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라리메 Oct 06. 2020

평범하지 않은 독특함이라는 무기

영화 "82년생 김지영'을 보고 나서 나는,,,

독특하면 틀린거 아니거든요?


82년생 김지영 영화






나도 82년생이다. 그리고 김지영처럼 너무나 많은 이름 김. 은. 주였다. 지금은 개명해서 이 이름이 아니지만 말이다. 얼마나 평범하고, 튀지도 않고, 거기다 너무 많았다. 국민학교 때 항상 매년마다 반이 바뀌었는데, 반에 꼭 나 말고 은주가 한 명 더 있었다. 그래서 큰 은주, 작은 은주로 불렸다.


김지영처럼 많은 이름 때문에 82년생이라는 생년 때문에 저절로 눈길이 갔던 영화 '82년생 김지영'


영화가 만들어지기 전부터 많은 이야기가 있던 터라 관심은 컸는데 걱정이 되기도 했었다. 하지만 보고 나서 느낀 부분에선 왜들 그렇게 알지도 못하면서 아는 척하며 말을 하는 건지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 그리고 나 역시 같은 시대에 태어나 같은 교육을 받고 같은 문화를 겪으며 지금까지 살아오고 있는 한 사람으로서 우리나라에서 여자라는 타이틀을 달고 태어나면 부당한 대우쯤은 견뎌야 한다는 것을 대부분 사람들 또한 모르지는 않을 것이다.



나는 영화에서 김지영처럼 내 이름이 평범한 게 너무 싫었다. 뭔가 독특하고 특이하고 그러면서 부를 때 이쁜 그런 이름이었으면 했다. 이름도 평범한데 성까지 더 평범한 김 家여서 더 싫었던 거 같다. 다른 성씨였다면 조금은 다른 이름이라 덜 평범했을 텐데 은주라는 이름 역시 지영이처럼 많았던 게 사실이다. 은주로 살아가는 20여 년 동안 나는 불투명한 수채화처럼 삶에서 타이틀 없이 평범하게 튀지 않으려고 애쓰면서 살아왔다. 꼭 나뭇가지가 제 멋대로 삐죽 나오면 자로 잰 듯이 잘라내는 고통을 겪으면서 말이다.


나는 정말 톡톡 튀는 아이였다.


7살 때 말을 안 들어서 어른들께서 “너 왜 이렇게 말을 안 듣니?” 그러면 “미운 일곱 살이라서요.”라고 대꾸하던 어린 꼬마 아가씨였다. 어른들에게 절대로 지지 않는 카리스마도 있었고, 무서울 것이 없던 겁 없던 천진난만하게 걱정 하나 없는 모습으로 말이다.


내가 한 5살쯤 아빠가 엄마 말을 안 들어서 집을 나가서 며칠을 안 들어오신 적이 있다. 그때 외할머니께서 아빠 흉을 보고 있었나 보다. 가만히 듣고 있다가 들고 있던 나뭇가지로 할머니를 가리키면서 훈구를 하더란다. 어린아이가 듣기에도 할머니가 너무 했다고 생각했는지 말이다.


티브이 문화가 발달하기 전 할머니 집에 칼라 티브이가 들어온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지금도 계속 나오고 있는 음료 "쌕쌕" 그때 광고에 음악이 나오면 할머니의 높은 화장대에 기어 올라가 "쌕쌕이 춤을 추던" 모습을 상상한다면 알만하지 않을까? 결코 평범하지 만은 안았다는 것을 말이다.










독특함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기사도 정신까지 발휘한다.

쌕쌕 춤을 잘 추던 당시 5세 때의 일이다. 엄마에게 전화가 온다.

할머니 왈 " 우리 집 돼지 저금통이 너무 가볍다. 혹시 어떻게 된 건지 아니?"

우리 엄마 왈 " 저번에 청소할 때 너무 무거워서 들지도 못했는데, 많이 없어졌어요?"

할머니 왈 " 집안 귀신이지 누구 짓이겠어!! 알면서 딱 잡아떼네 얼른 오지 못해?"

엄마 왈 " 알겠어요. 얼른 가볼게요"

그렇게 할머니 집에 가는 길에 할머니 윗집에 있던 나나 언니가 아이들과 함께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걸어 내려온다.


나나 언니 왈" 은주야, 아이스크림 먹을래? 언니가 사줄까?"

은주 왈 "엄마 나 아이스크림 먹어도 돼요?"

엄마 왈" 응, 일단 할머니 집에 갔다가 나나 언니네 놀러 가서 같이 놀아"

은주 왈 " 앗싸!! 아이스크림 먹는다."


그렇게 할머니 집에 도착한 우리는 할머니의 따가운 눈초리를 받으며 도둑 아닌 도둑으로 몰려가고 있었다.

그때 나나언니가 나를 부르기에 나나언니 집으로 향했는데, 어머나 세상에 문 바로 앞에 냉장고 아래쪽에 반짝이는 동전 뭉치가 도대체 몇 개인 건지 나는 나나언니에게 물었다.

"언니 이 돈 어디서 났어?"

나나 언니 왈" 은주야 쉿!! 이건 비밀이야, 그러니까 조용히 해야 해!

“응 알겠어 언니”

" 너네 할머니 돼지저금통 있잖아 거기서 잘 꺼내면 동전이 꺼내지거든 거기서 꺼내왔지? 앞으로 아이스크림 먹고 싶으면 말만 해 언니가 사줄게"

"언니 그럼 나 아이스크림 사줘"

나나언니 왈" 뭐로 사다 줄까?

"브라보콘 사다 줘 "

언니랑 다른 아이들이 아이스크림을 사러 간 사이 나는 할머니 댁으로 다다다다 달려가서 숨에 찬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엄마 나나 언니 가아~ 글쎄~ 있지~ 헉헉

" 은주야 숨 천천히 쉬고 말해 숨이 차니까 잘 안 들려 뭐라고? 나나 언니가 뭐?

"할머니 돼지 저금통에서 이 르케 이 르케 해갖고(손가락으로 돼지저금통을 잡고 돈을 꺼내는 모양을 흉내 내며) 돈을 꺼냈다고 막 그 돈으로 나 아이스크림 사준다고 해서 지금 사러 갔어 엄마"

할머니 왈 " 돈은 어디 있니? 은주야?"

“할머니 나나 언니네 냉장고 밑에 이 르케 이 르케 착착 모아나 떠(동전 10개를 일일이 모아서 한 줄로 냉장고 맨 아래 틈에 세워둔 모양을 설명중) 일루와 봐요 일루 ~”

이러면서 할머니를 끌고 나나언니가 없는 집에 들어가서 냉장고 밑에 있던 돈을 발견했다. (이때의 시대적 상황상 옆집은 대문을 걸어 잠그고 다니지 않아서 누구나 들어갈 수 있었다. 그래서 좀도둑이 많았다.)

할머니는 도둑으로 우리 엄마를 생각하셨고, 그때 내가 마침 도둑이 우리 엄마가 아니라는 사실을 밝혀내서 우리 엄마의 도둑년 사건을 마무리할 수 있었다.


여기서 한 가지 밝히고 싶은 사건은 우리 할머니와 엄마와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이다. 이 이야기는 82년생 김지영에도 잠깐 비슷하게 나와서 내 눈물이 멈추지 않게 하는 이유이기도 하였다.

82년생 김지영에서 지영이 엄마는 하고 싶던 일을 포기하면서 집안을 돕는데 자신을 희생하고 그러다 다치기까지 한다. 그런 과정과 비슷하면서도 닮은 우리 엄마는 살며, 사랑하며 관계하는 모든 것의 "엄마를 사랑하는 방법" 첫 번째 매거진에서 소개했듯이 둘째 딸이고, 할머니의 모진 학대와 차별대우를 겪으며 어린 나이에 감당할 수 없는 일들 (동생들을 키우면서 제2의 엄마 노릇)을 했어야 했던 상황들이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우리 엄마를 너무나도 싫어하셨고, 다른 자식들과 차별이 너무 심해 심지어 할머니가 담근 김치와 장들을 돈을 주고 사다 먹어야 했고, 정작 김장김치를 담글 때 나와 엄마는 돈을 주면서까지 노동력을 제공하고 있었다.








82년생인 나에겐 엄마와는 다른 차별이 항상 있었다. 예전 어르신들은 남자와 겸상도 못했고, 당연히 집안일은 여자가 해야 하고, 남자가 하는 일은 따로 있는 그런 구시대적인 발상들 말이다.

근데, 내가 어린 시절엔 조금은 달라졌다고 한들 거기서 거기였다. 나름 여자들도 사회생활을 이제 막 하던 때라서 점점 집안일도 남자들이 도와주는 분위기였다.


그러나, 우리 집안은 남자가 하는 게 아니라며 밥상 차리는 일부터 설거지까지 모든 일을 거의 여자들이 도맡아 했다. 나는 이 부분이 정말 이해가 되지 않았다. 왜 똑같이 태어나서 남자는 집안일을 안 하고 여자만 해야 하냐고 따져 물으면 원래 그런 거야 라며 나를 이상하다고 생각하셨고, 나는 반항하듯 친척들이 오면 항상 식사를 거부했다.

식사할 때 자리가 모자라서 모서리에 앉아야 하고, 아니면 같이 겸상을 못한다며 다른 상에서 먹어야 하고, 남자들은 가만히 티브이나 보면서 시간을 때우는데 여자들은 하다못해 수저까지 놓아야 하는데 내 남동생은 아무것도 안 하고 있는 것을 보면 나만 여자라서 해야 하는 그 이유 같지 않은 이유들이 너무 불공평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이렇게 여자만 일해야 하는 가족문화가 싫다고 주장하던 나였다.


왜 사회적으로 이상한 부분을 나를 가지고 뭐 라 하는 것일까? 결국은 지금 가정의 형태를 보라. 대부분 핵가족으로 가족은 분열되어서 지들끼리 살고, 남자들은 집안일과 육아는 도와주는 게 아니라 같이 하는 거라며 사회문화가 바뀌어 가고 있다. 이렇게 변질될 문화를 왜 어렸을 땐 그렇게도 나만 이상한 애 취급을 했는지 지금 봐도 이해가 안 된다.  






그렇게 이상한 애 취급을 하고, 눈치 없게 군다고 항상 듣다 보니 나는 어느새 눈치 없는 사람이 되어갔고, 결국 눈치를 많이 보게 되었다.


하지만 그 눈치는 우리나라를 살아오면서 다들 겪게 되는 현상이고, 심지어 외국에서 생활하던 외국인조차도 우리나라에 몇 년만 살아도 알게 되어 자연적으로 눈치를 보고 눈치껏 행동한다. 신기하지 않나? 외국인도 우리나라에 몇 년만 살아도 저절로 터득이 되는 눈치라는 게 있다는 사실이 말이다.


이렇듯 외국인들조차도 익숙해지는 눈치 문화를 나는 지양한다. 눈치가 없어도 잘 살 수 있고, 눈치가 많으면 솔직히 피곤 해 진다. 그래서 눈치가 없든, 있든 그것은 그 사람의 한 부분이고, 그것이 잘잘못을 따질 수 있는 견해는 아니다.

눈치를 주는 문화도, 눈치를 보는 문화도 어느 정도 없어져도 괜찮을 문화라고 본다. 그렇게 눈치 주지 않아도 사회는 잘 돌아갈 거고 집안도 잘 돌아가므로 그 한 사람을 있는 그대로 바라봐 주는 건 어떨까?








우리나라에서는 독특하면 손해 보는 게 맞는 거 같다. 눈치를 주고, 받는 문화 안에서는 더더욱 튀는 행동은 안되고, 조금이라도 규칙과 어긋나는 행동을 하면 이상한 사람 취급을 하기 일쑤다.


학교를 다닐 때 소풍을 가는 날이면 각 학년과 반 마다 줄을 서있었다. 둘씩 짝을 지어서 나란히 서 있으면 선생님께서 차례대로 걸어가라고 하신다. 그때 줄에서 이탈하면 이상한 아이이고, 줄을 맞춰 걸으면 괜찮은 아이인 거다. 물론 학교생활에서 단체행동을 할 때 조금 더 안전하고 불편을 줄 일 수 있는 부분일 수 있지만, 그것이 규칙을 어긋난 행동을 한다고 해서 이상한 아이가 되는 상황은 적절하지 못한 부분이다.


안타까운 얘기지만 세월호 사건 때 아이들이 정말 모두 착하게 배에 가만히 있으라고 해서 가만히만 있었더니 어떻게 되었나? 모두들 우리 곁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다만, 그 규칙을 어긴 친구들만 돌아왔다. 그 친구들이 이상해서 그런 걸까? 아니다. 자신이 봤을 때 분명 큰 위험이 다가온다고 느꼈고, 그것을 행동으로 옮긴 것뿐이다.


꼭 선생님 말씀이 다 맞지도 않을뿐더러 어른이라고 항상 정답만 맞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래서 사회에서 하라는 대로 내 생각보다 남이 하라는 대로 사는 인생은 어쩌면 우리가 찾는 꿈과는 점점 멀어지게 되는 매너리즘에 빠지게 되는 거 아닐까 싶다. 독특함은 틀린 것이 아님을 잊지 말자.







82년생 김지영



이전 04화 엄마라서 참을 수밖에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