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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he reader Aug 03. 2023

그대 흘린 땀이 반짝반짝 빛나기를

치히로와 전태일이 꿈꿨던 세상은


시 보는 명작 ㅡ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돈의 가치에만 집중하는 사회에서는

인간마저 소모품으로 치부되기 쉽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은

가치의 기준을 ‘물질’에 두는 세상 속

상실되어 가는 인간성을 돌아보도록

우릴 채근한다.


영화는 타인에 대한 무관심과 탐욕으로

돼지가 돼버린 치히로의 부모를 통해

인간됨의 기본이 타인과의 관계 맺음에 있음을 암시한다.

서로의 이름과 얼굴을 기억한다는 것은

곧 관계 맺음의 상징이다.

관계 맺음을 포기한 인간의 삶은

얼마나 공허할 것인가


그러나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관계 맺음의 가치가

황금만능주의를 넘어서기 쉽지 않다.

사회에 성공적으로 안착하기 위해

개인의 이익에 몰두하는 건

생존을 위해 불가피하다.

관계 맺음조차 이익 창출을 위한 도구,

인맥관리로 치부되기도 한다.

관계에 지치고 상처받아

홀로 고립되기를 자처하는 인구가

급증하는 것도

관계 맺기의 고단함을 증명한다.



이 영화는 공존해야 할 존재인 인간이

홀로 살아갈 수 있는

단수적 존재로 착각되는 자본주의 세계를 극단적으로 표현한다.

또한

자본주의의 그런 한계를

치히로의 인간적 노력을 통해

넘어설 수 있음을 역설한다.


치히로의 순수성.

그것이 미쳐버린 세계를

정상으로 되돌릴 열쇠였던 것이다.


물론 현실에서는

 '순수'가 그리 힘을 발휘하지는 못한다.

기특하게도,

순수의 본능이 기다렸다는 듯 쑥 올라와

선순환을 부를 때가 있긴 하지만 말이다.

아흔아홉의 부정적인 뉴스 속

반짝이는 휴먼스토리 하나,

그것에 위로받은 다수가

의외의 화력을 발휘하는 경우처럼.


인간성의 회복을,

화해와 공존의 길을,

치히로는 최선을 다해 모색한다.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냉정한 현실 속에서도

우리가 마지막까지 움켜쥐고 있어야 할 가치임을

쾅쾅쾅~각인시키면서.

 


이쯤에서 나는 전태일을 생각한다.


노동자도 언제든 대체 가능한

공장 부품의 하나로 취급되는 구조 속에서

인간이 노동을 통해

보람을 느끼고

희망을 건설한다는 말은

현실과는 동떨어진

이론에 불과할는지 모른다.

더군다나 자본과 노동이

힘의 균형을 이루지 못한 속에서

약자인 노동자의 삶은

더욱 고단할 수밖에 없다.


전태일이 살던 시대는 말할 것도 없었다.

군사독재 속 암울했던 시절,

노동자들은 착취당하며 희생을 강요받는

소모품이었다.

당시의 노동자 계급은 자신들을 지켜줄

근로기준법의 존재조차 알지 못했다.

설사 알고 있어도

독재의 칼날 앞에,

국가경제성장이라는 대의 앞에,

쉽게 묵살되는 힘없는 가치일 뿐이었다.


전태일이 스스로를 태운 지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평범한 이들의 삶은 여전히 고단하다.

어쩌면 보다 지능적으로

불합리한 지배구조가 자리 잡아가고 있는 건지도 모를 일.


노동자야말로 생산의 주체이며 소비의 주체라고

어르고 달래지만

실상,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이익의 대부분은

자본가와 그들 곁에 기생하는 기득권에 돌아간다

돈이 돈을 부풀려내는 세상에서

점점 더 격차를 벌리고 단단해진다.

땅은 또 다른 땅을 생산해 내고

건물을 올리지만

평균치 사람들이 흘리는 땀의 대가는

기껏해야 하루 혹은 한 달의 삶을

지탱시켜 줄 뿐이다.


자본에 대항하는 노동운동마저

자본 없이 이어갈 수 없는 아이러니.

그럼에도 노동자 된 권리를 보호받으려면

스스로 조직된 힘을 키울 수밖에 없다.


“내 마음에 내린 뿌리가 아무리 강하다 하더라도

줄기 없는 뿌리가 얼마나 더 존재하겠는가”

라고 탄식했던 전태일의 고뇌처럼

단단한 조직 없이는 노동자의 삶이

제 권리를 지켜내기란 쉽지 않다.


정규직도 비정규직도 아닌

특수고용직, 이라는

괴상한 형태의 노동으로 밥을 먹는

20여 년 방송작가의 삶에서도

물렁한 작가 조직은 늘 아쉬움이었다.


“민주주의란 떼를 쓰고 악을 써서

  쟁취해야 하는 것”

이라 했던가?

노동자의 권리 찾기 또한

그렇게 답을 구해야 함을 모두가 안다.

하지만 실상은

절 싫으면 중이 떠나듯

수많은 '을'들이 포기하고 떠나며  

관계를 종료한다.

그것이 가장 깔끔하다는 핑계로.

그렇게 많은 선후배들의 뒷모습을 보아왔다.

나 또한 다르지 못했다.

내가 떠나온 자리는 신속하게 다른 누군가로

채워졌을 것이다.

누군가가 비워낸 자리에 내가 지금 서있듯이.


정상적 관계 맺음 속에서

노동이 보람이고 기쁨이 되는 일상은

얼마나 반짝반짝할 것인가

치히로도

전태일도

궁극적으론 같은 꿈을 향하고 있었다.


안타깝게도

그곳에 도달할 수 있다는 꿈은

이미 많은 이들이 백기를 든 허상이기도 하다.

그들이,

내가,

틀렸기를 바라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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