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나
내가 자라서 나중에 부모가 되면
이치에 맞는 대답을 아이에게 해주자,
내 아이를 지적이고 독자적인 생각을 지닌
하나의 인격체로 대접해 주자,
하고 거듭 맹세했던 어린 시절의 내 결심은
전부 어디로 갔는지
작가 테드 창의 소설 _ [ 당신 인생의 이야기 ] 중에서
어젯밤
집에 모든 불이 다 꺼지고
마지막으로 잠자리에 들기 전
솔이는 급하게 무언가를 들고
거실로 나왔다.
오늘 학교에서 만든 거라며
비닐봉지에서 무언가를 꺼내는데
나는 귀찮기도 하고 졸리기도 해서
내일 아침에 보면 안 될까? 말했다.
내일 아침에 이걸 같이 보면서
전에 들어본 적 없는 유려한 문장으로
칭찬을 해주마 하고는
마음속 귀찮음을 상쇄시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집념의 솔이는
휴대폰 불빛 아래서
끝끝내 비닐 매듭을 풀고
조심히 조심히 무언가를 꺼냈다.
오늘 만든 거라며.
클레이로 만든
빠알간 게, 주황빛 감,
홍고추 청고추 고명이 올려진 도토리묵이
플라스틱 접시 위로 또르르 굴러 떨어졌다.
정말 거짓말 하나 안 보태고
도토리묵은 한 입 베어 물 뻔했다.
고명을 어찌나 맛깔나게 올렸는지
가로등에 뛰어드는 불나방처럼
휴대폰 불빛 아래로 모든 감각이 열린다.
세상에나,
어디서 이렇게 싱싱한 활게 한 마리를 잡아온 거며
까치 먹으라고 남겨둔 하나 남은 감을
따온 건 아닌지
순간 걱정이 될 만큼
먹음직스러운 감이며
아뿔싸,
너에게 너무 뛰어난 재능이
또 하나 숨어있었구나.
에구머니나 이 일을 어쩐담
무용 선수도 해야 하고
한자 선생님도 해야 하고
수학자도 돼야 하고
의사도 돼야 하고
수영 국대도 해야 하고
할 일이 태산인데
거기에 예술까지 하며 인생을 채워나갈
딸을 생각하니 핸드폰 불빛 때문인지
행복에 겨운 건지 눈이 멀 것 같다.
아 이토록 잘난 나의 딸 같으니.
이렇게 칭찬을 하며
이 찰나의 시간에도 너는 엄마의 진심 어린
칭찬을 이끌어내는구나.
대단하도다 감탄도 덧붙였다.
솔이는 그 비닐을 못 풀면 어쩌나
엄마가 오늘 만든 이 클레이는 못 보고
그냥 자버리면 어쩌나 마음이 급했는데
나의 눈먼 칭찬에 함박웃음을 짓는다.
나는 그 얼굴을 보고
오늘 하루의 피로와 고뇌를 상쇄시킨다.
기쁨을 주어 고맙다 딸아.
엄마 정말 행복해 : )
이번 주 언젠가 처음 배영을 배운 날
선생님은 가볍게 내 뒷목을 받쳐주며
왼팔은 백 점, 오른팔은 구십 오점이라고 했다.
돌아오는 길에는
우리 반에서 배영 일등이라고
이목구비가 물속에 가라앉았다 말았다
코로 입으로 내 손으로 뜬 물을 마시고
발버둥 치고 있는 내게
나직하게 칭찬을 남겼다.
나는 배영을 하면서도 늘 숨이 차느라
그 칭찬을 듣고도 웃지도 못하고
구십오 점짜리 왼팔을 저으며 출발점을 향했지만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는
진리를 떠올리며 발등으로 많이 웃었다.
이제 수영을 배운 지 두 달째
내가 부산에 안 왔으면
서울에서 요가원 하며 수영 배울 일이
내 평생 있었을까 가슴이 철렁 내려앉을 만큼
정신 나간 순간의 재미가 있다.
수영은 늘 잘하고 있다는 기분보다
그냥 던져진 기분, 그렇지만 앞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는
숙명을 마주하는 느낌인데
그렇게 허우적대다 보면
어느샌가 진짜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걸 알게 된다.
그 재미에 요즘은 열심히다.
부지런히 물속으로 뛰어든다.
그 재미에 더해
선생님의 나직하고 과한 칭찬을 들으면
낙동강도 거뜬히 건너갈 수 있을 것 같은
뜨거운 열정이 샘솟는다.
내 칭찬에 귀여운
토끼 이빨을 드러내고 웃는 솔이나
내 칭찬에 복근과 알통을 보여준다고
온몸을 부르르 떠는 윤성이나
그리고 낙동강도 건너겠다는 나나
티끌 하나 다르지 않다는 생각에 웃음이 난다.
그리고 더욱 지치지 않는 열정과 꾸준함으로
아이들의 노력을 높이 사고
칭찬을 향한 순수한 집념에
부응하리, 마음먹는다.
지금까지도 잘 칭찬해 왔지만
앞으로도 더욱 신박하고 깊이 있는,
기대를 뛰어넘는 표현으로
아이들의 마음을 벅차게 해야지.
그리고 나도 많이 웃어야지 : )
그 생각을 하며 솔이를 한 번 더 떠올린다.
윤성이를 떠올린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