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 22시간 후의 1년 전 밤은 아이를 막 재우고 난 뒤 였다.
평소 관심 없던 TV를 통해 듣기 싫은 목소리가 늦은 밤에 들려 '의외다' 싶어 귀를 기울이니... '계엄' 운운 하는 소리를 들었다.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우리 아이 내일 학교 등교는 어떻게 해야하지?' 였다. 아닌 게 아니라 전면 등교 금지령 같은 자막이 뜨기도 했는데, 결국 계엄 해제 후 새벽 3시 후 학생들 등교는 정상화라는 자막이 나를 안심 시켰다.
계엄이 해제되지 않았더라면, 아이를 보낼 수 없었다. 가족 그 누구도 곁을 떠나서는 안 됐다. 나는 80년대의 계엄과 통금, 그리고 등화관제를 몸으로 공기로 느꼈던 사람이어서다.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 공기처럼 당연하던 자유가 박탈되면 삶이 어떻게 변하는지를.
왠만한 큰 건물 앞에는 소총을 든 군인이 경계를 서고, 길을 가는 아무나 붙잡고 불심검문을 할 수 있었다. 젊은 병사들은 특히 또래의 여성들을 검문했다. 옆집 누나는 어느 날 밤 희롱을 당했다고 울면서 집으로 들어왔었다. 남자 어른들이 없던 것은 아니지만, 총든 군인들에게 대항할 어른은 없었다.
순박하던 그 시절이 그토록 무서웠는데, 이번처럼 무식하고 멍청한 자들이 계엄을 휘두른다면 어떨까 생각하고 나는 일년 전 몹시 떨었다. 아닌 게 아니라 최근의 뉴스를 보니 계엄을 위해 북한과 전면전을 계획했었다고 하니, 호전주의자에게 현혹된 군미필자 다운 발상이었다. 아니면, 안방의 광기어린 재촉에 두 손 두 발을 다 들었는지도 모를 일이지.
우리 나라 국민은 예전보다 더 스마트했다. 그래서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그들을 몰아냈다. 그리고 정정당당하게 그들을 단죄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악의 무리들을 빨리 단죄하지 않는다고 성화를 부리지만, 석고대죄를 해도 모자를 판에 무죄 운운 하는 악의 무리들이 여전히 목소리를 높이지만, 나는 앞서 말한대로 피 한 방울 없는 '무혈혁명'이었기에 시간이 좀 더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좋은 것만 취하려고 들지 말자. 아직 한참 동안 시간은 우리의 것이다. 그들이 계엄을 준비한 게 3년 전이라고 하더만, 우리의 단죄도 3년을 계획하면 된다. 서둘러야 할 것이 있다면, 서두르지 말아야 할 것도 있는 법이다. 바로 이번 건이 그럴 일이다. 시간을 논하지 말고, 끝을 본다는 생각을 하자. 여지껏 없었던 완전한 끝을 보자!
-richbo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