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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뚜솔윤베씨 Dec 16. 2024

아니 이 여자애가

그릇을 채우고 흘러넘치는 


고모는 나약한 공주병 환자가 될 거라는 

할아버지의 예언처럼 되지는 않았다. 

어떤 무리에서든 선두에 섰고,

활발하고 영민했으며 또래의 여자친구들보다

두 뼘은 더 키가 컸다. 


힘도 아주 세서 웬만한 실험 자재는 

혼자 척척 옮길 정도였다.

웃을 때는 목청이 얼마나 좋은지 

공기가 우렁우렁 울렸다. 


(......)


그녀의 딸은 모든 면에서 그녀의 기대 이상이었다.

그릇을 채우고 넘쳐흘렀다. 



정한아 작가 책  [ 달의 바다 ] 중에서 





오늘 아침엔 소고기를 구웠다. 

키친 타올로 핏불을 닦고 

얇게 칼집을 내고 

올리브 오일, 소금, 후추를 뿌리고 

안방까지 들리게 윤윤이들을 큰 소리로 불렀다. 


윤윤 일어나, 아침 먹자! 


나는 아이들이 아침을 행복하게 

든든하게 그리고 따뜻하게 열 때 

가장 기분이 좋다. 

내가 하루 중 가장 신경을 쓰는 시간이기도 하다. 

절대 등교, 등원할 때 

훈육하거나 혼내지 않도록 

오늘 하루를 잘 채워나갈 에너지를 

원하는 만큼 채우고 문 밖을 걸어 나가도록 

항상 정말 항상 애쓴다. 


그냥 그러고 싶었다. 

유난 떠는 게 아니라 그냥 가족과 집을 떠나 

혼자만의 삶을 꾸려나가는 아이들이 대견하고 

기특해서 언제나 그러고 싶었다. 


그 마음의 첫 시작은 

늘 맛있는 아침밥 : ) 

오늘은 어제 냉동실에서 꺼내 해동해 둔 

한우다. 

콧노래가 절로 나온다. 

요걸로 속 든든히 채우고 

씩씩하게 걸어갈 아이들을 생각하니 

나의 하루도 힘이 솟는다. 






그렇게 식탁에 앉아 윤윤이들이 아침밥을 먹을 동안 

나는 이불을 개고 환기를 시키고 

오가며 필요한 걸 챙기고 

윤윤이들 하는 말에 맞장구를 치고 

틈틈이 시계를 보면서 

얼른 고기는 다 먹고 가라며 재촉을 해댄다. 


그렇게 잠시 식탁 옆에 섰을 때 

솔이가 말을 꺼냈다. 

그때 그 남자애들 생각할수록 너무 화가 난다고. 


얼마 전 급식실에서 있었던 일이다. 

창문 모퉁이 거미줄에 몇몇 아이들이 모였단다. 

대부분 남자아이들이고 

여자는 솔이 혼자. 

그렇지만 곤충이라면 솔이가 빠질 수 없기에

솔이도 다가가서 거미줄에 거미를 보고 있는데 

남자애들 몇 명이 솔이 보고 

저리 가라고 

마치 자기들이 쳐 놓은 거미줄에 걸린 거미마냥

솔이를 구경꾼 취급했단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 아니, 이 여자애가! ' 





그 말을 듣고 온 날 

솔이는 분하고 억울함을 식탁 앞에서 쏟아냈다.

자기 거미줄도 아니면서 

자기 거미도 아니면서 

이 여자애라니. 


나도 그랬다.

마치 이 가시내가 

또는 이 계집애가 처럼 들리는 건 

엄마라서일까?


어디 말을 해도 

그런 말을 하지 

그때도 솔이의 원통함을 

고스란히 드러내 솔이를 위로했던 기억이 난다. 


근데 그때 일이 오늘 아침

소고기를 먹으며 다시 떠올랐는지 

그날과 똑같이 소고기를 씹으며

얼마나 기분이 나빴는지를 말한다. 






그래그래, 오구오구 

그런데 그건 그 남자아이들의 잘못만은 

아니라고 덧붙였다. 

선사시대 즉 원시인 시대 때

사냥을 주로 남자가 하면서부터 

그리고 긴 세월의 역사 속에서 

남자들이 더 중요하게 여겨졌던 시간이 길었다고 말했다. 

그래서 옳진 않지만 

여자들이 약하고 작은 존재로 여겨지고

하찮게 불리는 경우가 많았는데 

그런 나쁜 흔적들 때문에 아직까지도 

그렇게 여자를 얕잡아 보는 사람들이 있다고. 


그리고 또 그런 말을 들으면 

엄마말을 한 번 떠올리고 

두 눈을 똑바로 보면서 

맞받아 치라고 말했다. 


왜! 이 멍청한 남자애야 






이 말을 하곤 너무 전지적 엄마시점

너무 굽은 팔 시점

너무 딸 가진 부모 시점이라는 생각에 

화들짝 놀라긴 했지만 

'멍청한'이라는 형용사는 내 진심이라는 걸 깨달았다. 


그냥 속상한 말을 듣고 속상해만 하지 말았으면

하는 마음에 

멍청한 남자애야! 이 말을 

몇 번이나 되풀이했다. 

그런 나를 보고 소고기에 밥을 먹던

윤솔이와 윤성이는 깔깔깔 웃어댔지만 

나는 머쓱해서 뒤돌아 이불 개러 안방으로 

가면서도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래도 거기서 그만두지 못하고 

이 빙구 같은 남자애는 어떠냐고 덧붙이기도 했다. 


화끈 거리는 얼굴 뒤로 

깔깔거리던 솔이가 

나는 엄마의 그런 말에 위로가 돼 

라며 내 얼굴의 화끈거림을 식혀주었지만 

그래서 다행히 웃으면서 아침을 마무리했지만 





오늘 수영을 마치고 샤워를 하는데 

습기 찬 거울을 닦으며 

언젠가 선명하진 않지만 

살아오면서 겪었던 '여자애'의 자리

그 자리들의 무력함이 떠올라 

아랫입술을 깨물게 된다. 

간절함이 남는다. 


...



오늘 아침의 생생한 윤솔이의 웃음소리를 기억하며

오늘을 기록한다. 


[ 그릇을 채우고 흘러넘치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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