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는 위대하다
나르시시스트 남편이라고 장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남편은 대부분 확신에 차있었으며 우유부단한 나 대신 결정을 쉽게 해 주었다. 남들에게 휘둘리는 걸 싫어해 친구도 많지 않고 시댁에선 살가운 효자 아들도 아니었다. 다방면에 지식이 있어 대화의 폭도 넓고 재치 있다. 그의 비위만 맞춘다면 모두가 행복한 것이다. 하지만 삶의 기준이 ‘자신’이 아니라 ‘타인’이 되는 순간을 나는 견디지 못했다. 잔잔하고 평화로운 일상이어도 나르시시스트 옆에선 태풍의 눈과 같았다.
남편은 자신을 ‘공격’한다고 느낄 때 나르시시스트의 면모를 보인다. 자신이 의심받거나 부정되었다고 생각하면 즉각적으로 반응한다. 나의 의도와는 전혀 다른 느낌으로 받아들이는 남편이 이해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자아상’에 손상을 입은 것이다. 본인이 만들어 놓은 멋지고 믿음직하고 똑똑한 ‘완벽한 사람’, 그 허상에서 벗어나면 분노하는 것이다. 자신의 비도덕적인 면은 다수의 사람들과 비교하며 합리화하고 타인의 비도덕성은 추악한 본성으로 바라보며 경멸한다. 나르시시스트의 이상한 사고방식을 알았더라면 남편의 행동에 연민을 느꼈을지도 모르겠다. 한 번은 남편에게 이렇게 말했다.
“당신은 소중한 무언가를 잃어야 후회할 거야. 그게 내가 아니었으면 해.”
아주 가소롭다는 표정으로 남편은 말했다.
“후회? 난 후회 안 해. 헤어질 사람이라면 네가 그 정도 가치밖에 안 되는 거니 다행인 거지.”
그를 바꿀 수도 깨닫게 할 수도 없다는 걸 인정해야 한다. 나르시시스트와 헤어지고 그에게 받은 상처로 사람에 대한 원망과 분노가 스스로를 괴롭히는 동안 나르시시스트는 ‘와, 정말 잘 헤어졌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들의 뇌는 자신이 상처받지 않기 위해 철저히 프로그래밍되어 있다. 그러나 우리는 사랑 앞에서 흔히 착각한다. 그는 나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다른 남자와는 다를 것이며 나를 위해 변화할 수 있다고. 그래, 이런 착각이라도 없이 어떻게 살겠나. 착각이 곧 희망이기도 했다.
다만 나는 희망을 안고 남편에게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투쟁하기로 다짐했다. 이 투쟁의 계기이자 힘은 그와 나의 사이에 태어날 아이였다. 나에게 나르시시스트 남편보다 더 끔찍한 것은 나르시시스트 아버지였다. 임신을 안 순간의 기쁨은 잠시였다. 남편은 자신의 아이를 품은 아내가 떠나지 못할 것이라는 안도감에 더욱 오만했고 존중이 없었다. 나는 들끓는 모성애로 앞으로 어떤 엄마가 되어야 할지 고민했다. 절대 내 아이에게만큼은 지옥을 경험하지 않게 하고 싶었다. 아버지의 기분을 살피며 항상 긴장해야 하는 집에서 어머니가 아버지에게 무시받는 그런 환경에서 자라게 하느니 이혼을 감수하더라도 아이가 태어나기 전 지옥을 끝내고 싶었고 그럴 수 있으리라 믿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