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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ucy Lee Feb 17. 2017

철학의 두 가지 초상

김상환 "예술가를 위한 형이상학"으로부터

1. 어른이 되려는 철학[1]


    철학사에서 '어린이'라는 기표는 중립적으로 사용되지 않았다. 그것은 언제나 지극한 경멸 아니면 철저한 숭배의 대상이어 왔다. 한데 이 같은 격렬한 부딪힘 속에서 우리는 철학의 계보학적 흐름 내부에 자리한 베일을 발견하게 된다. 어떤 철학자가 '어린이'라는 말을 사용함으로써, 그에 대한 혐오를 내비치든, 혹은 기존 역사에 대한 전복을 예견하든 간에 그 같은 사건 자체는 철학자들의 존재―사유가 아닌 존재―가 파묻히는 심연·간극을 형성하고 있고, 거기에서 우리는 어떤 특정한 시대의 정신, 그리고 그 정신이 실패함으로써 그 이후의 정신을 예견하는 자엽을 발견하게 된다.


    우선 어린이가 경멸되었던 철학의 역사를 살펴보도록 하자. 그런데 이 역사는 지난 '계몽의 정신'과 연관되어 있다. 이는 칸트의 계몽에 대한 정의에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그에 따르면 "계몽이란 우리가 마땅히 스스로 책임져야 할 미성년 상태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다[2]. 미성년 상태란 다른 사람의 지도 없이는 자신의 지성을 사용할 수 없는 상태이다."[3] 김상환의 표현대로 우리는 이러한 계몽의 정의에서 로고스중심주의적인 무의식적 바닥을 발견할 수 있다. 이것은 인간의 본질에 대한 고전적인 정의와 연관된다. 왜냐하면 철학의 과제가 '뮈토스에서 로고스로'의 전회를 받아들인 후로 인간은 줄곧 로고스를 지닌 자로서, 그러한 로고스를, 곧 지성과 이성[4]을 잘 활용하는 자로서 본질주의적으로 정의되어 왔기 때문이다. 이는 우리의 일상적인 의식, 즉 '사유하는 동물'이라는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인간에 대한 정의에 동의하고 그러한 의미에서 스스로를 여타의 동물과 구별하는 의식에서도 드러나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BC384-322)는 인간을 '사유하는 동물'로 정의함으로써 철학을 '어른이 되려는 노력'으로 정식화하고, 이를 인간의 궁극적 행복과 결부시켰다..

    이러한 의미에서 철학자는 다른 누구보다도 '어른'인 자, 더 이상 어린이가 아닌 자, 즉 '이성을 가장 잘 활용하는 자'로 여겨졌다. 또 그렇기 때문에 철학자는 누구보다도 인간본질에 부합하고, 아리스토텔레스의 표현에 따르면 '신에 가장 부합하는 자', '신으로부터 사랑받는 자'였다[5]. 왜냐하면 우리가 만약 '신'이라는 기표가 어떤 충만하고 결여되지 않는 것을 지시하고자 할 때 사용된다는 점에 동의한다면, 계몽주의 역사에서 이성의 충만함은 곧 인간성이 충만하다는 것이고, 그러한 충만성의 개념은 앞에서의 신적인 충만성과 유비적인 관계에 들어가기 때문이다. 그런데 계몽주의에서처럼 어떤 것을 분석하고 범주화하고 통합시키는 능력으로서의 지성과 이성만이 충만함을 향하는 것이라면, 필연적으로 그러한 지성능력의 결여는, 그리고 그러한 상태를 표지하는 '나이의 결여'는 인간성의 결여로, 신성함의 결여로 추락하게 된다. 이러한 맥락 하에서 어린이로 표상되는 존재자는 결코 '인간적 행복'의 범위로 나아가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들에게서 어린이는 오직 결여된 것, 완전하지 않은 것으로만 표상되고, 그렇기에 "어린이는 인간적 행복을 누리기 위해서 먼저 어른이 되어야"(김상환, 105) 하는 것으로 얘기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 모두가 알고 있듯이, 모든 어른은 과거에 어린이였다. 철학사적 계몽주의의 시작을 알렸던 데카르트는 이러한 어린이의 정신이 이성을 참칭함으로써 인간을 오도할 것이라 경고했다. 한편 이러한 유아기적 미성숙함을 정의하는 데 있어서는 데카르트와 칸트가 다소간 차이를 보인다. 우선 "칸트는 인간이 머물러 있는 미성년의 상태가 지성의 결여에 있다기보다 의지의 결여 혹은 용기의 결여에서 비롯된다고 보았다."(107) 칸트에게서 인간은 초월적인 인식의 형식들을 갖춘 존재로 설명되지만, 개인적이거나 사회적으로 형성된 가상적 사유로의 이끌림은 개개인으로 하여금 인식의 비틀린 길을 걸어가도록 유도한다. 하지만 이러한 칸트의 전망은 다소 낙관적인 것으로 평가된다. 왜냐하면 그에게서 지성은 하나의 완전한 형식으로서 이미 주어진 것이고, 따라서 그 누구나 지성을 사용할 수 있는 가능성 위에 놓여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데카르트에게서 인간의 미성년 상태는 그가 이원화시킨 두 실체 간의 상호 예속에 필연적으로 묶여있다. 즉 "유아기적 미성숙은 신체적 존재자인 한에서 인간이 본성상 피할 수 없는 가상적 사유의 지배력을 말한다."(107-108) 그렇기 때문에 데카르트적인 방법적 회의는 그에게 있어서 보편적인 '성장' 과정에 포섭되고, 이러한 성장은 끊임없이 지속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주지하듯이 데카르트에게서 인간의 정신은 비록 실체화되어 있기는 하지만 "신체적 조건과 본능적 욕구에 완전히 복속되어 있는 정신"(108)이기 때문이다. 한편 이러한 의미에서 데카르트는 어른이 되려는 자들에게 양적 성질―측정가능한 수학적 성질―의 구성체로서 세계를 인식할 것을 요구한다. 이러한 인식론에서의 과학주의적 향도는 철학이 일찍이 이별하고자 했던 뮈토스적인 것들, 혹은 우리의 신체와 관련되는, 물질적이고 비사유적인 것들에 대한 혐오를 전제한다. 이 같은 어른의 역사는 철학사의 오랜 장을 형성해왔다. 여기서 "철학자는 아이의 죽음과 더불어 태어난다. 철학은 이성의 시간, 성년의 시대 안에서 펼쳐진다."(110)


2. 아이가 되려는 철학


    로고스로의 향도는 줄곧 철학의 대명사여 왔다. 철학의 주권 권력을 지니는 자들은 세계를 체계화의 역사 속으로, 즉 단일한 방식으로 규정지어진 개념체계와 가치체계 내부로 귀속시키려 했다. 이는 고대로부터 내려오는 파르메니데스적인 전통에 기인하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는 최초로 인간의 사유가능성을 개념적 규정가능성에 한계 지었기 때문이다. 물론 우리는 파르메니데스에게만 모든 책임을 전가할 수는 없다. 그의 선대에서부터 철학자들은 세계를 특정한 한계성―우리는 쉽게 물이라든지, 4원소라든지, 지성이라든지 하는 것들을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으로 붙잡으려 노력했으며, 어쩌면 이것은 인간의 본능 혹은 본성에 귀속되는 것일지도 모른다. 우리가 어떤 특정한 방식으로 소리지르고 손짓발짓하기 시작한 그 순간부터―정확히 표현하자면 그러한 행동양식을 규정하는 유전물질 혹은 누군가의 표현대로 밈(meme)과 같은 것이 집단적으로 다음 세대에 전해졌을 때부터―우리는 계속해서 '어른'이기를 꿈꿔왔을지도 모른다.

예수에게서 나타나는 로고스에의 배반, 즉 '어린아이'의 복권은 그 일반사 속에서 남근로고스중심주의를 구축해온 유대-기독교 자체와는 얼마간의 괴리를 보인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로고스중심주의로서의 철학, 어른이 되려는 철학에 대한 종언이 유행이 되고 있다. 거리에서는 이성의 죽음, 근대의 죽음, 체계화의 죽음, 철학의 죽음 등등, 그와 유사한 담론들이 들려온다. 그들은 이제 어른이 아닌 '아이'를 말한다. 어른이 체계화하고, 명명하고, 규정하는 자라면, 아이는 그 체계를 허물고, 이름을 떼어내며, 규정되어 있는 것에 물음표를 다는 자이다. 김상환은 이러한 아이-담론의 역사를 예수의 기도에서부터 써내려 간다. 일반적인 상식 하에서 어른의 높은 학식과 냉철함은 존경의 대상이 되며, 아이의 천진함은 어른의 이전 단계, 극복해야 할 단계, 체계성이 결핍된 단계로 생각된다. 하지만 예수는 "(…)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6]라고 하면서 어른―지혜롭고 슬기 있는, 즉 로고스를 지닌 자―이 아닌 어린아이가 신의 진리에 적합한 존재양태임을 선언한다. 그에게 있어서 "학식은 그들의 눈앞을 가로막는 장애일 뿐이고, 배움은 그들을 무지한 영혼으로 만들어놓았을 뿐이다."(112) 인간적인 체계화의 의지는 그것을 넘어선 신앙적 진리에는 도달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한편 이러한 예수적인 가치는 계몽주의 이후의 낭만주의로 이어진다. 데카르트나 칸트와 같은 계몽주의자들에게서 예수의 어린아이, 천진난만함, 카오스성, 불확정성, 비체계성, 비과학성 등은 단지 "청산해야 할 과거형의 정신 형태"[113]로 다루어진다. 왜냐하면 그들은 신앙에 있어서는 비판의 대상이 되어온 '스스로 생각하는 자', '자기규정적인 존재'(Beisichsein), '이성적인 자', 곧 '어른'을 이상적인 인간상으로 추구했기 때문이다. 데카르트는 자기의식의 코기토를 천명함으로써 인간의 사유를 신의 지속적인 주재로부터 떨어뜨렸고, 칸트는 그러한 사유의 틀을 초월론적인 방법론을 통해 형식화했다. 한편 칸트 이후의 낭만주의 사조는 이러한 계몽주의적 이념에 반기를 들고, 다시 어린이를 어른의 스승으로서 복권시킨다. 그들에 따르면 세계에 대한 어린아이적인 기술, 즉 예술적인 접근은 인간이 인위적인 방식으로 체계화한 세계 너머의 것을 우리 앞에 현시시킨다. 낭만주의가 드러내고자 하는 세계, 그것은 "논리적 모순과 무질서의 세계"이지만, 또 그렇기 때문에 "개념에 의하여 왜곡되거나 오독되기 이전의 원문(Urschrift)"[114]으로 생각된다.

니체는 '어린아이의 정신'을 인간 정신의 최종 단계로 묘사함으로써 '어른'에 대한 연쇄적인 종언에 시작점을 알렸다.

    물론 이러한 낭만주의적인 해체를 다시 봉합하려는 철학의 노력이 당대에는 헤겔에 의하여 수행되었다. 그는 정신사적 변증법 모델을 이용하여, 낭만주의의 어린아이적인 가상, 거짓, 혼란, 예술성이 변증법적 지양 과정을 통해 로고스적인 총체성으로 통합된다고 봄으로써 다시 철학의 흐름을 어른이 되려는 철학으로 정향시킨다. 그러나 그 다음 세대인 니체는 극적이게도 헤겔적인 정신사 모델을 이용해 어린아이의 정신, 특히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초인'(Übermensch)을 철학사의 내부로 끌어오게 된다. "헤겔의 변증법적 논리에서 가상―즉 어린아이적인 혼란―은 실재―즉 어른이 붙잡고자 하는 바―의 현상과 자기 전개에 필수적인 요소였다면, 니체의 형이상학에서 실재에의 의지는 상에의 의지가 드러나는 한 가지 (타락한) 형식에 불과하다. 어른이 되는 것은 아이가 존재하는 열등한 방식에 불과하다."(116) 니체의 표현대로 아이는, 그리고 초인은 "망각이고, 새로운 출발, 놀이, 스스로 도는 수레바퀴, 최초의 움직임이며, 성스러운 긍정"[7]이다. 그것은 이전 글에서 소개한 낙타의 정신에 단지 분노하고 저항하는 사자의 정신을 넘어서 있다. 아이의 정신을 가진 자는 모든 고정적 체계화를 부정하며, 그것의 죽음을, 그리고 새로운 삶을 긍정한다.


    우리는 왜 철학을 하는가? 이러한 질문에 맞닥뜨렸을 때 우리는 철학에 대한 정의로부터, 즉 규정지음으로부터 출발하려 하지만, 이제는 문제를 달리 볼 필요가 있다. 즉 우리 각자가 무언가 철학적이라고 할 만한 실천들을 할 때에 나와 세계에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를 주시할 수 있는지 자문해봐야 한다는 것이다. 로고스중심주의에 대한 반성적인 지양―그것이 오늘날에 과잉적으로 실천되는 데에는 우리가 그러한 로고스적인 실천에 있어서 어떤 폐단들을 목도해왔기 때문이다. 그것은 옆 사람의 표정들에서도 알 수 있는 것―바로 지난 철학사의 주인공이 우리 자신이 아니었다는 것, 즉 그것의 실천에 있어서 우리는 계속해서 낙타여 왔다는 점이다. 우리는 왜 철학을 하는가? 어쩌면 철학-함의 최종적인 국면은 가장 치명적인 반-철학적 실천에 있을지도 모른다. 그것은 모든 어른들에 대한 반항이며, 아이들의 천진함에 대한 씁쓸한 향수이고 흔적이다.



[1] 이 글의 두 부분은 본래 분리된 각각의 작업물이었으며, '김상환(1999), 예술가를 위한 형이상학, 민음사, pp.101-118'을 토대로 한다.

[2] 이러한 의미에서 성년의식은 단지 나이가 들었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우리는 그 행사에서 한 개별자가 어른이 되었음을 선포함으로써 그가 진정으로 '사유할 수 있음'을, 따라서 '진짜 인간'이 되었음을 확인한다. 지난 철학의 역사에서 한 명의 사상가가 철학사의 문턱을 두드리는 작업은 이러한 성년의식의 과정과 유사했다. 왜냐하면 그는 스스로 철학자가 되기 위하여 어린아이의 면모를 버리고 로고스적인 주체, 즉 어른이 되어야 했기 때문이다.

[3] I. Kant(1983), "Beantwortung der Frage; Was ist Aufklärung", Werke in 10 Bänden 제9권, Darmstadt: Wissenschaftliche Buchgesellschaft, p.53 - 김상환(1999), p.102에서 재인용.

[4] 여기서 자세히 다룰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칸트는 순수이성비판에서 인간인식의 초월적(transzendentale)―일각에서는 선험적이라 번역하는―조건들을 다룬다. 여기에는 초월적 감성형식으로서의 시공간과 순수지성개념들, 그리고 이성이 해당된다. 이때 감성(Sinnlichkeit)은 우리가 대상에 대한 감각적 직관을 형성하는 데 조건이 되고, 지성(Verstand)은 러한 감각적 직관들을 몇 가지 순수개념에 따라 개념화·일반화하는 조건이 되며, 이성(Verstand)은 이렇게 습득된 현상들을 학문적인 통일 또는 확장으로 이끌어가는 조건이 된다. 이 같은 지성과 이성의 의미를 참고하자면 그것들이 개별적인 경험을 일반화·체계화하는 데 기여한다는 것을, 그리고 그러한 능력에 대하여 우리가 보통은 '어른답다'라는 칭호를 붙인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5] Aristotle, The Nicomachean Ethics, 10권 7장 1178a, 원문대역판(1934) Aristotle in 23 Volumes 제19권, Cambridge, Massachusetts: Harvard University Press, p.627 - 김상환(1999), p.104에서 재인용.

[6] 마태복음 11장 25절.

[7] F. Nietzsche, 장회창 역(2004),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민음사, p.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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