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우지움
주 : 오랫동안 다듬어 온 원고를 조금씩 풀어놓습니다.
2015년에 지어진 바우지움은 고성군 토성면에 자리 잡은, 조각 전문 사립 미술관이다. 건축가 김인철의 역작으로, 영역을 규정하고 감각을 일깨우는 낮고 긴 벽들의 조직체이다. 벽들이 접히고 펼쳐지고 느슨하게 겹쳐지는 모습이 얼핏 건물이라기보다는 거대한 조각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 콘크리트 벽체 속 큼지막한 돌덩어리들이 그대로 드러난 모습이 충격적이다. 제대로 시공했다면 생겨서는 아니 될, 콘크리트 공사의 대표적인 ‘하자’인 ‘재료분리’ 현상을 의도적으로 연출한 것인데, 이런 발상이 놀랍고, 구현된 결과물은 더더욱 놀랍다. 거칠게 드러난 돌덩어리들은 촉감에 호소한다. 거친 벽면은 반질반질한 유리와 거울처럼 잔잔한 수면에 대조를 이루어, 그 질감이 더욱 도드라진다. 눈으로 본 순간 몸이 근질근질해진다. 바라만 보았을 뿐인데 거슬거슬한 느낌이 생생해서 마치 맨 손으로 만진 것 같은, 아니, 당장이라도 만져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건축은 시각매체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콘텐츠다. 건축을 체험한다는 것은 본질적으로 장소를 체험한다는 것으로, 그곳에서 느껴지는 모든 감각의 총합 그 이상에 관련된 이야기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복제되어 유통될 수 없고, 부분적으로라도 재현될 수도 없다는 본질적인 한계 때문에, 내용을 공유하기 위해서는 그림이나 도판 등, 시각에 호소하는 형식으로 가공될 수밖에 없다.
그런 맥락에서 바우지움은, 건축을 둘러싼 감각 중, 시각에 비해 소외되어왔던 촉각에 호소한다는 점에서, 그리고 완결되어 멈춰진 시간이 아닌 흘러가는 시간을 다루었다는 점에서, 건축적인 의미가 크다.
바우지움의 벽 안에는 시간이 담겨 있다. 콘크리트 벽 속 돌덩어리들이 고스란히 보이는 이유는, 몰탈(mortar/시멘트 풀)이 돌덩어리 사이를 비집고 흘러 들어가는 도중에 굳어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의도한 대로 완성된 모습’이 아닌 ‘과정 속의 어느 순간’을 우연히 목격하고 있는 듯한 착각이 든다. 벽에 새겨진 시간이 촉각을 더더욱 생생하게 만들고 있는 이유는, 다른 감각도 본질적으로 모두 그렇지만 ‘특히 촉각은’ 과정과 시간 속에서 피어나는 감각이기 때문일 것이다. 표면의 질감을 느끼고자 할 때, 순간적으로 닿았을 때 그 순간의 느낌만으로는 불충분하다. 손을 대고 ‘문질러야’ 촉감을 충분히 느낄 수 있고, 그때 몇 초든 몇 분이든 시간이 필요하다. 그래서인지, 시간을 두고 오랫동안 살펴볼 때에는 ‘눈으로 더듬는다’라는 식으로, 촉각적인 표현을 쓰지 않는가.
시각과 촉각의 자극에 익숙해질 무렵, 문득 새삼스럽게 나 자신의 발걸음이 의식되었다. 발아래 서걱거리는 소리가 들렸고, 바닥에 부딪히는 발바닥이 미묘하게 불편하게 느껴졌다. 벽에서 보이던 돌덩어리들이 바닥에도 깔려 있었던 것이다. 날카롭고 큼지막한 돌덩어리들! 숨소리가 의식될 정도로 적막한 곳이었기에, 걸음걸음이 만들어내는 순간순간의 소리 조각들이 내 몸속에 파고들어왔다. 이어서, 소리 조각들은 벽과 벽 사이의 공간을 채우고 튕겨서 벽 너머 손에 잡힐 듯 보이는 저 유명한 울산바위로 뻗어갔다. 그리고 돌 소리는 희미한 메아리가 되어 울려 퍼졌다. 소리는 몸과 바닥을, 바닥과 벽을, 벽과 울산바위를 묶어주었다. 벽 안에 쌓여 있던, 그리고 바닥에 깔려 있던 돌덩어리들의 뿌리가 되는 울산바위. 바우지움으로 인해 장소의 힘이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서걱거리는 돌 소리는 각성된 다른 감각을 묶어주었다.
청각, 시각, 촉각의 공명(共鳴).
각성된 감각은 ‘지금이라는 시간’과 ‘이 곳이라는 장소’에 대한 깨달음으로 이어졌다.
빛은 시각으로, 소리는 청각으로, 맛은 미각으로. 현상과 감각이 일대일로 대응할 때가 많아서인지, 흘러가는 순간순간은 당시의 지배적인 감각 한두 가지로 기억되기 쉽다. 그리고 앞서 다루었던 것처럼, 필요한 상황이 되면 본능적으로 다른 감각을 닫아 두고 특정한 한 두 가지 감각에만 집중하기도 한다. 그런데 사실은 여러 감각이 동시에 겹쳐져 당시의 순간을 총체적인 경험으로 만들 때가 많으며, 어떤 특정한 감각으로 시작되었던 경험이 시간이 흐르면서 다른 감각에 관련된 경험으로 흘러가듯 옮겨질 때도 있다. 갑자기 큰 소리가 나면 소름이 돋는다. 소리는 귀로도 듣지만 살결을 통해서도 느끼는 것이다. 맵고 뜨거운 음식을 정신없이 먹고 나면 한참 동안 시끄러운 음악을 들었던 것 같은 기분이 든다. 키스를 하면 귀에서 종소리가 난다. (고 한다. 나는 그런 소리 들었던 적이 없지만.)
시각에서 촉각으로, 촉각에서 청각으로. 그리고 다시 청각에서 촉각과 시각으로. 때로는 겹쳐지듯 뒤바뀌며 흘러가고, 때로는 맞물려 함께 상승하는 공감각의 패턴. (㈜편하게 설명하기 위해서 여러 감각들이 특정 순서대로 흘러가듯 일깨워지는 것처럼 묘사했을 뿐, 그 순서가 진실은 아닐 것이다. 공감각의 패턴은 고정된 선형의 흐름이라기보다는 순서나 흐름을 파악하기 힘든, 시시각각 변화하며 두서없는 울려 퍼지는 즉흥연주에 가깝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바우지움은 감각의 물결을 생산하는 장치였다.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던 섬세한 감각을 일깨우는 장치였다. 일깨워진 감각을 시간과 장소에 대한 의식으로 묶어주는 장치였다.
아직 경험하지 못한 바우지움을 상상한다.
바람이 세게 불어올 때의 바우지움.
폭우가 내릴 때의 바우지움.
그리고, 바우지움을 방문했던 사람들, 그리고 앞으로 바우지움을 방문할 사람들을 상상한다.
나는 믿는다. 의식했던 의식하지 않았든, 바우지움을 둘러싼 장소의 기억은 바우지움에서의 감각과 함께 각자의 몸 안에 새겨졌을 것이라고.
그리고 또 믿는다. 앞으로 한참 동안 바우지움은 이 곳에 살아남아서 건축의 본질을 입증해 줄 것이라고.
문득 바우지움에서의 감각을 함께 경험한, 그리고 앞으로 경험하게 될,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누군가에게 동료의식을 느낀다. 우리 모두는 바우지움이 맺어준 공동체다. 각자의 몸 안에 바우지움에서의 감각이 각인되었기 때문이다. 건축이 ‘공동체가 함께 누리는 확장된 감각기관’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좋은 예를 이 곳, ‘바우지움’에서 찾았다.
다음 조각으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