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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r text Jan 13. 2021

카페 담장 밖 트루먼

*코로나 이전의 일입니다.


 주말을 맞아 아내와 함께 서울 근교에 있는 카페에 간 적이 있다. 방송을 몇 번이나 탔고 SNS에서도 유명한 곳이어서 어느 정도 개발된 곳에 있을 줄 알았는데, 막상 가보니 구불구불한 시골길을 차로도 한참이나 들어가야 하는 곳에 있는 카페였다.

《전원일기》나 《대추나무 사랑 걸렸네》에서나 봤을 법한 마을 풍경 한편에 자리 잡은 카페는 무척 멋졌다. 본관과 별관 두 곳을 한옥풍으로 근사하게 지어 올렸고, 두 건물 사이에는 잔디와 꽃을 잔뜩 심어 넓은 마당을 꾸며 두었다. 이 마당에는 손님들이 앉을 수 있도록 테이블과 벤치도 이곳저곳에 놓여 있었는데, 덕분에 가족 손님들은 마당에서 뛰어노는 아이들의 모습을 보며 쉴 수 있었다. 

 무엇보다 좋았던 것은 지대가 주위보다 건물 1층 정도 높다는 점이었다. 카페 내부에 앉아 있으면 투명한 통유리 너머로, 마당 테이블에 앉아 있으면 제주도를 연상시키는 담장 너머로 주위의 고즈넉한 풍경이 한눈에 내려다 보였다. 이쯤 되니 이렇게 외딴곳에 있는 카페에 3개나 되는 주차장이 아침부터 가득 찰 정도로 사람들이 많이 찾아오는 이유를 알 것도 같았다. 


 우리가 카페에 도착했을 때 마침 야외에 좋은 자리가 있어 나는 자리를 맡고 있고 아내가 커피를 사 오기로 했다. 아내를 기다리며 담장 밖을 보고 있자니 절로 힐링이 되는 기분이었다. 넓게 펼쳐진 가을 하늘, 그 아래 진중히 자리 잡은 산줄기와 수확을 기다리며 누렇게 고개 숙인 벼까지. 중간중간 끼어있는 민가들이 아쉬웠지만 그래도 아침 일찍 움직이느라 귀찮았던 마음이 쏙 들어가는 풍경이었다.

 그렇게 한동안 담장 밖을 보고 있는데 민가 한 곳에서 사람이 나왔다. 거리가 좀 떨어져 집에서 나온 사람의 나이를 가늠하긴 어려웠지만 피부가 그을린 아주머니인 것은 알 수 있었다. 아주머니는 집 앞 텃밭에 쭈그려 앉아 들고 나온 호미로 열심히 무언가를 캐기 시작했다. 티브이에 나오는 연예인들이 어쩌다 한 번씩 농촌에 가서 호들갑을 떨며 하는 호미질이 아니라 정말 일상의 호미질을 보니 마음이 무척 평화로워졌다. 딱히 어려서 농사를 지으며 살았던 것도 아닌데 내게도 농촌에 대한 향수나 정취 같은 게 있는 걸까. 단순히 풍경만 있는 것도 좋지만 그 풍경 안에 살고 있는 사람의 일상을 보는 것도 또 다른 힐링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새삼 느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아주머니가 호미질을 멈추고 고개를 휙 들었다. 그리곤 내 시선을 느끼기라도 했는지 나를 정면으로 쳐다보았다. 찰나의 순간이지만, 그리고 거리도 꽤 있었지만 아주머니와 내 시선이 마주쳤다. 그리고 그녀의 시선을 받아내지 못한 나는 커닝을 하기 전 감독관을 훔쳐보다 걸린 사람처럼 급히 시선을 돌리고 말았다. 눈빛이 닿을 리 없는 거리였음에도 마치 코앞에서 얼굴을 맞대고 있던 기분이었다. 아무런 근거도 없이 혼자 느꼈을 뿐이지만, 그녀의 눈빛은 무언가에 대해 항의하고 있는 것 같았다. "뭘 봐?"라고.




 한 사람의 일상을 드라마니 영화니 하는 특정 장르로 명확히 구분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굳이 나누자면 그 아주머니가 호미질하는 모습은 내게 보기만 해도 힐링이 되는 관찰 예능 같은 것이었다. 

 관찰 예능이 대세가 되면서 다루는 소재나 등장인물, 촬영 방법 등에 많은 변화들이 있었다지만 본질은 여전히 '진정성'일 것이다. 방송에 나오는 저 사람의 행동이 얼마나 진실된가. 시청자가 느끼기에 진정성이 있으면 공감을 받고, 그렇지 않으면 작위적이라며 비난을 받는다. 자신의 모습을 꾸며 대중 앞에 서는 것이 직업인 연예인조차도 이런 잣대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사람들은 끊임없이 진정성이라는 말로 포장된 날것, 있는 그대로의 무언가를 원한다. 그래서 모든 관찰 예능은 필연적으로 《트루먼 쇼》를 추구하게 된다. 

 당사자인 트루먼의 의사를 고려하지 않는다는 반 인간적인 면을 제외하고 시스템적으로만 보자면 《트루먼 쇼》는 관찰 예능의 극단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밤하늘의 별자리까지도 인공적으로 만들어 둘 정도로 모든 상황을 철저하게 대비한 세트장과 인위적으로 트라우마를 심어줄 수 있을 정도로 완벽하게 통제된 등장인물. 쇼를 만들어 내는 입장에서 이보다 더 좋은 판은 없다.

 그러나 이처럼 철저하게 기획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트루먼 쇼》는 결국 트루먼이 씨 헤이븐을 탈출함으로써 실패하고 말았다. 영화는 트루먼이 탈출하고, 브라운관 너머에서 이 장면을 지켜보던 시청자들이 심드렁하게 티브이 채널을 돌리는 것으로 끝난다. 그 모습을 보던 관객인 우리는 세트 밖의 세상에 나간 트루먼이 어떻게 살게 될지 생각하며 극장을 빠져나올 것이다.


 그러면 《트루먼 쇼》의 기획자였던 크리스토프는 어떻게 되었을까. 《트루먼 쇼》라는 대형 프로그램의 기획자였지만 한편으로는 한 사람의 직장인일 크리스토프는 분명 각종 보고서를 써야 했을 것이다. 《트루먼 쇼》는 왜 실패하고 말았나, 다음 프로젝트에서는 어떻게 해야 같은 실패를 반복하지 않을 수 있는가. 소속되어 있던 방송국이 대기업에 가까울수록 보고서의 양은 많아지고 보고해야 할 곳도 많았겠지. 크리스토프는 보고서에서 이렇게 답했을지 모른다.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채 타인의 일상을 관음 하는 것에 사람들은 열광했습니다. 여기까지는 분명 성공입니다. 문제는 트루먼을 씨 헤이븐에 가두었다는 것입니다. 관찰 대상을 어딘가에 가둬두고 통제하는 것은 이번과 같은 문제를 또 야기할 수 있습니다. 관찰 대상을 어디에 가둬두는 것이 아니라 자유롭게 지내도록 두고, 관찰자들이 숨어 그들을 지켜보게 만들면 됩니다. 갇힌 세상 속의 관찰 대상은 탈출하고 싶어 하겠지만, 제 발로 숨어 들어간 관찰자가 제 모습을 드러내고 싶어 하지는 않을 테니까요."

 크리스토프의 말에 감명받은 회사는 그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하며 다음 프로젝트도 그에게 맡기기로 한다. 그리고 그는 마침내 서울 근교의 조용한 시골에 제주도를 연상시키는 돌담을 두른 카페를 만들게 된다...  


 아주머니의 시선을 피해 고개를 숙이고 있다 보니 별 생각이 다 들었다. 그리고 주차장에 세 개나 딸린, 안에서는 밖이 잘 보이지만 반대로는 그렇지 못하도록 지어진 이 카페가 전혀 다르게 느껴졌다. 이 카페 사장님이 크리스토프는 아니겠지만, 그런 의도로 만든 곳이 아니겠지만 결과적으로 이 카페를 찾은 손님들은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지 않는 관찰자가 되어 있었다. 그러고 보니 요즘 다큐멘터리는 동물들과 똑같이 생긴 스파이 봇을 이용해 촬영하던데 나중엔 사람들도 그렇게 되는 것 아닐까? 

 문득 이 곳이 새로운 씨 헤이븐이고 담장 밖의 아주머니가 트루먼이 된 것 같았다. 만약 저 자리에 있는 것이 아주머니가 아니라 나였다면? 나는 나의 일상이 누군가의 뷰가 되고 힐링이 되는 것을 참거나 이해할 수 있을까. 분명 트루먼처럼 "나중에 못 볼지도 모르니 미리 말해 두죠. 좋은 오후, 좋은 저녁, 좋은 밤 보내세요."라고 젠틀하게 인사해 주진 못할 것이다. 내가 사는 집을 보고 "저 집만 없으면 더 좋았을 텐데." 따위의 말을 하면 더더욱. 씨 헤이븐 속의 트루먼은 마침내 탈출해서 자유를 찾았다지만, 이미 자유로워 따로 벗어날 곳도 없는 담장 밖의 트루먼은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마침내 아내가 커피를 받아 들고 자리에 와 앉았다. 아내는 고개 숙인 채 몽상에 빠져있던 내게 말했다. 

"왜 그렇게 고개를 숙이고 있어. 뭐 죄 졌어? 하늘 봐 하늘."

 아내는 방금 전의 나처럼 가을의 정취에 행복해했고, 자연을 즐겼다. 그제야 나도 슬그머니 고개를 들었다. 아주머니는 어느새 집으로 들어가 텃밭에는 아무도 없었지만 가급적 그쪽은 바라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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