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숙한 곳을 낯설게
때로는 너무 많이 접해서 잘 알고 있다고 착각하게 되는 곳들이 있다. 나에겐 남산이 그렇다. 남산은 영화, TV, 신문 등 어디서나 심심치 않게 배경으로 등장하곤 한다. 랜드마크인 남산타워는 서울을 돌아다니다 보면 어떻게든 보인다. 그래서 너무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보면 내가 "자의로" 남산을 찾아가 본 적이 없다는 걸 알게 된다. 그나마 어릴 적 부모님따라 가본 기억이 전부다.
그러던 중 어느 날 본 영화 『최악의 하루』는 나에게 남산을 방문할 충분한 이유가 되었다. 이 영화는 극 중 인물이 하루 종일 남산을 오르내리며 벌어지는 일들을 그린다. 영화 배경 중 거의 다가 남산 산책길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주인공인 배우 한예리가 푸르른 한낮의 산책길을 거니는 모습도 아름다웠지만, 밤이 오고 가로등 불빛만이 새어드는 나무터널 아래서 춤을 추는 장면도 무척 인상적이었다.
때마침 남산을 방문할 일이 생겼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과 밥 먹고 뭘 할지 고민하다 남산을 가자는 제안이 나온 것이었다. 가난한 취업준비생들이 큰돈을 들이지 않고 놀 수 있는 방안이었다. 사드 배치 문제로 중국인들이 발길을 끊었을 거란 추측도 만장일치에 한몫했다. 오랜만에 조용한 남산을 둘러보고 오자는 거였다. 그렇게 "자의로" 남산을 찾았다.
이태원에서 03번 버스를 타고 15분여 만에 타워에 도착했다. 팔각정 앞에서 무예 공연이 한창이었다. 영화의 한 장면 같은 솜씨에 절로 감탄사가 나왔다. 즉흥적인 방문에 만난 뜻밖의 공연이 뿌듯함을 더한다.
남산타워는 어린 내 기억 속 모습과 확연히 달랐다. 이것저것 새로운 시설들이 많이 생겼다. 그 이용객은 한국인 반 외국인 반. 어쩌면 이곳에 대해 한국인인 나보다 외국인이 더 잘 알지도 모른다. 덕분에 나 역시 여행 온 기분을 느꼈다. 마치 여행자가 우연히 마주친 다른 이와 대화를 나누듯, 우리에게 말을 걸어오는 사람들이 있어 더욱 그랬다. 이것도 여행이지. 나는 마치 여행자처럼 낯선 풍경을 찾아 담았다.
내려갈 땐 영화에서처럼 걸었다. 곳곳에 위치한 전망대에선 한강과 서울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미세먼지로 인해 맑은 하늘과 함께 볼 수 없다는 사실이 슬플 따름이었다. 등산이라면 몸서리치게 싫어하는 나라도 친구들과 도란도란 이야기하다 보니 금세 끝이 보였다. 적당한 아쉬움이 남았다.
수도권에 살다 보면 여기저기 흩어져 사는 친구들과 만날 때 항상 그 중심인 서울을 찾곤 한다. 그러면 계획 대부분이 맛있는 밥을 먹고, 맛있는 커피를 마시는 걸로 끝난다. 그게 서울 시내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기 때문이다. 보기도 좋고 맛도 좋은 끼니와 디저트는 삶의 행복 중 하나다. 그러나 가끔 색다른 하루를 보내고 싶을 때, 잘 안다고 생각했지만 사실 잘 몰랐던 곳들을 찾아보면 어떨까. 다음에 이태원을 찾을 땐 매봉산을 올라볼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