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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필 Sep 12. 2018

가난하면 착하기라도 해야지

도덕적 강요가 지배하는 사회

피자 배달 왔습니다(출처 : 연합뉴스)



피자 배달원은 말했다. OO 팰리스에 배달가서 느꼈던 충격을. 어린 아이들이 자기를 맞아주는데, 깍듯하고 몹시 예의가 발랐다. 흔히들 생각하는 부잣집 특유의 갑질은 거기에 없었다. 기대가 배반당한 흐뭇함만 그 자리에 남았다. 


어느 날은 근처에 있는 구O 마을에 들렀다. 역시나 아이들이 피자를 기다리고 있었다. 인사치레조차 없이 돈을 던지다시피하며 피자를 채갔다. 역시 기대가 배반당한 짜증이 그 공간에 들어앉았다.


'부자'의 '악'과, '가난'의 '선'이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보편적인 상식이 뒤집혀지는 순간 사람은 그 순간의 보편성을 개별성으로 치환하려 애쓴다. '어쩌다 그런 사람을 만난 거겠지' 같은 반응 말이다. 또한 특정한 직업군에서의 특정한 순간의 개별적 경험이 사회 전체의 보편성을 설명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에는 충분히 고민할 거리가 내재되어 있다.


클리셰. 틀에 박힌 말 또는 진부한 말. 달리 말하면 우리 모두가 익히 들어서 그 당위성에 대해 의심해본 적이 없는 사실이기도 하다. 가난은 선이고, 부자는 악이다. 가지지 못한 비주류의 한과 비분강개를 달래주고, 그들의 존재에 대한 가치를 부여해주었던 이 말. 이 명제에 따라 우리는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줄' 명분을 획득하였다. 물론 이 말이 현재 가지는 함의는 본질로부터 멀어졌다. 가난하기 때문에 돕는게 아니라, 가난하지만 도덕적이니까(착하기 때문에) 도와주자로 말이다. 


본론으로 돌아가보면 가난하면 착한가? 부자는 악한가? 가난 중에 선과 악은 충분히 배태되어있고, 부자 중에서도 선과 악은 개별적으로 충만하다. 선과 악은 인간의 모든 집단에서 골고루 분포되어 있다. 


설령 소득 하위10%와 상위 10%의 범죄율을 분석하여 과학적 통계가 나온다면 이 질문에 대한 답이 나오는가? 그래서 가난과 착함이 동의어가 아님이 밝혀진다면 우리는 어떻게 할 것인가? 물질적 부재와 도덕적 부재를 동시에 가진 이 집단을 백안시할 것인가? 또한 악하여 가난한 것이 아니라(이럴 경우 우리는 권선징악이라는 도덕적 희열을 느낄지도 모른다) 가난하여 악하게 되었다면 이들을 덮어놓고 매도할 수만은 없을 것이다. '곳간에서 인심난다'와 '항산(恒産)에서 항심(恒心)이 나온다'는 말에서 우리는 가난이 악으로 이어질 수 있음을 어렴풋이 알고 있다.  


머리 아픈 명제에서 고개를 돌려 [위험한 생각들](존 브록만 저) 책 속을 살펴보자. 여기서는 낯설거나 기존의 질서를 뒤흔들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사람들이 꺼려했던 새로운 진실들을 파고든다. 중요한 대목 하나 


예를 들어 인간은 평균적으로 서로 다르다는 주장이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차이점보다는 공통점이 더 많아서, 개인들을 차별하는 것은 비합리적이고 불공평하다. 마찬가지로 부모가 자녀의 인격 형성에 끼치는 영향이 전혀 없다고 해도, 그것에 근거해 자녀를 학대하거나 홀대하는 것은 명백히 인간의 존엄성을 해치는 행위로 잘못된 일이다. 


그렇다. 설령 가난한 사람이 악하다고 하더라도, 그것에 근거해 가난한 이를 학대하거나 매도하는 것은 명백히 가난한 이의 존엄성을 해치는 행위로 잘못된 일이다. 


[오리엔탈리즘]에서 '에드워드 사이드'가 서양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동양의 신비로운 이미지가 실재를 인식하는데는 오히려 방해가 된다고 역설했던 것처럼, 가진 것 없는 이들에 대해 우리가 덧씌운 도덕적 이미지는 그들을 오롯이 이해하는 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미지에 감춰진 본 모습이 드러났을 때, 그들의 이중성에 가일층 분노할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허나 그러한 기만적인 이미지를 가난한 이들이 직접 만든게 아니다.  


최근에 한 커뮤니티에 올라온 복지과 공무원의 글을 본 적이 있다. 독지가의 도움을 받아 저소득층에게 김치를 나눠주는데, 별별 진상짓을(퇴근시간이 지났는데 집까지 갖다달라고 한다든지) 겪으며 적개심을 표출하였다. 그의 말은 개인의 개별성으로는 합리적 표현이었겠으나, 사회의 전체성 차원에서는 위험한 생각이다. 김치를 나눠주면 고마워해야 한다는 논리는 인간관계의 당연한 예의지만, 고마워하지 않으면 김치를 줄 필요가 없다는 귀결은 이루어질 수 없다. 애시당초 고마움을 바라고 주는게 아니라, 가난하기 때문에 준 것이다. 이들에게 사양지심을 바란다는 건 궁극적으로 국가가 개인에게 은혜를 베푸는 시혜가 되는 것이다. 보편적 복지가 화두가 된 지금, 사람들의 의식은 아직도 쌍팔년도에 머물고 있다. 


신경림 시인은 '가난하다고 해서 사랑을 모르겠는가'라고 읊었다. 가난해도 사랑을 모를 수 있다. 아니, 가난해서 더 사랑을 모를 수도 있다. 우리는 가난한 그 또는 그녀에게 사랑을 강요할 게 아니다. 가난하여 사랑에 무지함을 이해해야 한다. 그게 그들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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