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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r text May 31. 2021

내 마음도 나잇살을 먹어서

에세이

 얼마 전부터 하루 중 꽤 많은 시간을 걷는 데 쓰고 있다. 회사에서 주최하는 걷기 챌린지에 참여하게 된 아내 덕분이다. 아내가 걷는 김에 함께 걷기로 한 건데, 며칠이나 걸었다고 부쩍 몸이 무거워진 몸이 조금은 가벼워진 것 같은 착각이 들기도 했다. 운동을 하게 된 것도 좋지만 함께 걷는 아내와도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게 된 것도 좋은 점 중 하나였다. 오늘 저녁은 뭐 먹을까? 요즘 하고 있는 일은 어때? 올해 휴가는 어떻게 할까? 그리고 요즘 하고 있는 생각 같은 것들. 


 어떨 때 행복을 느껴?라고 묻자 잠시 고민하던 아내는 '작은 것이라도 무언가 해냈을 때'라고 답했다. 그리고 하우 아 유?라고 물으면 자연스레 따라 나오는 아임 파인 땡큐, 앤 쥬?처럼 내게 되물었다. 나는 어떨 때 행복을 느끼냐고. 나는 쉬이 대답하지 못했다. 


 선명하진 않지만 어린날의 기억을 돌이켜 보면 나는 그리 텐션이 높거나 파이팅이 넘치는 스타일은 아니었다. 하자는 건 잘하고, 친구들과도 재미있게 어울려 놀았지만 스스로 원하는 걸 찾고 해내는 것과는 거리가 먼 아이였달까. 반장선거에 나갔다가 낙선하면서 인생의 쓴맛을 너무 일찍 알아버렸는지도 모르고, 아니면 적극적이던 때도 있었지만 단순히 기억을 하지 못하는 것일지도 모를 일이다. 진실이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남아있는 기억에 따르면 나는 저런 어린이였다. 

 그렇다고 해서 세상사에 초탈해 아무런 관심도 흥미도 즐거움도 없던 것은 아니었다. 내게도 아이다운 순수함과 호기심, 열정이 있던 것은 분명했다.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설레어하고, 재미있어하고, 흥분하고 몰입했던 순간들이 있었으니까. 그것도 꽤나 많이, 그리고 자주. 

 어떨 때 행복을 느끼냐고? 나는 쉬이 대답하지 못했다. 그렇게 많았던 반짝이는 순간들, 그리고 그 순간을 반짝이게 만들어주던 것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슬프게도 기억나지 않거나 혹은 더 이상 반짝이지 않게 되어버렸다. 


 사람의 마음 상태를 '하늘을 날듯 기쁘다.' 거나 '천 길 땅속으로 푹 가라앉았다.' 같이 수직적인 그래프로 표현할 수 있다면 내 마음은 어디쯤에 있을까 생각해보곤 한다. 언젠가부터 내 마음은 - 못하는 건지 할 수는 있는데  자극이 부족한 건지 모르겠지만 - 지표면에 딱 붙어버려 그리 높이 떠오르지 못하게 된 것만 같다. 

 마음에도 나잇살이 붙어 무거워진 걸까. 분명 날쌔고 민첩하게 움직였던 때도 있었지만 이제는 나잇살이 붙어 내 한 몸 가누기 어려워진 것처럼 감정에도 나잇살이 붙어 쉬이 떠오르지 않고 묵직해진 것이다. 이 묵직해진 감정은 어지간한 일로는 날아오르지 않는다. 인간은 언제나 더 센 자극을 찾기 때문일까. 분명 재미있어했던 일도 재미가 덜해지고 흥미롭던 것들도 덜 흥미로워져서 지표면에 붙은 채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는다. 더 이상 반짝이지 않고 더 이상 날아오르지 않는다.  


 속사정을 모르는 이들은 이런 모습을 보고 언제나 침착하다거나 사소한 일에 일희일비하지 않는다고 말하기도 하지만, 그건 정말 모르시는 말씀이다. 일희(一喜)는 어렵지만 일비(一悲)는 참 쉬워서 땅 속으로 파고드는 것은 금방이기 때문이다. 예전에 칼에 손을 베어본 적이 있다고 해서 책장을 넘기다 벤 손이 아프지 않던가. 안 좋은 쪽의 자극은 크기나 정도를 가리지 않고 제대로 먹혀든다. 안 그래도 무거워진 감정에 하나 둘 무게가 붙으면서 땅 속으로 들어가고, 이렇게 들어가 있는 동안엔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지 않을 뿐이다. 나잇살이 붙어 무거워진 마음은 떠오르진 못하는데 가라앉는 건 참 잘한다. 


 그럼 나는 불행한가? 그렇지는 않다.

 하늘을 날듯한 기쁨을 느끼는 경우가 많지 않다고 해서 불행한 것은 아니니까. 행복과 불행의 문제가 아니라 무거워진 감정이 기준점에서 크게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뿐이다. 하늘을 날듯 기쁜 일이 많지 않은 점이 아쉽고, 그렇다 보니 재미있는 일이 좀처럼 없다고 느껴질 뿐이지 그게 불행한 것은 아니다. 물론 조금 더, 자주 행복하고 즐거우면 좋겠지. 아무래도 몸에 붙은 살만 뺄게 아니라 마음에 붙은 무게도 좀 덜어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쁠 때 더 기쁠 수 있도록, 슬플 땐 덜 슬플 수 있도록. 


 한참을 걷고 집에 돌아와 몸무게를 재보니 이게 웬걸, 조금이지만 정말 몸무게가 줄어 있었다. 희망 몸무게가 되려면 아직도 몰었지만 어제와 달라진 몸무게를 보고 있자니 기분이 좋아졌다. 특별하거나 대단한 일이 아니어도 조금 더 기분이 좋아질 수 있다면, 그게 행복해지는 방법이겠지? 일단은 내일도 열심히 걸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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