 남편과 지내다 이번에는 시아버지가 계신 안양으로 향했다. 크리스마스를 시댁과 함께 보내며 아버님의 환한 웃음을 더 오래 보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남들은 말리겠지만, 혼자 지내시는 아버님을 모시고 살면 어떨까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아픈 사람 없이 지내는 것이 참으로 어렵다는 생각을 자주 했다. 건강한 게 제일이라는 통상적인 말들로 연말 인사를 건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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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가 밝았고, 비로소 나의 시간이 되었다. 일을 하지 않는 지금은 남편이 출근한 후 조금 밍기적대다 바다 산책을 1시간 30분 가량 하고 들어온다. 집을 정리하기도 하고, 책을 잠시 부여잡기도 하고, 의미 없는 영상들을 보며 시간을 보내기도 한다. 이상하게 책상 앞에 앉는 것이 생각보다 쉽진 않았다. 1월부터는 열심히 원고를 쓰겠다는 마음이 무색하게도 앉으면 무슨 말부터 써야할지 감이 잘 안 왔다. 파도를 오래도록 보고 와서인지 마음도 요동치는 것일까. 그냥 나를 이대로 두고 쉬는 것이 좀처럼 쉽지 않았다. 내게 말들이 채워지면 하고 싶은 말들이 써질 거라고 조금 더 기다려보기로 한다.


바다 산책은 되도록 매일 한 번씩 나간다. 거제의 바람은 다행히도 차갑기만 하진 않다. 가끔 햇볕이 따숩게 비칠 때면, 바람도 따뜻하게 불어오기도 한다. 겨울 바다가 더 맑다는 것을 이제야 알았다. 일렁이는 물결을 가만 바라보면서 성큼성큼 걷다 보면 한겨울에도 땀이 흥건하게 흐른다. 라디오를 들으며 걷곤 했는데, 가끔 그 말소리에 생각해야 할 것들이 묻힐 때가 많아 재즈 음악으로 바꾸었다. 생각이 흐르는 곳에 나를 맡기기에는 누군가의 말소리보다 음악이 제격이다. 매일 보는 풍경이지만 조금씩 달라지는 바다의 모습을 1장씩이라도 담아둔다. 이 시간들이 내 인생에서 어쩌면 가장 고요한 날들일지도 모른다. 언젠가 오늘이 그리워질 때 한 장씩 꺼내어서 오늘 모았던 파도를 펼쳐볼 수 있게 파도를 모은다.


산책에서 돌아오고 나면 무얼 해야할지 잠시 고민하다 책상 앞에 우선 앉아본다. 쓰기로 한 원고가 왜인지 자꾸 마음에 안 들어서 썼다 지웠다를 반복한다. 그간 쓰는 일이 전부이기를 바라기만 했을 뿐, 막상 쓰는 일만 내게 남고 나니 오히려 쓰는 것이 더 어려워진 것 같다. 시간이 많을 때보다 짬을 내어 쓰는 글이 더 잘 써진다는 말을 조금씩 실감한다. 그럼에도 책상 앞에는 계속 앉아 있을 작정이다. 무엇이든 쓰고 지우다 보면 내가 써야 할 말들이 나올 테니까. 요동치는 마음일지언정 차근히 들여다 보면 남겨지는 말들이 있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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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말하는 상대는 오로지 남편 뿐인 날들이 많다. 답답할 줄 알았으나 생각보다 답답하지 않다. 요동치는 내 마음을 들여다보는 것만 해도 꽤 시간이 많이 걸리기 때문에, 굳이 누군가와 달리 소통하지 않아도 신경 쓸 거리가 많다. 그간 내가 나에게 소홀했던 건 아닌지 다시 생각한다. 나에게 질문을 던지고 곰곰이 생각하는 시간들이 오래 전부터 필요했던 것 같다. 누구에게 휩쓸리지 않고 나에게만 집중할 수 있는 지금을 온전히 누린다.


새로운 해의 시작을 나를 위해 쓰는 시간들과 함께 지낸다. 나의 마음을 온 힘을 다해 들여다보는 날들, 내면 깊숙하게 박혀 있던 말들을 꺼내보는 날들이 될 거라 믿는다. 거제의 바다와 함께 스미는 오늘이 그렇게 또 쌓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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