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학기는 학교를 옮기고 처음 맞이하는 학기였다. 예기치 않았던 COVID-19상황으로 학교는 비상사태였고, 3월 중순에야 온라인 강의로 아이들을 처음 만났다. 설계 스튜디오 수업은 일대일 기반의 실기 수업인지라, 선생도 학생도 어리둥절했다. 게다가 이번에 맡은 스튜디오는 보통 두 학기에 걸쳐 각각 진행되는 계획설계와 실시설계를 한학기에 몰아놓은 통합설계 스튜디오로, 어마무시한 일정을 온라인을 통해 지도해야 해 무게를 더했다.
구글 리모트 컨트롤과 카카오톡을 통해 아이들과 첫 인사를 했다. 일단 불안해 하는 아이들을 '나쁜 날씨는 없다. 나쁜 복장이 있을 뿐이다'라는 말로 진정시켜두고, 카톡으로 자기 소개를 했다. 온라인 수업 전환으로 수강률이 낮았던 한 반이 폐강되며 두 친구가 더 우리 반으로 왔고, 그렇게 일 주일에 두 번 아이들과 랜선을 통해 만나는 일상이 시작되었다. 수업 시간은 1일 5시간이지만, 열 명이 넘는 아이들의 작업을 개별적으로 하나하나 봐주다 보면 정해진 수업 시간을 넘기기는 것은 일상다반사다. 자신의 차례만 지키면되는 아이들과 달리 6-7시간을 연속으로 집중해 듣고 말하는 나는 수업이 끝나면 기진맥진했다.
반 한기를 온라인 강의로 보내고, 실시설계 단계가 왔을 때는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 대면으로 전환했다. 10명 이상은 동시에 입장할 수 없다는 학교의 원칙으로 두 그룹으로 나누어 수업을 해야했고, 결국 두 반을 가르치는 형국이 되어버렸다. 선생이야 배가 되는 노동이지만, 크게 괘념치는 않았다. 실시설계를 1도 모르는 아이들에게 기본부터 하나하나 제대로 가르치려다보니, 그 시간과 노력은 한도가 없었다.
그러다 사건이 터졌다. 옮긴 학교는 마침 5년에 한번씩 5년제 인증 자격을 검증받는 인증실사를 앞두고 있었고(현재 건축학과는 5년제로 운영되고 있으며, 그 자격을 5년에 한 번씩 재심사 받는다), 기존 데이타 정리가 제대로 안되어 있던 학교는 5년치의 학생 제출물 CD를(약 10,000장) 각 스튜디오에 배분해 재정리하게 했다. 일의 처리 방식이 납득되지는 않았으나, 상황을 고려해 받아들였다. 학과 사무실에서 배분된 CD를 찾아가라는 지령이 와 갔더니, 담당 교수가 학생들에게 배포하고 usb에 옮긴 데이터와 실물 CD를 직접 취합해 학과 사무실 컴퓨터에 저장하고 제출하라는 것이었다. 각 반 반장이 처리하면 될 일을 왜 이렇게 하나 의아했다. 하필 온라인으로 수업을 하고 있는 상황이라 직접 실물 CD를 취합 제출하기는 어려운 상황이여서 학생들이 개별 제출이 가능할지를 문의했고, 담당 조교가 선선히 승인했다. 문제는 여기서부터였다. 오류가 있는 CD들이 꽤 있었고, 그것을 수령하는 과정에서 조교가 제대로 기록하지 않는 바람에, 파일들의 숫자가 맞지 않는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수업 중에 강의실로 찾아온 조교는 실물 CD 5장만 추가로 제출하면 된다고 했고, 알겠노라 답했다. 저녁 7시가 넘어 수업이 끝나고서야 확인한 메세지에는 디지털 파일을 전 학생에게 새로 받아달라는 전혀 다른 내용이 적혀 있었다. 상황을 파악하고자 전화를 했더니, 파일들의 갯수가 안 맞으니 다시 취합해 달라는 것이었다. 본인의 일처리 미숙으로 발생한 문제를 교수가 취합해 주지 않아서라 탓하며 짜증을 내는 것에 어안이 벙벙했다. 어이가 없어 일단 전화를 끊고 가만히 생각해보니, 이렇게 일처리를 하는 이라면 분명히 다시 일이 돌아올 것이 뻔했다. 통화하느라 이미 내려야 할 역은 지나버렸고, 일단 아무 역에나 내려 아이들에게 연락을 했다. 디지털 파일을 가지고 있는지를 파악하고, 스마트폰으로 클라우드를 개설하고 파일들을 올리게 했다. 취합이 다 된것은 자정이 되어서였다. 밤 11시가 넘어 반장 녀석이 전화에 자신이 실수한 것 같다며 사과를 했다. 제출이 다 제대로 되었다며 답을 했었던 바였다. 탓을 하지 않을테니, 다음에는 조심하라고만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
늦은 시간 잠을 청했지만 스트레스가 꽤 되었던지 새벽 세시 반에 잠이 깼다. 도무지 잠이 다시 들것 같진 않아 첫차 시간을 기다렸다 새벽 5시 조금 넘어 출근을 했다. 아이들이 올린 데이터와 개별적으로 연락해 파악한 세부 사항을 일일이 엑셀 파일에 정리해 조교에게 메일을 보냈다.
일은 처리해주나 자신의 잘못을 스스로 해결하지 않고 남에게 전가하는 것은 맞지 않다 싶어, 부당함을 짧게 언급하고 도움이 되시길 바란다는 정중한 내용이었다.
놀라운 답 메일이 돌아왔다. 자신이 퇴근한 시간에 자그마치 7분 20초간이나 전화를 받아주었으며, 당신의 말투가 기분나빠 짜증을 내었으며, 나는 열심이 하는데 맥이 빠진다는 메일이었다. 불쾌함이 온몸을 감싸고 며칠을 앓았다. 학교에 정식으로 클레임을 할까 생각했으나, 스스로 못나지는 것 같아 참기로 했다. 이 정도의 사람이라면 자승자박 할 것이라 생각했다.
놀라운 것은 그 다음이었다. 일주일쯤 지나 인증업무 관련 교수 전체 메일을 보내며 조교는 신임 겸임교수가 인증 업무를 하는 것에 이의를 제기해 인증업무의 필요성에 대해 강변한다며 쓴 것이었다. 신임 겸임교수는 나 하나였다. 내가 클레임 한 것은 인증 업무에 대한 것이 아니라, 본인의 잘못으로 인한 문제를 내 탓을 한 것에 대한 것이었다. 아, 어떻게 이렇게까지 모함할 수가 있는가.
악의적인 조교의 행동에 공식적으로 문제제기를 해야할까 오래 고민을 했다. 감정적인 대응을 넘어 잘못된 것은 바로잡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오랜 고민끝에 내린 결론은 덮는다였다. 학과장에서 보고하면 어떤 방식으로든 조교에게 질책이 갈 것이고, 기분나쁘다고 그만두기라도 하면 당장 9월에 있을 인증 실사 준비에 지장이 갈 것이 불보듯 뻔했기 때문이다. 결국 그 피해는 학생들과 학교에 돌아갈 것이었고, 이는 옳고 그름을 넘어 전혀 바라지 않는 바였다.
스스로 감내하기로 하며, 마음으로 다짐한 것은 이번 학기 친구들에게 마음을 다하겠다는 것이었다. 나는 최선을 다해 이 아이들을 가르치고, 미련없이 떠나겠노라고. 여러 해의 강의 경험을 통해 아이들에게 쏟는 마음이 돌아올 확률이 아주 높지는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에, 학기 중에는 어느 정도 적정한 거리를 유지하다 학기가 끝날 때쯤이야 마음을 열어주곤 했다. 하지만 이번 학기는 지금부터 마음을 아끼지 않겠노라 결심했다.
내가 저 시절에는 무엇이 필요했던가, 앞으로 사회에 나오면 무엇이 필요한가를 끊임없이 생각하며 도움이 될만한 것이라면 아끼지 않고 풀어놓았다. 아이들을 향한 마음도 굳이 감추지 않았고, 가르쳐 줄 수 있는 것은 다 알려 주었다.
그러자 어느 순간부터 아이들이 훅 끌려오는 것이 느껴졌다. 개별 크리틱에도 모두 모여 귀를 기울이고, 한 마디도 놓치지 않으려는 모습을 보였다.
그렇게 충만한 한 학기를 보내고, 기말 크리틱 날 아이들과 저녁 식사 자리를 가졌다. 계획에는 없었지만, 시간이 너무 늦어져 아이들을 주린 배로 보낼 수가 없었던 것이다. 술 한잔이 곁들어진 늦은 저녁을 먹으며, 처음으로 프로젝트에 관한 것이 아닌 개인적인 이야기들을 나누었다. 돌아가며 아이들이 느끼고 생각한 것도 들어보고, 처음으로 나의 개인적인 이야기도 많이 해주었다. 어쩌다보니 새벽 세 시까지 이어진 자리에서 나는 아이들 개인 하나하나를 깊이 들여다보았다. 아이들의 벅참은 새벽 네 시까지 문자로 이어졌다.
일주일 후 마지막 수업을 했다. 아이들에게 1:1의 실제 세계에 들어온 것을 환영한다며 줄자를 하나씩 나눠주고, 시 '청춘'을 읽어주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나의 학생이 되어주어 고맙다고 말해주었다.
그리고 2주 후, 성적 처리를 마무리하고 사직서를 제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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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의식하지 않았던 생일 날 오후, 또르르 문자가 하나 왔다. 이번 학기 가르쳤던 친구의 문자였다.
"안녕하세요 교수님 생신 축하드립니다! 오늘 선물을 드리고자 방문하였는데 건물 전반이 인테리어 공사중이더라구요. 언제쯤 방문해도 될 지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사무실 이사를 하고, 포털과 홈페이지에 주소 수정을 하지 않은 상태였는데, 서프라이즈를 해준다고 연락도 없이 찾아왔던 것이다. 급히 새 주소를 알려주었더니, 한 시간쯤 지나 더위에 지친 모습으로 사무실로 들어섰다. 얼른 차가운 물 한 잔을 내어주니, 포장된 꾸러미를 하나 슬그머니 내민다.
포장지를 풀자 철사 공예로 만든 초상화 액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기말 평가 뒷풀이 자리에서 뭔가를 만들어 드려도 될까요? 물었던 것이 이것이었던 것이다. 초상화를 만드려고 인터넷 포털에 내 사진을 뒤졌다는 고백도 덧붙였다.
'이 것을 만들려고 얼마나 열심히 사진을 들여다보고, 한 땀 한 땀 선을 매만졌을까'
그것을 생각하니 마음이 뜨거워졌다. 너무 마음에 든다고 얘기해주고, 바로 책상 오른편 늘 시선이 가는 곳에 세워두었다.
회의 테이블에 마주앉아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마침 생일 선물로 받았던 책 '나무 이야기'를 아이가 펼쳤다. 여러 나무를 소개하며, 그에 얽힌 다양한 이야기와 아름다운 삽화가 그려진 책이었다. 누가 그러자 할 것 없이 한참을 책을 한 장 한 장 넘기며 함께 들여다보며 까르르 웃고 이야기를 나눈다. 그 시간이 너무나 자연스러워 나중에 되새김질 해보다 깜짝 놀랐다.
'아, 이 아이는 특별한 아이구나.'
저녁을 먹고 가겠냐고 물으니 오늘은 이만 가겠단다. 아마도 생일이니 저녁 약속이 있을 거라 생각해 한 배려일테다. 1층까지 함께 내려가 아이를 배웅하고, 그만 무장 해제되어 해맑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아이를 보내고 한참을 초상화를 들여다 본다. 이것으로 나의 한 학기는 의미 있었다.
가르치는 일을 한다는 것은 지난한 일이다. 요즘은 선생이라는 지위가 우리가 배우던 때와는 다르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황소 고집이고, 예의 없는 경우도 종종 있으며 심지어 소비자의 태도로 선생을 대하기도 한다. 그러나 본업에 막대한 지장을 주는 것을 감수하면서도 수 년간 그 일에 헌신해 온 것은 이런 순간들 때문일 것이다. 사람의 성장을 지켜보는 것을, 그 성장에 징검다리 되어 주는 기쁨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눈부신, 나의 사람아.
2020.09 서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