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치보는 일상과 혁명하는 인간

- 나는 왜 읽고쓰는가

by 여노

미디어 열심히 들여다보면, 개인은 낱낱이 조각나서 덩어리에 합쳐지고 모종의 '우리'나 '세대'만이 회자된다. 요즘 젊은이들은 어떠하고 늙은이들은 어떠하다는데, 오고가는 말에서 생동감 있는 목소리는 찾기가 어렵다. 하나 같이 '부자'를 열망하고 일상의 지루함을 견디거나 과열된 경쟁사회에서 이탈하여 "일하기를 거부한 채" 방에서 나오지를 않는다는데 정말로 그들이 '하나'였는지, 아니 지금도 '하나'인지 묻는 이가 없다.


그러니 일상에서 눈치를 본다. 산 사람의 목소리보다 더욱 생기 넘치는 묵직한 틀이 달려들어 겨우 숨이나마 잡고 있는 '나'를 '너희'에 밀어넣는다. '나'는 분명 어디에 사는 누구인지보다는, 어느 학교를 나와 어떤 스펙을 쌓은 피고용인지보다는, 시공간의 제약을 벗어난 상상 속 어딘가에서 자유롭게 활보하는 '나'일텐데 현시될 순간이 허락되지 않는다. 그래서 굶주림을 면케 하는 식별을 위해 묵중한 무게를 견디며 '나이'나 '성별' 따위를 명찰처럼 내걸고, 아니면 '학벌'이나 '점수' 와 같은 구분짓기에 동참하며 '우리'나 '세대'가 되어 밥벌이에 나선다. 내가 아무리 나는 "아이 같은 어른"이 아니고 "이기적인 어른"이 아니라고 해봤자 사회현상에 흡수된 개인은 울림을 줄 수 없다.


그래서 우리는 눈치를 본다. 나의 언행이 "MZ"이거나 그에서 벗어나는지 괜히 점검하고, "낭중지추"라고 너스레를 떨 자신이 없어 눈길에 포착되지 않으려고 그림자를 자처했다가, 정작 "아 어쩌라고 트위스트 추면서" 제 갈 길 간 사람이 돌팔매질에 넘어지는 꼴을 보곤 자신감의 문제가 아니라고. 분명 "사람은 저항하는 거다. 저항하는 것이 곧 인간이다. 저항할 줄 모르는 것은 사람이 아니다.(<저항인 함석헌 평전>, 20쪽)"의 구절을 읽고 울컥하는 감정을 부여잡는데.


저항하고 혁명하며 승기를 기약하기에는 10년 전에 문제라던 것이 지금도 문제이고, 20년 전에 문제라던 것도 여전히 문제이며, 지금 문제라는 것이 10년이고 20년이 지나도 또 문제일 것이란 생각에 또 다시 눈치를 본다. 산 사람의 생기를 앗아가고 무력감을 더하는 것이 지금 미디어의 행태이다.


희망을 말하는 사람들은 정신나간 동심을 안고 사는 사람이 되었고, 부를 탐하는 사람들은 열정이 넘치는 사람이 되었고, 세상의 부조리를 말하는 사람들은 불만 많은 사람이 되었고, 구조적 문제의 타개책을 간원하는 사람들은 욕심 넘치는 사람들이 되었다.


개인이 선택할 수 없는 것을 '선택'으로 분류하는 폭력에 대한 담론은 무수했고 여전히 명맥이 있는 듯도 한데, 맥박이 뛰는지까지는 알 길이 없다. 기껏해야 '알고리즘'의 위험을 말하며 '당신은 선택하는 주체가 아니다'라는 경고 정도가 나도는 듯 하지만 여전히 우리는 소비하며 살고 있다. 누군가는 노동하는 인간을 말했다는데, 누군가는 소비하는 인간을 말하고, 누군가는 스마트폰을 벗어나지 못하는 인간이 되었다고 지적하고, 누군가는 새로운 시대-새로운 인간이 필요하다며 사교육은 의미없다고까지 말하는데- 그 부르짖음을 "소비하지 말라"고 말하는 이는 없다. 여기서도 저기서도 떠들면서 "나를 소비하세요"라고 말하니, 개인의 모든 생산도 소비로 집약될 수밖에.


결국에는 눈치를 본다. 소비되지 않으면 살아남지 못하는 저주 같은 세상이라며 냉소와 호통을 오가면서도 눈치보며 소비되기를 기다린다. '너의 눈치를 보지 않는 나야말로 혁명하는 인간이다'라고 말하면서 조회수가 올라가길 기다리는 눈치보는 인간.


나도 눈치보는 인간이라 눈치보지 않을 공간에서 머무는 시간을 늘리기로 했다. 너도 보지 않고, 나도 너를 보지 않는 활동이 좀더 사람답게 일상을 굴리게끔 하는 것 같다. 그 방법은 고루하게도 독서다.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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