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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리메 Oct 27. 2020

엄마라서 참을 수밖에

가정폭력은 또 다른 폭력을 낳습니다.

"엄마, 우리 어디로 가요?" 베개를 꼭 끌어안은 내가 엄마에게 물었다.

"응, 엄마 외숙모네 집에 많이 춥지? 얼른 가자!!"

한밤중에 나와 내 동생을 끌고 우리 엄마는 어디를 가는 걸까? 과연 우린 왜 잠을 자지도 못하고 밖에서 베개를 들고 걸어가야만 했을까? 그건 아마 우리 집에 안 살고 있는 한 사람 때문일 것이다.





내가 초등학생 때로 기억한다. 우리 아빠는 술만 먹으면 폭력적으로 변하는 주사를 갖고 있었고, 뭐든 맘에 들지 않는다며 집안 물건들을 모두 부수거나, 우리 엄마를 때리거나 우리들을 흉기로 위협했다. 그렇게 나는 어린 시절 매를 맞는 엄마와 폭력을 휘두르는 아빠에게 벗어나고 싶어 빨리 어른이 되고 싶다고 기도하며 버티던 때였다.


그날도 아빠는 역시나 술이 고주망태처럼 취해서는 들어와서 온갖 물건을 던지기 시작했고, 급기야 전화기를 던지더니, 접시까지 깨졌다. 그 접시의 뾰족한 부분이 나의 무릎을 할퀴고 지나갔고, 급기야 피까지 흘리기 시작했다.


엄마가 갑자기 눈빛이 변하더니, 아빠의 손을 잡고 그만하라고 소리쳤다. 그때 흠칫 놀랜 아빠는 엄마의 싸대기를 쳤고, 그 충격으로 넘어진 엄마는 깨진 접시에 손바닥을 짚으셨다. 쓰라린 손으로 엄마는 갑자기 깨진 조각을 들더니 아빠를 위협했다. 그때 조금만 엄마의 이성이 흔들렸다면 엄마는 살인자가 되어 교도소로 우리는 아동보호시설로 보내졌을 거다. 아휴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그렇게 엄마가 하지 않아 주셔서 참으로 감사하다. 다행히도 조금 뒤에 아빠는 술기운에 몸을 가누지 못하더니 옆에 있던 소파에 몸을 뉘이고 그대로 퍼질러 자기 시작했다. 술에 만취해서 아마 다음날 기억도 못할게 뻔하지만 엄마는 이때 도망가야 한다며 우리를 잠옷바람에 베개를 하나씩 꼭 쥐게 하고는 다짜고짜 걷기 시작했다.


그렇게 나는 아빠의 주사를 피해 도망치듯 집을 빠져나왔고, 우리를 보던 엄마의 외숙모는 너무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시더니 이내 "춥겠다며 얼른 들어가자"라며, 우리를 따뜻한 안방으로 들여보내 주셨다. 엄마에게 힘들겠다며 이런저런 얘기들로 지난밤을 지새웠을 우리 엄마,,, 그땐 어려서 지켜드리지 못했다. 얼마나 서럽고 무서웠을까?







엄마와 아빠는 중매결혼을 하셨다고 했다. 아는 분의 소개로 남자가 능력도 있고, 돈도 많이 모았다며 소개 한번 받아보라고, 근데, 원래 아빠에게는 다른 여자분을 소개하는 자리였다고 한다. 근데, 아빠가 엄마를 지나가다 우연히 보고 첫눈에 반해 우리 엄마 아니면 안 보겠다고 했다고 한다. 그렇게 만났는데, 하필 비도 오는데 우산도 안 갖고 온 이 남자가 너무 안쓰럽고 엄마가 품어줘야겠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우리 엄마 마더 테라사인가? 아마 이 얘긴 핑계인 거 같고, 할머니의 편애적인 사랑과 폭력적인 대우에 피신하고 싶으셨다고 한다. 그래서 결혼을 도피처로 생각하시고 말도 안 되는 이 남자와 결혼을 감행하신다. 그것도 선 본 지 3개월도 안돼서 결혼식을 올렸다.


지금으로 보면 3개월이면 괜찮다고 할지도 모른다. 그때 당시의 시대적 상황을 본다면 손만 잡아도 결혼을 해야 하는 시기에 선 딱 한 번 보고 손도 안 잡고 1개월 만에 결혼식 날 잡고, 양가 부모님 뵙고, 그리고 결혼식을 올렸다. 그렇게 우리 엄마는 아빠와 결혼하셨다. 행복한 결혼으로 살 줄 알고 폭력적인 남편이라고 생각도 못한 채로 말이다.





엄마가 아빠와 행복했다면 지금 나의 글은 행복함에 몸서리치는 글로 도배되었을 거다. 아마 나는 사랑 예찬론자로 모두들 사랑하고 결혼하라고 떠들어 댔을 거다.


근데, 나는 정반대다. 아직 결혼 안 했고, 못한 게 아니라 내가 안 하고 있는 상태다. 사랑 예찬론자도 아니다. 그저 사랑은 하고픈데, 그 사랑을 믿지 못한다. 기약 없는 미래를 싫어한다. 믿음도 사랑보다 더 약해 빠져서 잘 믿지도 않는다. 그 믿음에 배신을 당해본 사람이라면 내 말에 고개를 끄덕일 거라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지금의 내 상태가 오히려 더 좋다. 누구의 간섭도, 누구의 생각에 강요되지 않는 유일한 나를 위한 삶 말이다.


내가 결혼을 하지 않는 이유는 단 한 가지이다. 엄마를 보고 자랐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의 주변은 결혼해서 행복한 사람들이 없었다. 대부분 다툼이 잦았고, 이혼했으며, 따로 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결혼에 대한 인식이 좋지 않는데, 결혼이 좋아보일리가 있을까? 그 이유는 다음 사례를 보면 알 수 있다.




경제관념 없는 아빠의 무능력함


우리 아빠는 보일러 설비 업자였다. 나름 사장이라며 기사를 부리고 가게를 열고 이리저리 바쁘게 생활하셨다. 우리를 고등학교까지 아빠 혼자서 버셨으니, 그 노고는 감사할 따름이다. 근데, 아마 엄마의 경제적 관념이 아니었다면 아빠의 벌이로는 중학교도 나오기 힘들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돈에 관념이 없어도 너무 없는 아빠는 할아버지가 아빠에게 물려주신 땅도 형에게 뺏겨서 찾아야 하는데 형이라고 그냥 놔 두자고 해서 그렇게 못 찾고 놓쳐버렸고, 일을 해주고 노임을 받아야 하는데, 말을 못 해서 못 받고 오는 날이 하루 이틀이 아니었다. 그런 일이 생길 때마다 우리 엄마는 해결사처럼 돈을 받아 오시거나 일을 처리하곤 하셨다. 그렇게 엄마의 해결책이 아니었다면 우리 집은 벌써 파산이 낫을 거다.

아빠와 엄마가 싸우는 근본 원인도 돈이었고, 아빠가 술을 마시는 원인도 물론 돈이었다. 그렇게 돈 때문에 싸우다가 돈 때문에 이야기하다가 결국 당신 자신들에게 상처 주는 말들이 오가고 그게 결국 큰 싸움으로 번져 하마터면 살인사건이 날 뻔한 적도 있었다. 그렇게 끔찍했던 날들이 지나고 나서 아빠는 여전히 술을 놓지 못했고, 우리가 대학생이 되던 그 해에 아빠는 역시나 엄마를 폭행하고 있었다.


우리가 없는 틈에 맘에 안 든다며 이불로 엄마를 감싸서 발로 엄마를 차고 그것도 모자라 밖에서 문을 걸고 나가는 등 우리가 알지 못하는 동안 엄마는 병들고 계셨다.


그렇게 우리가 대학을 다니던 그 시기 동안 엄마는 우리가 혹시나 나중에 아빠 없는 자식이라고 손가락질받을까 , 결혼할  아빠가 없으면 상대방 쪽의 부모가 무시할까  그 모든 폭력을 다 떠안고 계셨다. 미련하게도 말이다.

그걸 안 이상 우린 더 이상 엄마를 방치할 수 없었다. 우린 저런 아빠 없어도 괜찮다고 엄마를 설득시켰다. 아빠와 같이 더 있다가는 우리는 엄마를 잃을게 뻔했다. 우린 결국 엄마와 아빠를 분리시켰고, 그렇게 별거 아닌 별거생활이 지금까지 지속되고 있다.

 




이런 결혼생활을 보고 자란 나에게는 결혼이 신기루처럼 멋지게 보이지 않고, 현실 생활의 일부로 받아들여졌다. 단지 연애만 하고픈게 지금의 내 심정이다. 그래서 엄마도 내가 아직 결혼 안 한걸 뭐라 하진 않으신다. 당신은 우리를 위해 희생하셨지만 우리는 당신처럼 희생하듯이 살지 말라고 하신다. 당신께서 해봤지만 자신이 너무 많이 다치기에 그러다가 자식까지 잘 못 될 수 있다는 것을 아셨기에 그러신 거 같다.


아직 엄마가 되어 보지 않아서 엄마라는 이름으로 산다는 게 정확히 어떤 느낌인지 모른다. 그래서 이렇게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잘 모르겠다. 하지만, 우리 엄마가 나를 위해 그리고 우리 가족을 위해 희생했다는 사실은 잘 알고 있고, 그것이 아마 엄마의 사랑이라는 것도 알고 있다. 우리 엄마처럼 우리를 사랑해주는 사람이 이 세상에 또 있을까?




근데, 세상엔 그런 사랑보다 폭력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이 가슴 아프다. 가정폭력은 근절되어야 한다. 하지만, 아직도 사회는 가정의 울타리를 넘을 수 없고, 가정이라는 이유만으로 정당화되는 폭력이 너무 많다.


아동폭력도 마찬가지 아이들의 권리를 침해하고, 가축보다 못한 상태로 키우는 부모들을 보면 울화가 치밀어 오른다. 적어도 자신의 자식이라면 끝까지 책임을 져야 하는데, 무책임하게 내버려 두는 그런 인간 같지도 않은 이들에게 나는 오늘도 당당하게 말을 건다.


" 인생 그따위로 살지 마라 
나중에 천벌 받는다!!



아빠의 폭력으로 우리도 폭력의 피해자처럼 남아있는 반응이 한 가지 있다. 바로 폭력적이라는 거다. 누굴 때린다기보다, 별것 아닌 것에 자주 욱하거나 폭력적으로 변해 하지 않아야 할 말들을 서슴없이 하게 되고, 결국 폭군처럼 분노를 참지 못하는 분노조절장애를 경험하게 되었다.


물론, 아빠 때문이 아닐 수 있다. 그러나, 폭력도 경험하다 보면 학습하게 되고 그것이 정당하지 않음에도 조절이 어려워질 수 있음을 말한다. 근거가 없다고 할지라도 경험상으로 보면 나와 동생은 분노를 잘 조절하지 못한다. 특히 억울한 순간에는 둘 다 폭발한다. 누군가 나를 무시하거나, 나를 조롱하듯 하는 말투만 들어도 가만히 있지를 못한다. 그래서 가정폭력을 겪은 피해자들은 다른 폭력으로 행사하거나 자신을 학대하거나 둘 중 하나로 나타나게 된다.






제발 부탁이다! 폭력이 없는 깨끗하고 양심적인 사회가 되기를 바란다. 나 조차도 분노조절을 위해 노력하려고 한다. 나를 사랑하는 방법을 알게 되었으니, 그것부터 실천해보려고 한다.

우리 엄마도 참고 사셨는데, 나라고 엄마 딸인데 못하랴?


지금보다 더 나은 내가 되기 위해 나는 나를 사랑하는 연습을 하고 있다.


어렵지만 우리 엄마가 나를 사랑했듯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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