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민태형 Aug 18. 2022

뭘 하는지도 모르고

아파트 짓는 법 (2) 탈건축에 실패해 돌아온 탕아


  새벽에 부산에서 서울로 올라오는 KTX에서 입사지원서를 썼다. 부산국제영화제에 다녀오던 길이었다. 영화제는 닷새나 더 남아있었지만 다음날 입사 면접이 있기에 더 있을 수가 없었다. 사실 더 일찍 올라올 수 있었다. 아쉬워서 부산역 앞 봉구비어에서 친구들과 한참을 밍기적대다 간신히 몸을 실었다. 애초에 몇 개의 입사 지원 일정이 걸쳐 있었으니 무리한 여행이었다. (이후로 자의든 타의든 5년 동안 부산국제영화제를 찾을 수 없었다. 잘 다녀온 셈이다)

  학부 졸업을 앞두면서도 사실 나는 무엇을 할 지 잘 몰랐다. 그저 새내기 시절에 재난급으로 망쳐놨던 학점을 복구하기에 바빴고, 그래도 남들에게 꿀리지 않을 학점은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매 수업을 성실하게 들었다. 매일 숙취에 시달렸던 놈팡이들도 다들 각자의 방향으로 마지막 ‘코인’을 불태우던 분위기였다. 졸업설계 마감을 코앞에 두고 학교 강의실에서 밤늦게까지 작업을 하며 대한민국 18대 대통령 선거 개표방송을 틀어놓았다. 결과는 좌절스러웠지만, 나에겐 일단 이 지옥같은 철야 작업을 끝내는 것이 더 중요했다. (총선 때 두고보자!) 물론 이 결과가 훗날 나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 상상하지도 못했다.

  건축공학과 친구들이 학점에 열을 올렸던 이유는 ‘탈건축’을 위한 사전 준비였던 경우가 많았다. 당시 우리끼린 경제적으로나 삶의 질적인 측면으로나 건축에 남아 있어선 답이 없다고 여겼다. 돈이야 어느 정도 벌겠지만, 현장에서 뒹굴다 젊은 시절을 보내고 한 두 가지 지병을 달고 소모품처럼 살다가 삶의 의미를 잃어버릴 것 같았다. (그리고 이것은 정확히 나의 미래가 되었다) 그래도 규격화된 절차가 많이 완화되었던 시기였으니, 누군가는 법조계로, 행정으로, 의료계로, 금융계로, 혹은 외국으로 더 나은 미래를 준비했다. 다만 나는 탈건축을 다소 엉뚱한 방향으로 계획했다. 당시 나는 영화에 온갖 열정을 쏟고 있었다. 종로를 누비며 영화를 찾아보는 게 낙이었으며, 뒤늦게 미학과 수업을 병행하며 많은 것들을 알게 됐다. 독립영화잡지에 기고해 처음으로 내 글이 지면에 실리는 희열을 느꼈고, 다른 학교에서 학생 주도로 방학마다 개설되는 인문학 공동체에 나가 나와 비슷한 친구들을 만났다. 술에 취해 헬렐레 하면서 숱한 밤을 샜지만, 다음날 소위 ‘현타’가 오지 않았던 경험은 이때가 유일하다. 나는 배움이 더 필요하다 생각해 미학으로 대학원 진학을 꿈꿨다.

  엄마와 아빠는 그 기준은 모호하지만 ‘평범제일주의자’였다. 내가 최대한 안정적인 환경(그것은 회사)에서 일하기를 원했다. 엄마와 아빠가 직, 간적접으로 겪은 실패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을 것이다. 사람을 믿었다가 집안의 돈을 적잖이 까먹은 적이 한 번, 구조조정으로 잠시 직장을 잃은 적이 한 번 있었지만 어찌됐든 아빠는 존경할만한 성실함으로 한 회사를 떠나지 않고 일했고, 엄마는 살림살이를 철저하게 관리했다. 그 결과 그 어떤 금융투자나 부동산을 통한 불노소득 없이도 우리 가족은 중산층이 되었다. 이 사실은 알게 모르게 부모님의 자부심으로 남았다. 덕분에 나는 조금은 궁상맞을 지 언정 빚 없이 대학을 졸업할 수 있었다. 반면 통상적으로 여기는 ‘평범한 삶’의 범주에서 벗어난 주변 사람들은 실패를 끝내 극복하지 못하거나 스스로를 돌보는 것도 버거워했다. 그러니 서민의 삶을 가능하게 했던 조건 속에 다른 양태의 삶이 들어올 틈이란 없었다. ’그래서 도대체 뭐 해서 먹고 살게?’라는 질문에 나는 끝내 엄마, 아빠를 설득하는 데 실패했다. 결정적으로, 잠시 잊고 싶어 피씨방에서 밤을 새다가 새벽에 ’엄마 한번 살려주라’는 전화를 받고 나의 결정을 접었다. 걱정이 엄마의 건강을 갉아먹고 있었다.

  탈건축의 꿈이 물건너 갔으니, 다른 준비를 하지 못한 내가 갈 수 있는 곳은 건설업계였다. 그래도 졸업을 앞둔 당시 건설업계는 희망적이었다. 정확한 건설 경기를 복기한 것은 나중의 일이었으나 분명 각 건설사나 공공기관마다 펼친 채용 규모는 결코 작지 않았다. 나의 취미까지 접을 순 없기에 그렇게 극장을 드나들며, 지역 영화제를 돌며 취업을 준비했다. 동시에 면접을 보러 오라는 회사를 찾아 광화문, 목동, 강남, 판교 등지를 도는 강행군을 이어갔다. 그나마 가고 싶었던 회사의 2차 면접 전날에는 서울 신청사의 시공 과정을 담은 <말하는 건축 씨티:홀>을 보면서 현장의 로망을 한 사발 들이켰다. 정재은 감독의 의도는 그게 아니었겠지만, 그래도 저런 풍경이라면 해볼 만할 것 같았다. 그런데 그 영화를 조금 늦은 시간에 보기 시작했던 게 화근이었다.


“면접… 오는 길이세요…?”

  누가 들어도 막 잠에서 깬 목소리를 직접 들은 채용 담당자는 얼마나 기가 찼을까. 연신 ‘망했다’를 외쳤다. 그마나 파마를 해서 안 감아도 티가 안나는 머리에 물만 축이고, 택시에서 넥타이를 다섯 번이나 고쳐 매며 숨을 골랐다. 담당자가 혹시나 하여 일찍 연락을 준 것이 다행이었고, 이런 상황에 익숙한 택시 기사님을 만난 것은 행운이었다. 카메라만 쏙쏙 피해 도심을 질주한 끝에, 프레젠테이션 준비 시간의 절반을 까먹었지만 그래도 시간 내에 도착했다. 15분의 남은 시간 동안 준비해야 하는 발표 주제는 ‘박근혜 정부의 부동산 정책에 따른 전략’이었다. ‘알게 뭐람’.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었던 내용을 아무렇게나 갖다 붙이고, 최대한 희망적인 전략의 근거를 찾았다. 그래도 시험은 기세니까. 결론은 ‘호조가 예상되며 수주를 늘려야 합니다!’였는데, 라임이 괜찮다고 생각했을 뿐 이후에 어떤 말을 했는지는 물론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런데 이게 실제로 나의 미래가 될 줄 이때까지도 상상하지 못했다. 지금에서야 깨달았는데 말하는 대로 된 것이다.

  점심시간 전의 광화문은 믿을 수 없을 만큼 한산했다. 평소라면 좋았겠지만, 허탈함과 풀린 긴장감 속에 실성한 듯 헛웃음이 터져나왔다. 구두를 신은 발은 아프고, 등은 축축했다. 넥타이를 풀고, 담배에 불을 붙이고, 청계천 벤치에 뻗었다. 아, 그리고 근처엔 전날 다큐멘터리에서 봤던 서울시 청사가 있었다. ‘이제 뭐하지’. 30분 후 나는 광화문 씨네큐브에서 가와세 나오미의 신작을 봤다. 그해 칸 영화제 경쟁부문에 올랐던 영화는 물론 좋았다. 마치 그곳에서 직장생활을 하는 사람처럼 퇴근 인파에 껴서 집에 돌아왔다.

  보름 후에 그 회사로부터 합격 통보를 받았다. 조금은 어이가 없었지만 그 기간 동안 간절히 바라던 바였다. 두어 군데 최종 합격을 한 회사가 있긴 있었다. 그래도 이곳이 가고 싶었던 곳이었고, (혼자서) 이렇게 쇼를 하면서까지 붙었는데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한 달 후, 경기도 현장으로 발령을 받았다. 대학생 시절부터 이어온 8년 동안의 서울 생활이 한순간에 정리됐다. 지금까지도 서울엔 내 공간이 없다.

매거진의 이전글 별빛이 흐르는 다리를 건너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