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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r text Feb 04. 2021

친구의 생일을 축하하는 방법

에세이

 스무 살. 이제 막 대학교에 입학한 신입생 시절의 일이다. 살고 있던 기숙사가 방학에 맞춰 공사를 한다고 해서 자취를 하던 사촌 형의 집에서 한동안 신세를 지게 되었다.

 처음 가본 형의 자취방에서 내 시선을 끈 것은 책상 위에 놓인 작은 탁상 달력이었다. 달력 곳곳에는 누군가의 이름들이 적혀있었다. 아무것도 적히지 않은 날이 있는가 하면 어떤 날에는 2~3명의 이름이 한 번에 적혀 있기도 했다. 형은 그것이 지인들의 생일이라고 했다. 고마운 사람들의 생일을 잊지 않고 축하해주기 위해 적어둔 것이라고. 두 살 밖에 차이 나지 않는 형이 무척이나 어른 같아 보였다. 나는 다음날 플래너를 사 와서 맨 앞에 있는 달력에 지인들의 생일을 적었다.     


 텅 비어 있는 달력에 사람들의 이름을 적던 때가 떠오른다. 페이스북이 알려주는 대로 1월부터 12월까지 늘어서 있는 빈칸에 사람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채워 넣던 순간. 생각했던 것보다 아는 사람이 많았지만 달력에 채우지 못한 칸은 훨씬 더 많았다. 그때 나는 결심했다. 언젠가 1년 365일 모든 칸을 지인들의 이름으로 채우겠다고. 그리고 이름을 적어둔 사람들의 생일만큼은 꼭 챙기자고. 

 이 원대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한동안은 조금의 친분만 쌓여도 그들의 생일을 모두 플래너에 적었다. 생일이 언제인지 묻는 가벼운 질문에 답해주지 않는 이들은 거의 없었다. 생일을 물어볼 기회가 없었더라도 온갖 SNS가 알려주었기 때문에 언제가 생일인지 아는 것은 크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막상 그 사람의 생일이 다가오면 축하해 주기가 마땅치 않았다. 예전에 아주 잠깐 알고 지냈을 뿐인데 생일 축하까지 해줘야 하는 걸까. 연락도 안 하고 못 만난 지도 한참인데 이제 와서 갑자기? 어느 정도 이상 친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으면 선뜻 축하가 나오지 않았다. 파란색으로 적어둔 이름을 애써 무시하는 일이 늘어나고 그나마도 하나둘씩 지워졌다. 365개의 칸을 모두 채우겠다던 결심도 지워버렸다.      


 한번 적어둔 생일은 꼭 축하해 주자는 결심도 지키기 어려운 것은 마찬가지였다. 사실 나의 생일 축하는 무척 대수롭지 않아서 기껏해야 “생일 축하해! 잘 사냐?” 고 메시지를 보내는 것이 전부다. 남중, 남고, 공대, 군대, 공대. 남자들로만 가득한 로열 로드를 걸어온 탓에 친구들과 생일선물 같은 것은 주고받지 않은지 오래되었고, 딱히 친근하거나 상냥한 말투로 메시지를 보내지도 않는다. 축하 뒤에 함께 얹어 보낸 안부인사에 지인이 답해주면 그나마 대화가 좀 이어지지만 “고마워. 너도 잘 지내지?” 같은 답이 오면 대화는 십중팔구 두세 마디 안에 끝나고 만다. 생일을 핑계로 일 년에 한 번이라도 안부를 묻고 연락하면서 그 사람과의 인연을 이어가려는 얄팍한 속셈은 대화거리의 부재 앞에 바로 민낯을 드러내고 만다.

 그래서일까. 언제부턴가 함께 속해있는 단체 채팅방이 있는 사람의 생일이 오면 거기에 공지하는 것으로 축하를 대신하게 되었다. 개인적으로 축하 메시지를 보냈다가 대화가 너무 짧게 끝나버리면 서운하고 민망하니까. 한동안 아무 이야기가 없었던 대화방이라 할지라도 “A야 생일 축하해~”같은 메시지가 올라오면 - 나도 축하한다거나 조만간 만나서 술 한잔 하자거나 하는 식으로 - 최소한의 반응은 따라오기 마련이다. 이렇게 누군가 선창을 하면 다른 이들이 따라서 축하해 주고, 당사자는 고마워하면서 잠깐이지만 대화가 이어진다. 그러면 한결 불편한 마음이 덜했다. 다른 한편으로는 내가 자기의 생일을 잊지 않고 말해준 덕분에 모두에게 축하를 받는다고 생각해 주지 않을까 김칫국을 마셨던 것 같기도 하다.


 그런데 작년 즈음부터는 이런 식의 생일 축하가 과연 의미가 있나 생각하게 되었다. 가끔씩은 축하해주기 위해 축하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생일을 알리기만 할 뿐이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이런 식의 축하는 하지 않느니만 못한 것 같아 한동안 생일 알림을 하지 않았는데, 한 번은 다른 친구가 먼저 알리며 이렇게 말했다.

- 생일 봇 요즘은 일 안 해? 오늘 B 생일인데! B야 생일 축하해!

 좀스러운 나는 그의 말에 악의가 있었던 것은 아님을 알면서도 쉽게 흘려듣지 못했다. 왜 B의 생일은 알려주지 않냐는 질책인 걸까. 다른 친구들 생일은 먼저 알려줬으면서 내 생일만 얘기가 없다며 B가 내게 서운했을까. 단순히 B의 생일을 축하하면서 내 안부를 함께 물어본 것뿐인데 내가 너무 예민하게 받아들이는 걸까. 내가 나서지 않아도 서로의 생일을 축하하게 되었으니 거기에 만족해야 하나? 웃기고 있네. 설령 그렇다고 해도 어디 그게 과연 내 덕분인가? 그의 한 마디는 내가 그간 해왔던 매너리즘 가득한 생일 축하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게 해 주었다.      


 돌이켜 보면 친구의 생일을 어떻게 축하해 주어야 하는지는 어렸을 때 이미 다 배웠다. 어떤 선물을 주는지, 어떤 말로 어떻게 축하해 주는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축하하는 마음 자체가 중요한 것. 할 얘기가 많으면 많은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이미 답을 알고 있었지만 너무 멀리 돌아온 기분이다. 

 얼마 전에는 친한 동생의 생일이었다. 코로나 때문에 어디 가지도 못하고 그냥 낮잠이나 잘 계획이라던 그에게 나는 생일 선물로 치킨 쿠폰을 보내주었다.

- 생일인데 자고 일어나서 치킨 정도는 먹어줘야 되지 않겠냐. 생일 축하한다.

 동생은 이 형이 알고 보니 센스가 있는 사람이었다며 무척이나 고마워했다. 모처럼 해주고 기분 좋은 생일 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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