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릇을 채우고 흘러넘치는
고모는 나약한 공주병 환자가 될 거라는
할아버지의 예언처럼 되지는 않았다.
어떤 무리에서든 선두에 섰고,
활발하고 영민했으며 또래의 여자친구들보다
두 뼘은 더 키가 컸다.
힘도 아주 세서 웬만한 실험 자재는
혼자 척척 옮길 정도였다.
웃을 때는 목청이 얼마나 좋은지
공기가 우렁우렁 울렸다.
(......)
그녀의 딸은 모든 면에서 그녀의 기대 이상이었다.
그릇을 채우고 넘쳐흘렀다.
정한아 작가 책 [ 달의 바다 ] 중에서
오늘 아침엔 소고기를 구웠다.
키친 타올로 핏불을 닦고
얇게 칼집을 내고
올리브 오일, 소금, 후추를 뿌리고
안방까지 들리게 윤윤이들을 큰 소리로 불렀다.
윤윤 일어나, 아침 먹자!
나는 아이들이 아침을 행복하게
든든하게 그리고 따뜻하게 열 때
가장 기분이 좋다.
내가 하루 중 가장 신경을 쓰는 시간이기도 하다.
절대 등교, 등원할 때
훈육하거나 혼내지 않도록
오늘 하루를 잘 채워나갈 에너지를
원하는 만큼 채우고 문 밖을 걸어 나가도록
항상 정말 항상 애쓴다.
그냥 그러고 싶었다.
유난 떠는 게 아니라 그냥 가족과 집을 떠나
혼자만의 삶을 꾸려나가는 아이들이 대견하고
기특해서 언제나 그러고 싶었다.
그 마음의 첫 시작은
늘 맛있는 아침밥 : )
오늘은 어제 냉동실에서 꺼내 해동해 둔
한우다.
콧노래가 절로 나온다.
요걸로 속 든든히 채우고
씩씩하게 걸어갈 아이들을 생각하니
나의 하루도 힘이 솟는다.
그렇게 식탁에 앉아 윤윤이들이 아침밥을 먹을 동안
나는 이불을 개고 환기를 시키고
오가며 필요한 걸 챙기고
윤윤이들 하는 말에 맞장구를 치고
틈틈이 시계를 보면서
얼른 고기는 다 먹고 가라며 재촉을 해댄다.
그렇게 잠시 식탁 옆에 섰을 때
솔이가 말을 꺼냈다.
그때 그 남자애들 생각할수록 너무 화가 난다고.
얼마 전 급식실에서 있었던 일이다.
창문 모퉁이 거미줄에 몇몇 아이들이 모였단다.
대부분 남자아이들이고
여자는 솔이 혼자.
그렇지만 곤충이라면 솔이가 빠질 수 없기에
솔이도 다가가서 거미줄에 거미를 보고 있는데
남자애들 몇 명이 솔이 보고
저리 가라고
마치 자기들이 쳐 놓은 거미줄에 걸린 거미마냥
솔이를 구경꾼 취급했단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 아니, 이 여자애가! '
그 말을 듣고 온 날
솔이는 분하고 억울함을 식탁 앞에서 쏟아냈다.
자기 거미줄도 아니면서
자기 거미도 아니면서
이 여자애라니.
나도 그랬다.
마치 이 가시내가
또는 이 계집애가 처럼 들리는 건
엄마라서일까?
어디 말을 해도
그런 말을 하지
그때도 솔이의 원통함을
고스란히 드러내 솔이를 위로했던 기억이 난다.
근데 그때 일이 오늘 아침
소고기를 먹으며 다시 떠올랐는지
그날과 똑같이 소고기를 씹으며
얼마나 기분이 나빴는지를 말한다.
그래그래, 오구오구
그런데 그건 그 남자아이들의 잘못만은
아니라고 덧붙였다.
선사시대 즉 원시인 시대 때
사냥을 주로 남자가 하면서부터
그리고 긴 세월의 역사 속에서
남자들이 더 중요하게 여겨졌던 시간이 길었다고 말했다.
그래서 옳진 않지만
여자들이 약하고 작은 존재로 여겨지고
하찮게 불리는 경우가 많았는데
그런 나쁜 흔적들 때문에 아직까지도
그렇게 여자를 얕잡아 보는 사람들이 있다고.
그리고 또 그런 말을 들으면
엄마말을 한 번 떠올리고
두 눈을 똑바로 보면서
맞받아 치라고 말했다.
왜! 이 멍청한 남자애야
이 말을 하곤 너무 전지적 엄마시점
너무 굽은 팔 시점
너무 딸 가진 부모 시점이라는 생각에
화들짝 놀라긴 했지만
'멍청한'이라는 형용사는 내 진심이라는 걸 깨달았다.
그냥 속상한 말을 듣고 속상해만 하지 말았으면
하는 마음에
멍청한 남자애야! 이 말을
몇 번이나 되풀이했다.
그런 나를 보고 소고기에 밥을 먹던
윤솔이와 윤성이는 깔깔깔 웃어댔지만
나는 머쓱해서 뒤돌아 이불 개러 안방으로
가면서도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래도 거기서 그만두지 못하고
이 빙구 같은 남자애는 어떠냐고 덧붙이기도 했다.
화끈 거리는 얼굴 뒤로
깔깔거리던 솔이가
나는 엄마의 그런 말에 위로가 돼
라며 내 얼굴의 화끈거림을 식혀주었지만
그래서 다행히 웃으면서 아침을 마무리했지만
오늘 수영을 마치고 샤워를 하는데
습기 찬 거울을 닦으며
언젠가 선명하진 않지만
살아오면서 겪었던 '여자애'의 자리
그 자리들의 무력함이 떠올라
아랫입술을 깨물게 된다.
간절함이 남는다.
...
오늘 아침의 생생한 윤솔이의 웃음소리를 기억하며
오늘을 기록한다.
[ 그릇을 채우고 흘러넘치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