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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결락 Jan 11. 2021

백년 동안의 고독

서평

백년 동안의 고독

-모든 기억은 고독하다.




작가소개: 콜롬비아의 위대한 작가, 마르케스는 ‘가보(GABO)'라는 애칭으로 불리며 수많은 독자들에게 사랑을 받았다. 자국의 독재를 비판하는 기사를 쓰며 망명생활을 하던 기자시절, 가족들과 멕시코, 아카풀코 해변으로 여행을 떠난 마르케스는 그곳에서 오랫동안 구상했던 소설의 첫 문장을 떠올리고 강력한 영감을 받아 여행을 포기하고 곧바로 자신의 스튜디오로 돌아와 “집”을 제목으로 하는 소설을 18개월에 거쳐 집필한다. 그 작품이 바로 마술적 판타지를 사실적으로 묘사하여 일가족의 서사를 그려낸 백년 동안의 고독이다.


이 작품은 에스파냐어로 쓰인 작품 중 역사상 가장 많이 팔린 책이 되었고 1982년에 노벨문학상을 수상한다. 그의 작품은 라틴아메리카 사람들의 삶과 현실에 대한 풍자를 ‘매직 리얼리즘’이라는 기법을 사용하여 서사에도 현실적 비극이 녹아들어 갈 수 있다는 것을 풍부한 사유와 유년의 체험을 통해 쓸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상상력의 범주를 실제의 영역으로 만들어 버리는 작가 역량은 이후에도 많은 작가들에게 ‘매직 리얼리즘(마술적 사실주의)’의 모티브로 작용하여 현대소설에도 많은 영향을 끼쳤다. 2014년, 4월, ‘고독의 연금술사’ 마르케스는  지상의 모든 것과 안녕하였다.



 책소개: 떼어 놓을 수 없는 고독이 백년 동안이나 지속된다는 것은 이해의 한계를 벗어난다. 사실 백년도 넘는다. 제목에서부터 이 작품은 인간이라는 존재의 과장된 양상을 보여줄 것이라고 선언한다. 마르케스가 열여덟 살에 “집”이라는 소설을 쓰기 시작했을 때만 하더라도 그 기본적인 재료는 존재하지도 않았다. “집”은 단순하였고 서사만 있었고 추억만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마르케스의 “집”은 전설적인 요소들로 무장되기 시작했다.


빛바래고 잊힌 현실은 강력하고 풍부하며 생동하는 판타지의 옷을 입고 상상과 역사가 버무려진 추억의 시간으로 대체된다. 또한 ‘가늠할 수 없는 불행’을 예고하는 제목은 일가족이 대대손손 고독 속에 살 운명에 처해 있다는 것을 나타내기에 끔찍하기 그지없다. 슬픔을 이기는 힘은 고독이 아니었다. 또한  번식과 문명, 투쟁, 교류가 아니었다. 슬픔에 승리하는 법은 사라짐(죽음) 뿐이었음을 작품을 읽게 되면 어렴풋이 알 수 있다. 그러나 혼백으로 살아남은 인물들이 ‘부엔디아 가문’의 문틀을 넘나드는 소설적 상황은 죽음도 슬픔 앞에 무색해질 뿐이다. 마르케스는 인간 존재의 조건 중 하나인 고독을 이해하고 있었다.

소설은 가상의 마을 ‘마콘도’를 창시한 부엔디아 가족의 이야기를 다룬다. ‘마콘도’는 마르케스의 어린 시절에 실제했던 바나나 농장의 이름이다. 마르케스는 꼭꼭 숨겨져 있던 기억을 떠올리며 콜롬비아 민중들이 겪었던 대규모 학살을 그려냈다. 학살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호세 아르카디오 부엔디아’의 고손자 ‘호세 아르카디오 세군도’는 연금술의 골방에서 한 말은 “3000명도 더 되었을 거야.”이다. 역사에 기록되지 않았던 비참한 민중의 역사가 작품 속 마을 ‘마콘도’를 통해 드러나는 순간, 백년의 이야기가 허구가 아님을 보여준다.

콜롬비아에서는 현실이 이야기를 능가한다. 일상은 믿을 수 없는 이야기들로 넘쳐나고 사람들은 이러한 사건들을 받아들이려 애를 쓴다. 이러한 현상은 라틴아메리카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세계 도처에서 일어나고 있는지도 모른다. 삶 자체가 역사가 되고 믿기 힘든 놀라운 일들이 연속되는 일련의 시간들, 이것이 마르케스의 작품의 무대이다. 문학비평가와 출판계는 이와 같은 작가의 문학세계에 이름을 붙였는데, 바로 ‘마술적 사실주의’이다.

마술적 시실주의? 이는 20세기 중반에 나타난 예술 및 문학 장르로 6, 70 년대에 장르로써의 힘이 견고 해지며 라틴아메리카 문학의 특징적인 요소로 나타났다. 그 특징은 일상 환상적이고 초자연주의적인 것처럼 보여주는 것이다. 이상한 게 이상하지 않았다. 가족 중에 누가 죽고 다음날에 멀쩡하게 살아나 같이 아침밥을 먹어도 일상이 되었다. 오히려 일어날 만한 일이 일어난 것이 되었다. 시간에 대한 개념도 일그러져 현실이 소멸되는 위기에 처해도 사람들은 과거, 아주 먼 과거를 바라보며 산다. 마르케스에게, 또는 라틴아메리카 민중에게는 시간은 앞으로 직진하는 직선이 아니라 돌고 도는 원형이며 그 어디에서도 시간은 사라지지 않고 재 반복되어 굴러간다는 개념이었다. 현실과 환상은 조화로운 형태로 공존한다. 「백년 동안의 고독」은 마술적 사실주의의 최고봉이다. 미녀 레메디오스는 어느 평범한 날에 정원의 담요를 타고 공중부양을 한다.


“이 무렵에 거의 장님이 다 되다시피 한 우르술라만이 그 신기한 바람이 왜 불어오는지 이해할 만큼 침착했으며, 그래서 광선이 이끄는 대로 담요가 날려가도록 손을 놓았고, 미녀 레메디오스는 자기를 떠받치고 공중으로 떠올라서 날개를 치는 담요의 한 복판에서 손을 흔들며 작별을 고하고, 풍뎅이와 다알리아가 있는 정원을 뒤로하고 오후 4시의 하늘을 날아올라서, 아무리 높이 나는 새도 쫓아가지 못할 만큼 높은 창공으로 영원히 사라졌다.”


이렇게나 평범한 오후 4시의 풍경이 어디에 있을까? 헷갈리면 안 된다. 무슨 인지 의미를 헤아리거나, 미녀 레메디오스의 정체가 무엇인지 궁금해하지 말아야 한다. 상상력은 너무 사실적이어서 ‘가령’이라던가 ‘어떻게’라는 단어들을 써가의심하는 순간, 작품 속 고독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다는 증거가 다. 작품 속 묘사대로 미녀 레메디오스는 마을 사람들이 생각하는 대로 여왕벌이 되었거나 부엔디아 가문의 며느리 르난다처럼 승천한 것이라고 믿어줄 테니 그녀가 타고 날아간 담요나 돌려달라고 기도를 하는 것이 작품을 대하는 독자현실적인 태도다. 작품의 첫 문장,


“몇 년이 지나 총살을 당하게 된 순간, 아우렐리아노 부엔디아 대령은 오래전 어느 오후에 아버지를 따라 얼음을 찾아 나섰던 일이 생각났다.”


부엔디아 가문의 마지막 운명을 달고 태어난 아이의 고조할아버지 아우렐리아노 부엔디아 대령의 회상으로 시작되는 오래된 이야기가 사형대에 실하는 순간, 개인이 가진 삶과 가문의 삶이 융합되어 시간은 엉클어지고 굴러가고 증한다.


소설 「백년 동안의 고독」에 찍힌 무수하고 어지러운 발자국들이 향하는 방향은 한 군데를 가리다. 대물림의 몰락, 즉 미래라고 불리는 다가올 시간들이 우리에게 줄 수 있는 것은 폐허가 되어버린 집 앞마당과 처마 어깨 죽지에서 어쩌다 깨어나는 입술을 어벙하게 벌리고 배회하는 담요 같은 유령들의 혼백도 언젠가는 사라진다는 것이다. 고독이 ‘돼지 꼬리 달린 아이’로 대물림되는 최후는 희비극이며 장엄하기까지 하다.


“역사의 시초는 나무와 연결되어 있고, 종말은 개미들에게 먹힐지니라.” -멜키아데스


소감:  서점에서 책을  이유는 제목이었다. 대체 어떤 글이기에 이렇게나 멋지고 낭만적인 제목을 달아 놓았을까? 백년 동안의 고독”


막상 책을 읽기 시작했을 때 내용을 종잡을 수도 없거니와 반복되는 주인공들의 이름도 외우기가 버거워 사건이 일어날 때마다 이 사람은 누구? 어디서 보았더라? 하며 얼마쯤 읽다가 책의 처음으로 돌아가 가계도를 자꾸 들여다보게 되는 것이다. 끝내 읽어도 생경한 라틴아메리카 쪽의 정서들이 내 정서와는 전혀 맞지 않아 제목만 그럴싸한 소설이라고 소감이랄 것도 없이 간단히 책을 덮고 말았다. 삼십여 년 전이었다. 그러다가 제목에 이끌려 읽고 읽고, 고독이라는 단어만 나오면 소설이 떠올라 손가락을 접어 볼 만큼 읽게 되었다. 읽을 때마다 부엔디아 가문비극은 내 몸에 체되어 불면증에 걸린 듯 “하루 동안의 고독”에 휩싸여 버리게 된다.


“몇 년이 지나 총살을 당하게 된 순간, 아우렐리아노 부엔디아 대령은 오래전 어느 오후에 아버지를 따라 얼음을 찾아 나섰던 일이 생각났다.”는 소설의 첫 문장가끔 떠올린다. 사형수의 마지막 회상이라는 설정이 자못 극적이지만, 나 같아도 이 상황이 되면 아버지가 내 손목에 직접 매어주던 시계가 떠오를 것 같으니 말이다. 요즘 들어 손목이 허전하다. 산전수전을 다 겪은 백전노장 사형수의 심정도 납득이 가고, 나름 반평생을 버티다가 마지막이 되었을 때 딱 떠오르는 기억이 아버지의 뭉툭한 손에 들린 은색  카시오 시계 정도는 되어야 나름 살았다는 나만의 내공이라고 여겨진다.


죽은 유령 ‘집시 멜키아데스’와 살아있는 유령 ‘우르술라’의 영혼들이 밤낮없이 배회하는 부엔디아 가문의 문턱에는 많은 고독들이 넘어지고 다치고 죽어갔다. 누구는 전쟁터에서 누구는 나무에 묶인 채로, 누구는 골방의 양피지에 엎드려 잠든 채로 죽어나고, 사랑의 열병에 걸려 죽음도 불사하는 가냘픈 고독들이 책의 전반에 나타난다.

레메디오스와 미녀 레메디오스의 죽음과 승천은 어이없지만 막상 마지막 모습들이라는 것이 당사자에게는 아무 의미 없듯이 결국 사라진 자들의 의미 남겨진 자들이 숙명처럼 가지고 살아야 할 그림자다. 빛이 있는 곳마다 따라다니는 기억들과 운명의 유전자들은, 빛이 사라진 어둠 속에서는 그림자 아닌 유령이라는 실재가 되어 우리와 맞닥뜨리게 된다. 마지막 후손, 아우렐리아노의 아버지, 마우리치오 바빌로니아를 늘 따라다니던 나비 무리 사랑에 열광하게 되는 매개체가 되었다. 그러나 언제나 돌변하는 것이 행운의 상징물이 아니던가. 결국 그 나비 무리는 부엔디아 가문의 종말을 재촉하는 불행의 상징이 되어버렸다.


낮과 밤이 뒤엉키고 사람과 유령이 뒤엉키고 환상과 현실이 뒤엉킨 채 굴러가는 낙원 ‘마콘도외부세계의 역사와 뒤엉키고 몰락하고 만다. 옳든 그르든 문명은 발전하고 의도치 않 침략을 가하고, 의도치 않 지배를 당한다. 마콘도는 생물이다. 부엔디아 가문의 흥망성쇠는 마콘도의 흥망성쇠와 결이 같다.


문명이 유입되자 마을에 불면증이 퍼진다. 잠들지 않는 마을에는 노동이 넘친다. 피로하여도 잠들지 못하는 육체, 영혼의 두 눈이 나비 날갯짓을 따라 몽상을 날아다니던 마을에 불면증이 끝나고 잠이 들던 때를  끝으로 소설이 끝났다면 부엔디아 가문의 비극은 되풀이되지 않았다. 돌고 도는 시간의 원형을 따라 가죽 정조대를 꽉 엉겨 매고 남편을 거부하던 우르술라의 고집은 생에 휘둘리지 않겠다는 당찬 여인의 포부였다. 하지만 여인 못지 않은 남편의 고집 또한 우르슬라의 포부와 같았다.  비극은 잉태된다. 운명은 삶의 한가운데에 우리 정지시켜 놓을 뿐, 직진의 시간에도 원형의 시간에도 나는 살아남지 못한다는 이유만 분명해진다.


삶은 비극이다. 비극속에 희극이 섞여 있을 뿐, 행복한 결말은 종말의 당사자에게 남겨지지 않는다. 이것이 삶이 비극인 이유이다. 고독을 끝내는 기회가 죽음이라면, 죽음을 이길 수 있는 기회도 고독이 된다. 이런 역설적인 이유가 공존하는 ‘마콘도’에서 사람들이 사라졌다. 육체를 가진 동물도 사라졌다. 육체는 죽음의 상징이며 죽음은 고독의 끝이다. 고독에 관계없이 그나마 버텨주는 것은 부엔디아 가문의 집터에  무수히 번성하는 식물의 가지들이다. 고독이 감추어진 마을의 식물들은 언제나 무성하다.


사람들의 뒤태가 허전한 이유는 꼬리 없이 태어났기 때문이다. 고독해질 수 없는 시대, 마콘도는 돼지 꼬리 걱정 없이 유일하게 고독을 향유할 수 있게 현재에 만들어 준 마르케스의 선물이다.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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