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이야기
시조모님의 상을 치르고 다시 서울로 올라왔다. 올해 들어 크고 굵직굵직한 일들을 정면으로 마주하고 있는 기분이 든다. 남편도 나도 아이들도 거처를 옮기며 천막을 치는 몽골인들처럼 새로운 한 해의 시작과 동시에 이곳저곳을 다니며 온 마음을 쓰고, 다시 충전하며 살아가고 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장례를 경험하고 보니 헝언할 수 없는 희로애락이 휘몰아친다. 나의 할머니도 아닌데, 누군가 삶의 마지막을 지켜보고 있자니 비현실적으로 자연스럽고 당연해할 말을 잃게 만든다.
올해 아흔둘. 왕할머니는 몇 번의 전쟁으로 부재했던 왕할아버지와 함께 10남매를 두었고, 그중의 넷은 일찍이 세상을 떠났다. 아들 셋, 딸 셋. 그 아들들의 아들이 셋, 딸들의 아들들이 셋, 사위, 며느리 그리고 꼬마들까지. 두 사람으로 시작해 끝도 없이 이어지고 있다. 그 두 사람이 위에도 무수한 시작이 있었겠지. 무튼 장례식장에 있으니 손님이 없을 때도 그 공간이 가득 차고 넘친다. 검은색 옷을 입은 다 큰 어른들이 웃는 건지 우는 건지 헷갈리는 표정으로 안무를 묻고 울고 무언가를 먹고 그렇게 시간을 보냈다.
왕할머니의 장남의 아들. 내 남편 김 허니. 김 허니의 아내 _ 나. 남편은 할머니가 돌아가셨다고 말하고 남부터미널에서 바로 내려가야겠다는 말을 했다. 곧이어 걸려온 시어머니의 전화에서는 너는 안 와도 되니 괜한 걸음 하지 말아라. 아이들도 있고 코로나도 걱정되니 아예 올 생각을 말아라 하셨다. 나는 시댁에서 내 위치가 내 역할이 무언인지 아직도 감이 안 온다. 오지말라시니 가지 말아야 하는 건가 생각하고 있는 찰나, 친정 엄마는 당장 요가원 문을 닫고 짐 싸들고 내려가라고 말씀하셨다. 도리라고는 모르는 사람처럼 꾸짖으셨는데, 사실 안 갈 생각도 없었다. 다만 어떻게 해야 할지 장례라고는 내 생애 처음이라 조금 당황해 판단이 안 섰을 뿐이다.
늦은 저녁 남편과 함께 길을 나섰다. 다행히 아이들은 차에 타자마자 잠들었고 남편은 조금 긴장을 했는지 아무 말이 없다. 나도 아무 말이 없다. 장례식장에 도착해 영정 사진 앞에 절을 올릴 때도 얼떨떨했다. 그건 남편도 나도 마찬가지다. 아이들은 무슨 일인지 온 가족들을 보고 신이 나서 장례식장을 뛰어다녔고 나는 오랜만에 보는 사촌에 오촌에 육촌 어른들께 인사를 드렸다. 미리 준비해 둔 상복을 입으며 티브이에서나 보던 그 모습이 지금의 내 모습이구나 싶어 고개를 들어 다시 한번 할머니 영정 사진을 보았다.
할머니는 내가 첫 딸 윤솔이를 낳았을 때, 다섯이고 여섯이고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며 아들만 낳으면 된다고 하셨다. 그러면서도 상 위에 있는 통닭을 내가 더 맛있게 먹고 남편이 수다 떠느라 닭다리를 놓치고 있을 때면 화를 내시면서 남편보고 그만 말하고 얼른 닭 먹으라고 큰소리치시기도 했다. 남편 결혼하는 것만 보고 죽어도 소원이 없겠다 하셨는데 증손주 보고도 한 참을 더 큰 어른으로 지내셨다. 장손이자 종손인 남편은 시부모님들이 결혼 7년 만에 어렵사리 얻은 귀한 아들이고 바로 밑에 둘째 아들이 세상에 나오지도 못하고 하늘나라로 가, 그 귀함이 하늘을 덮고도 남는 아들이 되었다. 정작 본인은 모르지만.
왕할머니는 2년 전에 화장실에서 넘어지시곤 요양병원으로 가셨고 2년을 그곳에서 보내고 생을 마감하셨다. 윤솔이 동생 윤성이는 영상으로만 보고 실제론 못 보고 돌아가셨지만 정신이 분명하지 않은 마지막 순간에도 우리 윤성이 윤성이 하고 돌아가셨다.
장례 치르는 내내 남편은 가족들 가장 앞에 섰다. 입관할 때도 가장 마지막에 할머니 얼굴에 수의를 덮는 건 남편의 몫이었다. 차마 그 모습을 볼 수 없어 고개를 돌려 눈물을 흘리자 시어머니는 내게 말하셨다. 장손한테는 시집오는 거 아니라고. 장례 마지막까지 남편은 맨 앞에서 걸어갔고 나는 윤성이를 업고 가장 마지막에 서있었다. 장례를 다 마치고 서울로 올라오는 차 안에서 남편은 말했다. 화장할 때,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고. '할머니, 불났어요 얼른 나오세요' 이렇게 3번을 외쳐야 한다고 했다. 차마 목이 메어와 외칠 수 없었다며 많이 울었다고 했다. 그래도 그 말을 하는 남편의 얼굴에 깊은 슬픔은 사라진 듯 해 마음이 놓였다.
장례 내내 고모, 삼촌 따라다니느라 얼굴도 제대로 못 본 윤솔이는 서울로 올라오는 차 안에서 말했다. 노제 지내는 날 아침, 할아버지 댁 계단을 내려가다가 그만 발을 헛디뎌 발목을 삐었다고. 복숭아 뼈가 바닥에 닿았다며 발을 보여주는데 팅팅 부어있다. 손을 대기만 해도 아프다면서 왜 진작 말을 안 했냐니 자기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고 했다. '나는 사람들이 나를 걱정하는 게 싫어' ' 나도 엄마처럼 커서 혼자서 다 해내고 싶어'
뼛 속까지 나를 닮았구나. 그 혼자가 얼마나 외로운데 솔아, 혼자 속으로 중얼거리며 웃었다. 사람은 혼자서 살 수 없다고, 서로 돕고 걱정하고 사랑하면서 살아야지 외롭지 않다고. 많은 사람들이 할머니가 가시는 길을 함께 한 것처럼, 서로서로 도우며 살아야 한다고. 그래도 솔이는 그러고 싶지 않다는 말을 했다. 주니어 리다운 같으니.
남편은 '내가 이걸 왜 가지고 왔지?' 하면서 주머니 속에서 왕할머니 왕할아버지가 같은 찍은 사진 하나를 꺼냈다. 나는 알고 있다. 남편의 그리움을.
2월은 마음 바삐 흘러간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