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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uhyeon Jun 13. 2019

너무 한낮의 시련

『너무 한낮의 연애』를 읽고

오랜만에 소설을 집어 들었다. 그간 취준생이라는 명목이 비문학을 고집하게 했다. 그러나 나는 너무도 나약하여 그 이름 아래 끊임없이 자괴와 우울감에 빠진다. 그럴 때면 소설이 답이다. 잠시 지성을 밀어내고 감정에 충실한다. 1년 365일 중 360일 가까이 우울하다 보니 나름 해소할 방법을 찾았다. 외면하기보다 그대로 맞아야 한다.


『너무 한낮의 연애』는 그러기에 충분한 책이었다. 우울을 겪는 시간은 보통 밤에서 새벽까지. '한낮'이란 말은 어쩌면 긍정적으로 들린다. 한낮의 연애란 말은 여름 햇살 아래 펼쳐지는 청량한 장면을 떠오르게 한다. 그러나 책을 읽고 나면 깨닫는다. 밤잠 못 이루고 몸을 뒤척이는 시간 전에 한낮의 시련이 있었음을. 어떤 장에서는 그 새벽 온몸에 소름이 돋기도 했고 어떤 장에서는 연민에 한숨을 쉬었다. 또 어떤 장에서는 그렇게 살아가라는 위로를 받았다. 수록된 단편들을 비롯해 심지어 작품 해설과 작가의 말까지 마음에 와 닿았다.



세상을 이루는 모든 건 지나가는 한 장면일 뿐이다. 영원한 건 없다. 내일이면, 바람 불면 1초 뒤에도 달라질 것들이다. 그러나 세상은 지독하리만치 명확한 '정의(定義)'를 요구한다. 장기적인 인생 설계를 하라 한다. 학창 시절에 결혼 계획까지 세워본 사람 여럿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살다 보면 고작 2시간 뒤의 내 모습이 무척 궁금할 때가 많다. 순식간에 해버릴 선택이 2시간 뒤 내가 어디에 있을지를 결정한다. 분명 지금의 나도, 2시간 뒤의 나도, 전부 나인데, 내가 나를 모른다.


관계도 그렇다. 사실 이 부분을 읽고 한 기억이 떠올랐다. 사귀게 되자 페이스북에 '연애 중' 표시를 띄우자고 조르던 애가 있었다. 나는 연애 중이다, 라는 그 정의를 돌이킬 수 없을까 두려워 싫다 했다. 그리고 5일 후에 헤어지자고 했다. 그 애는 5일 전엔 나를 좋아한다더니, 헤어지잔 말엔 'XXX'이라 했다. 처음엔 내가 잘못한 줄 알았다. 몇 년 지나고 보니, 5일 전 그 순간엔 사귈 만큼 좋았고, 그 뒤론 그렇지 않았을 뿐이다. 영원한 건 없다. 그래서 확신할 수 있는 게 없고, 그래서 나는 앞으로 맞닥뜨릴 모든 결심과 관계들이 두렵다. 무어라 정의하라는 요구들이 두렵다.



두려움 저변엔 경험이 깔려 있다. 모욕감, 모멸감, 굴욕감, 허무함, 허망함… 들을 겪었던 순간들. 내 예상과 다르게 흘러간 일들, 엉망진창 끝나버린 사이, '실패했다'고 불리는 것들, 그로부터 상처를 받은 순간들이 남아 있다. 그 상처를 기억하고 다시는 겪고 싶지 않아 반사적으로 움츠러든다. 나에게 있어 그들은 대게 상처보다는 후회다. 너무 한낮의 연애 중, 무대 위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양희를 마주하다 결국 고개를 떨구고 마는 필용에게서 나를 봤다. 내가 더 신중하지 못해 한 잘못. 누군가에게 준 상처. 나는 분명 마주하기보다 고개를 떨구는 쪽이다. 그러나 삶은 계속 흐르고, 또다시 후회로 남을 것들이 밀려온다. 나아가기 위해선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야 한다. 근데 어떻게 잊어요? 이미 봤는데, 들었는데, 어떻게 잊어요?



맞다. 잊을 수 있는 건 없다. 상처와 후회가 얼룩진 건 특히 더 끈질기다. 그러나 필용의 말 따라 어떤 것은 아주 없음이 되는 게 아니라 있지 않음의 상태로 잠겨 있을 수 있다. 



허상이다. 세상을 이루는 모든 것은 지나가는 한 장면일 뿐이다. 영원한 건 없다. 내일이면, 바람 불면 1초 뒤에도 달라질 것들이다. 지금 내가 겪는 모든 게 그때는 영원할 것만 같다. 내 세상의 전부일 것만 같다. 그러나 사실 여름에 드높던 옥수수밭은 겨울이면 시들어 처지고, 그 너머엔 다른 세계가 있다. 영원한 건 지금 이 분초를 지나는 나 자신과 그때의 세계만이 유일하다. 정의를 내리는 건 오만이다.  책 중 「고양이는 어떻게 단련되는가 」에서 회사는 모과장을 '직능계발부'라는 뭘 하는지 모를 신설 부서로 보낸다. 자사의 이익에 더 이상 쓸모없다는 판단에서였다. 직능계발부, 비정규직, 계약직, 해고… 우리는 얼마나 많은 정의의 폭력 속에 살고 있는가.



그런 삶도 있다. 그저 매 순간 속에서 있는 그대로 존재하려는 의지로 시간을 흐트러뜨리는 삶. 이런 삶으로 폭력을 이겨낸다. 매 순간을 견뎌낸다. 과거에 대한 후회나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 없는 건 아니다. 잠시 있지 않음의 상태로 있다. 대신 순간마다의 나에게 확신을 가진다. 책 말미에 작가는 덧붙인다. "하루를 견디고 책을 집어 들었을 당신에게, 당신은 왜 이렇게 됐습니까, 괜찮습니까, 물을 자격이 있다고 말해주고 싶다. 그리고 당신이 그렇게 묻기 위해 누군가의 곁에 서는 순간 전혀 다른 이야기가 시작될 수 있다고." 순간의 존재들이 모여(連帶하여) 영원을 만든다.



책을 읽고 벅찬 마음을 옮기고 싶었는데 횡설수설한 꼴이 마음에 쏙 들지는 않는다. 잘 모르겠을 때는 책을 또 읽으면 된다. 올해 읽은 소설 중 『쇼코의 미소』와 함께 나만의 베스트 목록에 든다. 삶의 모호함을 길고 긴 이야기로 그려냈다. 그런 그녀를 존경한다.


*이 글은 2017년 4월에 작성한 것을 옮겨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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