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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r text Oct 10. 2021

내가 다 맞춰줬잖아

틀림없이 다투게 되는 말

  지하철을 기다리다 우연히 옆에 있는 한쌍의 남녀가 말싸움하는 내용을 듣게 되었다. 처음에는 조근조근 이야기하는가 싶더니 한쪽에서 "그동안 내가 너한테 다 맞춰줬잖아!"라고 말한 이후로 목소리가 점점 높아지기 시작했다. 괜한 불똥이 튈까 싶어 이어폰을 끼고 자리를 옮겨 얼마나 더 싸웠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들의 다툼이 끝나는 데는 꽤 오랜 시간이 필요해 보였다. "내가 너에게 다 맞춰줬잖아!"라는 말의 위력은 실로 대단했다.


 가족, 연인, 친구, 동료.

 어떤 관계를 막론하고 듣는 이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드는 말이 있다. 상대의 말에 납득하는지의 여부와 관계없이 기분이 확 나빠지는 말. 높은 확률로 논쟁과 감정싸움을 부르는 말. 그 마성의 말은 바로 "내가 너한테 다 맞췄잖아."다.


 혼자 하는 일이 아니고서야 우리는 누구나 상대에게 자신을 조금씩 맞추기 마련이다. 그리고 사람은 누구나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하기 마련이므로 온전히 자기 뜻대로 한 일이 아니고서야 어느 정도씩은 상대에게 맞춰주었다고 생각하곤 한다. 한쪽이 압도적으로 강한 권위나 권한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아니고서야 더욱 그렇다. (사실 이런 관계에서는 '다 맞춰주었다'는 것이 당연한 일이므로 애초에 논쟁을 시작할 불씨조차 되지 못한다.) 그러므로 내가 상대에게, 상대가 나에게 맞췄다는 것은 사람 사이의 관계에 있어 지극히 당연하고 건강한 일이다. 때로 A의 의사가 B의 의사보다 강하게 반영될 수도 있겠지만 이 또한 서로가 서로에게 일정 부분 양보한 것이므로 서로 감사하고 감사받아야 할 일이다. 그렇지만 "내가 너에게 다 맞춰주었다."는 말이 어느 한쪽에서 나오기 시작하면 그들은 십중팔구 다투게 된다. 다투지 않더라도 정이 뚝 떨어지거나.


 다. All. 모두. 전부. 하나부터 열까지.

 반대말은 하나도. Nothing. 전혀. 그 무엇도.

 내가 너에게 다 맞춰주었다는 말은 모든 일을 다 네 뜻대로 하게 해 주었다는 것이고, 내 뜻대로 한 일은 하나도 없었다는 뜻이다. 그리고 이 말 뒤에는 '그런데 어떻게 나한테 이래?'라는 비난, 서운함이나 '그러니까 이번에는 온전히 내 뜻대로 하자.'는 의미가 숨겨져 있고는 한다. 이 말을 들은 듣는 이는 생각한다. 그간 해왔던 일들이 100% 다 내 뜻대로였다고? 내 마음대로 한 적은 없었는데? 나도 많이 맞추고 이해했는데 내가 왜 이런 소리를 들어야 하지? 너는 아무 잘못이 없고 왜 전부 내 탓이지? 아. 파국이다.


 "내가 너에게 다 맞췄다."는 말은 어째서 상대의 심기를 이리도 불편하게 하는 걸까. '맞췄다' 보다는 '다'때문일 것이다. "내가 너에게 다 맞췄어."라는 말은 사실 '내 마음대로 한 일은 하나도 없어.'라는 뜻이다. 이 말을 들은 사람은 높은 확률로 "네가 뭘 다 맞춰. 그리고 나도 너한테 많이 맞췄어."라고 말할 텐데, 이건 '나 역시 내 마음대로 한 적은 없으며 나에게 맞춰주었다는 그 순간도 딱히 내 뜻대로 된 것은 아니었다.'는 뜻이다. 이 '다'라는 말은, 이 말이 포함된 문장을 지극히 말하는이 중심적으로 만든다. 그래서 듣는 이는 이 말이 그렇게나 마음에 걸린다.


 논리적인 이들이라면 각 사안별로 누구의 뜻이 더 많이, 강하게 관철되었는가를 놓고 하나하나 따져가며 판결을 내릴지도 모른다. 그런데 A의 의사가 관철되었다고 해서 A의 뜻대로 한 일이 1, B의 뜻대로 한 일은 0이 되는 걸까? 우리가 사는 세상은 2진법의 규칙이 적용되는 곳이 아니므로 A가 하자는 대로 되었다고 해서 그것이 온전히 A의 뜻대로 되었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51:49였든 6:4였든 설령 10:0이라 할지라도  A가 하자는 대로 되기까지 한마디 서운함이나 불만, 마음이 불편할만한 갈등이 있었을 테니까. B가 싫어하니 원래 하려던 것을 조금 바꿔서 하기라도 했다면 (설령 바꿨다고 바꾼 것이 B의 마음에 들지 않았을 지라도) 온전히 A의 마음대로 했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이미 여기부터 '다' 마음대로 한 것은 아니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100과 0으로 딱 떨어지지 않는 세상에 살고 있는 만큼 어쩔 수 없이 일정 부분은 상대에게 양보하며 살아가야 한다. 때론 서로의 의견을 조율해나가며 만들어낸 결과물이 누구도 원하지 않은 형태가 될 수도 있지만 그럼에도 그것을 공동의 결과로 인식하고 함께 다듬어 나가야 한다. 우리가 함께 잘 살려면 그래야 할 것이다.


 내가 너에게 '다' 맞췄다는 말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있는 이런 공동의 선(善)을 깬다. 나는 모든 것을 양보했는데 너는 하지 않는다며 상대를 비난한다. 이런 자기중심적인 말은 그래서, 틀림없이, 여지없이 듣는 이를 불편하게 만든다. 이런 말은 다툼과 갈등을 키우는 기폭제가 된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입력하는 대로 출력되는 기계가 아니고서야 상대가 일말의 불만 없이 만족하도록 맞춰준다는 일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그래서 나도 누군가와 갈등이 있을 때 가급적 이 말만큼은 하지 않으려고 한다.


... 머리로는 그런데, 실천은 참 쉽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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