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상은 고객에게만 있는 게 아니다 2편
네임밸류에 있는 직원은 AI 같다.
대학병원에 근무해 본 적 없는 나는 간호사로 근무하는 병원이 어디냐고 물을 때가 너무 난감했다. 그건 네임밸류로 분류되는 우리나라 현실 때문이기도 하고 나에게도 어느 정도 그런 곳에서 일하고 싶다는 막연한 목표도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실은 유명하지 않은 이름도 모르는 곳에서 일하는 간호사일 뿐이었다. 그러다 내가 잘하는 분야를 찾게 되었고 그것이 상담업무였다. 그렇게 상담간호사로 업무를 익혀가던 중에 헬스케어 아웃소싱 업체에서 근무를 하게 되었다. 그곳에 입사를 하면서 나름 자부심도 느꼈고 3교대가 아닌 상근직이라는 근무여건과 주말에 쉴 수 있다는 보상이 너무 좋았다.
여기서 첫 업무는 희귀 난치성 질환자인 "폐동맥고혈압" 환우들에게 약복용과 지지를 해주는 역할이었다. 따뜻하고 정감 있는 어조로 해야 하지만 숨쉬기도 힘든 분들에게 너무 상냥한 것도 실례였다. 그렇게 환우분들과 라포를 쌓아가던 중 갑작스러운 프로그램 종료 소식을 듣게 되었다. 내가 담당하던 프로그램이 제약회사로 다시 돌라간다는 것이다. 사람도 새로 뽑고 나는 다른 일을 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때 나를 면접 봤던 이사님께서 내게 기회를 주셨다.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제약회사의 MI팀을 맡아달라는 것이었다. 나는 그 당시에 영어를 잘 못하기도 해서 두려웠다. (물론 지금도 못한다. 부끄럽지만) 그래서 처음엔 어떻게 제가 하냐며 거절했다. 근데, 이사님은 나밖에 할 사람이 없다며 적극 권유하셨다. 어쩔 수 없이 그 일을 맡게 되었고 그렇게 대형 제약회사에서 업무를 배우러 한 달간 근무하러 가게 되었다.
이제 업무를 배운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이었다. 여기 제약회사는 남성의 상징이자 힘이 있는 남자라는 이미지로 인식이 되면서 그 약으로 성장한 회사라 그런 문의가 많이 들어왔다. 급하게 울린 전화를 받았는데 남자분이셨고 목소리로는 중년분 같았다.
그분의 전화 목적은 제약회사에서 판매한 정식 인증된 약이 아닌 위약을 먹고 부작용이 나서 전화를 걸었던 거다.
힘이 안 난다면서 부작용이라고 하는 그분에게 정식 인증 되지 않은 약을 복용하면 부작용이 나타날 수 있다고 설명했으나 그분에겐 들리지 않았다. 그러더니 나에게 "남근이 있냐며 네가 그걸 아냐"며 답답해하더니 의료진 바꾸란다. 나의 대답이 시원치 않았는지 남자 선생 바꾸고 계속 말한다. 그러다 또 "남근도 없는 네가 뭘 아냐"며 계속 같은 말 하지 말고 빨리 남자 의사 바꾸란다.
그때 당시 전화상담은 고객이 왕이었기에 함부로 전화를 끊어서도 안되었고, 욕설을 듣거나 안 좋은 소리를 들어도 꾹 참고 묵묵히 들었어야 했다. 대꾸도 안되고 어떤 언쟁을 해서도 안 되는 인권이 보장되지 않은 곳이었다. 그 소리를 30분 넘게 듣고 있었고 다른 전화는 밀려있고 업무도 처리해야만 하는 일들까지 밀려서 야근은 당첨이나 마찬가지였다.
내가 하는 일은 제약회사 내부에 있는 의학정보실이라는 곳에서 파견근무를 하는 중이었고, 약사님들께서 답변을 하기 부족한 일들을 내가 처리하는 것이었다. 여러 가지 문의가 왔지만 그중에서 가장 많은 질문과 의료진이 아닌 일반인들에게 상담이 자주 오는 곳이기도 하다. 그렇게 여러 곳에서 오는 질문들과 요구들을 처리하는 게 보통일이 아니었다. 일이 밀려서 매일을 야근하다시피 했지만 보수는 똑같았다. 야근을 인정해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가 할 일을 제시간에 안 한 내 탓이라는 것이다. 지금 보면 약사들이 자신의 파트에서 하기 싫은 일들을 모두 떠맡기는 느낌이었다.
그때 내가 제일 힘들게 느껴진 건 나를 지도하던 약사였다.
한마디로 간호사로 따지면 프리셉터나 다름없었다. 아니면 사수라고 불러야 할까? 그런 그녀가 나에게 하던 말은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그가 한 말 그대로를 토시 하나도 빼놓지 말고 다 적으라는 것"이다. 요즘이야 통화 녹음이 되는 시대라서 통화가 끝나고 그 내용을 다시 들어볼 수가 있다. 근데, 그때 당시에는 그런 기능이 없었기 때문에 전화로 말하는 내용 모두를 펜으로 노트에 기재한 후 그 내용을 다시 그 제약회사만의 작업 프로세스에 기록해야 하는 것이 가장 중요했다. 외국계 회사라 조금만 틀려도 다시 수정해야 하고 절차가 까다로웠다. 그런 중압감 속에서 어떤 내용들은 영어로 되어 그 부분에 대한 고충도 있었다.
그리고 그 사람과의 통화가 끝나고 쉬지도 못한 채로 다음 전화를 계속 받아야 했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인 나를 쉬게는커녕 계속 오는 전화를 무조건 받으라고만 했던 그녀였다.
융통성도 없고 너무 FM인 그녀에게는 그 일이 당연하겠지만 사람에게 감정을 상하고 그 일을 통해 상처를 받은 사람에게 괜찮냐는 말 한마디 없이 그렇게 하면 된다며 AI처럼 말한다.
꼭 감정 없는 사람처럼 말이다. 다른 일을 처리할 때도 역시나 흐트러짐 없이 업무 매뉴얼 그대로 로봇처럼 일하는 그녀였다. 답답함을 넘어서 사람 같지가 않았다. 아무리 얘기를 해도 이해하지 않았다. 아니 이해를 못 했다. 전형적인 tj성향 같다.
그런 전화들이 한 둘이 아니었다. 나와 상담하던 이들 중 대부분은 그 약제 때문에 전화주는 사람들이 많았고 그들 중 몇몇은 부작용이라며 환불을 요구하거나 심지어 찾아오겠다고 협박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점점 전화 상담이 두려워졌다. 어떤 얘기를 들을지 몰라서 불안했고 심장이 너무 빨리 뛰어서 죽을 것만 같았다. 숨이 잘 안 쉬어지기도 했다. 그렇게 일을 배우면서 내 몸은 말이 아니었다. 온몸에서 통증이 느껴졌고 손이 바들바들 떨렸고 심장은 마구 뛰었으며 일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제일 심한 건 다리 쪽에 예전에 삐끗해서 다친 곳이 통증으로 왔는데 꼭 송곳으로 내 다리를 왔다 갔다 하듯이 느껴지는 것이었다. 때론 더운물 찬물이 번갈아 내 다리로 끼얹어지는 것 같았다. 아무것도 없는데도 말이다.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극심한 통증은 처음 내가 글로 작성했던 복합부위 통증 증후군이었다. 그렇게 스트레스를 견디다 못해 그 모든 것을 내 몸으로 받아버린 채 나는 나를 점점 잃어갔다.
3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