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케니스트리 Dec 23. 2023

카탈-로그

카카오톡 탈퇴의 기록

※이 글은 연말 수많은 감사와 축하, 감동의 의미가 메시지로 오가는 카카오톡 메신저에 관한 이야기 합니다. 서비스 자체에 대한 비판이 아닌, 지극히 개인적인 이용 경험과 사용을 중단하기로 한 결정, 그리고 그로부터 달라진 일상을 이야기한 것으로 대중의 의견이나 경험과는 다소 다른 내용이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국민 소통 앱(app)이라 불릴 서비스는 명실상부 카카오톡일 것이다. 카카오톡은 약 10여 년 전 출시된 이후 빠르게 사용자가 늘었다. 처음 나왔을 땐 대중에게 소통의 신세계를 경험하게 했다. 아직 SMS가 유료이던 시절, 인터넷만 연결된다면 무료로 할 수 있는 대화로 무료함을 달래며 대중은 그 편리함을 누렸다. 그렇게 절대적인 시장이 형성되고, 거의 모든 플랫폼이 그렇듯 광고가 붙으며 사실상 유료 서비스가 되었다. 카카오톡은 현재까지 소통과 소비를 넘어 문화의 중심에 자리 잡으며 발전을 거듭하고 있다.


나는 그런 카카오톡을 탈퇴하고 앱을 삭제한 채 한 달 하고도 두어 주를 보냈다. 너무 고요했다. 습관적으로 휴대전화를 들었다가, 더 이상 지울 ‘안 읽은 메시지의 수'는 없다는 것을 깨닫고 내려놓기를 반복했을 뿐이다. 이내 그 또한 하지 않게 됐다. 일주일에 한 두 명, 한 달 새 여덟아홉 명의 지인에게서 문자나 전화로 걱정스러운 연락을 받았을 뿐이다.


연락을 해온 이들은 하나같이 ‘무슨 일 있는 건 아니냐'라고 물었다. 난 ‘계정에 문제가 있어서'라고 둘러댔다. 하지만 이제 더는 이상한 사람으로 비치지 않기 위한 그럴싸한 핑계를 에둘러 말하지 않기로 했다. 쿠팡을 탈퇴했던 것과 같이 그저 쉬기도 시간이 부족한 일상에 과해진 디지털 소통 피로도가 원인이었을까, 조금 더 거창하게 말하자면 난 애초에 플랫폼 기업의 독과점 전략에 편승할 생각도, 매몰되며 충성할 열정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탈퇴는 과한 표현인 듯싶다. 난 서비스를 잠시 이용하다가 그만뒀을 뿐이니 그저 ‘벗어남'이라 하는 게 맞는 표현일지도.



카카오톡 탈퇴 후 한 달


카카오톡을 쓰지 않게 된 이후 한 달 사이의 변화를 말하자면, 일단 매일 휴대폰을 들여다보는 시간이 상당히 줄어든 느낌이다. 습관적으로 카카오톡을 열고, 무수히 떠 있는 숫자를 지우느라 잘 참여하지도 않는 대화가 한창인 단톡방을 열었다가 닫기를 반복하고, 그러다가 눈에 띄는 언급이나 링크를 눌러보고, 그렇게 발견한 뉴스와 광고를 클릭해 원치 않았던 경험을 하기도 하고, 다시 정신을 차리고 카카오톡에 들어왔다가 우연히 친구의 생일을 발견하게 되고, 평소 대화를 주고받는 사이도 아니었지만 왠지 그냥 지나치면 안 될 것 같아 메시지와 선물을 하게 되고, 반 강제적으로 구독하게 된 부지런한 사람들이 공유하는 ‘좋은 글귀’를 읽고, 얼마 뒤면 사라질 아기나 고양이 사진을 보며 반응하는 시간이 스마트폰이 분석한 카카오톡의 스크린타임(app screen time - 하루 해당 앱을 이용하는 총 시간) 기준 하루 평균 40분에서 1시간 정도였다.


그리고 요즘엔 가까운 이들과 메시지와 전화로 주로 소통하며 잘 지내고 있다. 여럿과의 동시 대화는 구글 챗 기능을 활용한다. 식당이나 미용실 예약은 전화나 다른 포털 사이트의 기능을 이용하고, 업무상 소통은 이메일과 사내 메신저로 주로 한다. 연말 주요 지인들과의 안부는 카카오톡 메시지 복붙이 아닌 문자나 전화로 물을 예정이다. 이 모든 방법들이 불편하다고 느꼈으나, 지금은 적응하니 오히려 장점이 많다고 여겨진다. 그리고 더는, (연락처도 나누지 않은 이들로부터) 성의와 진정성이 결여된 청첩장을 받지 않게 되었다.


카카오톡을 탈퇴하며 폰도 초기화를 했다. 그간 쓰지도 않는데 설치되어 있던 온갖 앱(app)들도 이참에 정리했다. 앱은 하나씩 필요할 때마다 설치를 하고, 더는 쓰지도 않은데 설치되어 있던 앱들은 정말 필요할 때까지 잊기로 했다. 한동안 온라인 OTT 서비스도 폰에서 이용하지 않았다. 콘텐츠에 관한 건 오직 음악을 듣기 위한 앱이 전부였다. 그러다가 전자책과 유튜브는 설치를 했다. SNS도 인스타그램은 설치하며, 어디까지나 직업 유관이라 애써 합리화했다. 그러자 얻은 것은 절약된 스크린타임(screen time)만큼 늘어난 정신적 휴식 시간과, 연말 일정에 촘촘히 채워지던 송년회들 대신 전시회며 카페를 다니며 조금은 차분히 스스로를 돌아보거나 글을 쓰며 채울 달력 위 공백들이다.



생활이 될 이유


현시점에 내 주위에서 나 빼고 모두가 쓰는 카카오톡을 쓰지 않게 된 동기는 생각보다 단순하다. 쌓이고 겹쳐지며 이젠 모르는 이가 절반 이상인 휴대전화 주소록을 정리하고자 했고, 주소록을 들여다보다가 사실 진짜 적체는 카카오톡의 친구목록이란 생각이 들면서부터다. 카카오톡 친구목록은 대체로 연락처와 연동돼 자동으로 생성된다. 하지만 연락처를 지운다고 지워지진 않는다. 그러다 보니 휴대폰 주소록보다 더 많은 친구목록이 쌓이게 되고, 하나하나 들여다보면 모르는 이들 투성인 상태에 이르게 된 것이다. 어느 서비스의 영업사원, 이삿짐센터 기사아저씨, 부동산, 은행 직원, 보험 관리사, 자동차 딜러, 택배기사 아저씨 등등 … 이제는 불필요해진 ‘옛 친구'리스트를 카카오톡에서 지우려면 ‘숨김'처리 말고는 방법이 없는데, 그걸 하나 하나 하는 것도 꽤 번거로운 일이라 사실상 탈퇴 후 재가입 말고는 방법이 없었다.


‘그거 좀 놔두면 뭐가 어때서'라고 반문할 수 있겠지만, 내 프로필이 정체를 알 수 없는 이들에게 공개된다는 찝찝함이 첫 번째, 그리고 이제는 그 사람이 맞는지도 알 수 없는 연락처 당사자의 궁금하지 않은 사생활이 두 번째로 신경이 쓰이는 이유였다. 그래서 카카오톡은 일단 탈퇴를 하고, 새로 정리된 주소록에 맞게 친구 목록도 정리된 상태로 재 가입을 해볼 작정이었다. 그런데, 카카오톡의 자존심인지 아니면 탈퇴 자체를 주저하게 만들려는 의도인지는 몰라도, 탈퇴 후 1주일이라는 재가입 유예기간을 둔 것이 결과적으로 한 달 넘게 그로부터 벗어나 살게 된 날들의 시작이 되었다.


이 이야기를 들은 이들은 ‘그게 생활이 돼?’라며 놀라운 반응을 보였다. ‘응 생각보다 안 귀찮고 괜찮아'라고 말하면서도, 문득 그들이 이야기하는 ‘생활'이란 주제에 대해 고찰해 보게 되었다. 왜 카카오톡이 없으면 생활이 안 된다고 하지? 수많은 알림을 받지 못할 수도 있어서? 선물하기를 하지 못해서? 단톡방에 초대되지 못하고, 누군가의 생일, 결혼, 이직 소식을 접하지 못해서? 나의 카카오톡 탈퇴 소식을 들은 이들로부터의 ‘그게 생활이 돼’냐는 질문으로부터 이미 대다수의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카카오톡 = 생활 그 자체'라는 등식이 성립되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아마도 특정 서비스가 없으면 못 산다는 사람들의 인식은 그것의 편리함이 우리 삶의 많은 모습을 바꿔왔기 때문에 생겨났을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아주 일부라도, 유행 혹은 대세라는 거스르기 힘든 시류에 이미 우리가 내던져졌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러니 ‘카카오톡 탈퇴’라는 선택을 한 나는 누군가에겐 다소 고집스러운 이탈자이거나 까탈스러운 사회적 자가격리자로 보이기도 했을 것이다.



진정한 단절


지나치게 쉬운 방식의 연결이, 아니 관계 형성이 현대인들의 습관적 고독감의 원인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우리는 쉽고 간편한 이어짐의 혜택을 누리고 있지만 이는 쉬운 단절도 역시 가능함을 의미한다. 표면적이고 가벼운 관계가 우후죽순 생겨났다가 쉬이 증발해 사라져 가는 과정을 겪는 현대인들이 나는 결국 혼자고, 외롭고, 쓸쓸하고, 우울하다고 느끼게 되는 것은 유추 가능한 감정 시나리오다. 그리고 쉬운 단절은 외로움 말고도 더 은밀하고 장기적인 부작용을 낳기도 한다. 우리는 쉬운 연결로부터 얕은 인연에 집착하게 되고 정작 깊고 오랜 관계들에 소홀해진다. 만약 카카오톡이 사라진다면 표면적 관계들과는 금세 단절을 겪게 될 가능성이 지지만, 반대로 카카오톡이 없어도 연락이 가능한 사람들을 발견할 수 있다. 진정한 이어짐이란 그 수단의 편리함과 크게 관련이 없기 때문이다.


휴대폰을 들어 주소록을 검색해 문자 메시지를 보내거나, 통화 버튼을 눌러 전화한다는 등의 행위가 정말 불편한 일인지도 잘 모르겠다. 그게 불편하다고 느낄 정도면 도대체 우리는 어느 정도 수준의 편리함과 단순함을 바라며 살아가고 있는 것인가. 그게 어느 정도의 수준이었냐는 2022년 카카오톡의 서비스 장애 사건에서 알 수 있다.


그 이벤트는 뉴스에도 연일 소개 됐고, 카카오톡이 사죄하고, 국회에서는 대정부 질문에서 회사를 질책하는 희극이 벌어졌다. 언론이 ‘일상이 멈췄다'며 시끄럽게 아우성칠 동안 정작 난 장애가 거의 해결된 뒤에야 그런 일이 있었다는 것을 알았다. 그 사실을 들은 회사 동료는 내가 ‘너무 세상과 담쌓고 사는 것 아니냐'며 웃으며 이야기했다. 그 말이 맞을지 모른다. 하지만 왠지 세상과 단절된 것은 내가 아니라 카카오톡에 지나치게 의지한 나머지 그 세계에 갇혀 사는 사람들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했다. 진짜 단절은 편리함이 아닌 가능성의 단절이고, 그로부터 시작될 자유의 제한이고, 쉽게 떠오르지 않는 대안이 아닐까. 무언가에 매몰되면서 사고의 경직을 겪으며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부작용 들이다.


역사에 남을만한 카카오톡 장애 사건을 대하는 언론과 대중의 태도로부터 어쩌면 이 사회는 카카오톡이 메신저일 뿐이고, 언제든 떠날 수 있으며, 대중이 선택권을 가질 때 서비스는 더 겸손한 자세로 서비스 개선에 힘쓴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 그 서비스가 장애로 인해 중단되는 일이 당연히 ‘사과를 받고 보상받아야 할 일'이라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불필요한 일이다. 무한한 충성을 할수록 그들은 서비스 자체의 안정성보다는 수익구조 고도화에 더 힘쓸 것이다.


(연관 글: https://brunch.co.kr/@kenistry/255)


이번에 카카오톡을 떠나며 알게 된 것들이 있다. 카카오톡을 벗어나니 경쟁적으로 품질과 규모를 키워온 (우리가 잊고 있던) 다른 수많은 양질의 서비스가 많다는 것을. 이메일이나 영상 통화도 한 세기 전에는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편리한 소통 수단이라는 것을. 더는 부족해진 정성을 과대 포장으로 채우는 선물하기를 하지 않아도 되고, 불필요한 단체 소통의 장으로부터 잠시 멀어지니 원래 가까웠으나 그간 차일피일 연락을 미루며 소홀했던 이들에게 더 쏟을 시간적 마음적 여유가 생긴다는 것을. 더는 쉽게 사라질 관계에 집착하지 않아도 되고, 진짜 관계들을 잊은 채 외로워질까 전전긍긍하며 적극 카카오톡 친구그룹에 참여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 등을 말이다.


찐(眞)의 관계


기억에 들인 시간이 짧을수록 잊힘도 빠른 듯하다. 다른 말로 하자면, 초 연결 시대에는 끊음도 간단하다. 전기로 작동하는 모든 것들은 전원을 끊으면 꺼진다. 온라인 세계의 거의 모든 서비스가 그렇다.


카카오톡을 탈퇴하고 휴대폰 화면에서 앱을 지우는 데에는 1분도 걸리지 않았다. 카카오톡 탈퇴는 회사의 칼퇴보다 간단한 일일지 모른다. 어려웠던 건 주위 사람들로부터 양해를 구하는 일이었다. 카카오톡을 나오기 전 먼저 가족이 모인 톡방에 이를 알렸다. 계정에 문제가 생겨 잠시 나갔다 온다고 하며 걱정하지 마시라 했다. 그랬는데도 가족들은 걱정했던 모양이다. 무슨 힘든 일이 있는지, 혹 안 좋은 일에 연루된 것은 아닌지 와 같이. 이후 들른 부모님 집에서는 아버지에게 염려의 말씀을 듣기도 했다. 카카오톡을 쓰지 않는 것은 사회에서 왕따를 자처하는 거고, 사람들 불편하게 하는 거고, 사람들이 너를 더는 찾지 않게 될 거라고 하셨다. 그런 아버지께 물었다.


"그래도 어떻게든 연락이 닿는 사람들이 있다면요?"


“그런 사람들은 정말 찐이지”


아직 왕성히 사회적 관계를 맺으며 일을 하시는 아버지도 이미 알고 계셨다. 플랫폼이 없어도 진짜는 남고, 나머지 관계는 쉽게 사라질 수도 있다는 것을.


“괜찮아 오빠, 유재석도 카톡 안 쓴데"


사회에서의 신뢰문제, 주변 사람들의 불편함, 영원한 고립과 같은 마이너스 요소들을 나열하며 나무라듯 이야기를 이어가던 아버지와 이를 쉽사리 수긍하지 못하는 나와의 대화를 곁에서 듣던 여동생이 한 마디 거들었다. 그러고 보면, 세대에 따라 반응이 참 제각각이란 생각도 들었다. 가장 적극적이고 충실하게 카카오톡을 사용하며 그 기능적 이로움을 잔뜩 누리는 젊은 세대들은 오히려 카카오톡 탈퇴의 과단이 멋지다는 반응이었고, 나보다 세상을 더 경험한 어른들은 대체로 염려했다. 물론, 어른들의 이야기가 더 현실적인 조언처럼 느껴지기도, 나보다 젊은 사람들의 공감이 곧 ‘나도 할래'가 아님도 잘 안다. 다름의 인정, 혹은 생각의 유연함이 다른 세대 간 의견 차이일지도 모르겠다.


선생님의 가르침


“근데 너 카톡에 없더라? 무슨 일 있어?”


“아, 저 카카오톡 탈퇴했어요. 연락처를 정리하면서 겸사겸사”


처음 목소리만 들었을 때는 누군지 알 수 없어 당황스러웠으나, 곧 옛 직장의 선배임을 알 수 있었다. 한동안 즐거운 근황 업데이트가 이어졌다. 그는 그저 안부를 묻기 위해 전화했다고 했다. 오랜만의 연락은 대체로 뚜렷한 목적을 가지고 있고 그마저도 쉬운 연결수단인 카카오톡을 통하는 게 당연한 요즘이 아닌가. 그러니 그의 전화 연락은 이 시점에 ‘클래식하고 번거로운 이색적인 방법’이라고 해도 틀림없을 것이다. 어느 평일 오후에 받게 된 한 통의 전화는 수년이 흘러 흐릿해지다 못해 목소리도 모를 정도의 심리적 거리가 가까워지게 한 놀라운 경험이었다.


예전 직장 동료의 전화 연락이 왜 그렇게 반가웠는지, 왜 그간 서로 연락이 없었는지, 난 그를 가끔 생각하면서도 왜 먼저 전화하지 못했는지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그건 역설적이게도 고도로 발달된 디지털 세상에서 모두가 ‘항상 연결되어 있다’는 착각을 했기 때문인 것 같다. 무슨 이야기냐면, 먼 지인이라도 SNS니 메신저 등으로 늘 언제든 연락할 수 있다고 믿으니 오히려 평소 방문이나 전화 연락은 잘하지 않게 된다는 내용이다. 끊어진 전화선과 함께 진정한 이어짐도 끊긴 모양새랄까. 마치 주는 먹이에 익숙해 모험의 본성을 잃게 된 들여우들처럼, 카카오톡의 인스턴트 메시지에 지나치게 길들여진 나머지 우리의 진정한 소통 근육은 퇴화하고 있었는지 모른다.


성인이 되어 사회인이 되어서도 가끔 연락을 드리거나 찾아가 뵙던 초등학교 시절 은사님이 있다. 최근 연로하시어 유명을 달리하신 순간까지 선생님은 휴대폰이 없어 집으로 전화를 거는 것 만이 유일한 연락 수단이었다. 그래도 연락은 불편하지 않았다. 어쩌다 집으로 연락을 드리면 늘 반갑게 받으셨고, 어쩌다 선생님 가족분과도 인사를 하게 되기도 했다. 연락에 있어 유일한 장애였던 것은 우리의 관심과 의지였다. 안타까운 일은, 선생님의 부고를 그 일이 있고부터 꽤 나중에 듣게 되었다는 것이다. 선생님이 잠드신 묘소를 친구들과 찾아가 인사드리며, 우리가 살면서 놓지지 말아야 할 정말 중요한 가치를 평생에 걸쳐 가르쳐주신 선생님께 감사했다. 변하지 않는 것에 주목할 것, 변할 것들에 집착하지 말 것, 그리고 우리의 창의와 가능성, 다양성과 같은 가치를 하나의 구덩이에 전부 묻어버리지 말 것.


힘겹게 꼭 쥐고 있던 주먹을 펴자, 그 위에 하늘이 놓였다.




이대로 카카오톡을 영원히 쓰지 않을 작정은 아니다. 누군가 내게 말했듯, ‘다른 사람들이 불편해하는 것을 신경 쓸 성격'인 나는 언젠가는 그런 이유 때문에라도 다시 카카오톡으로 돌아가게 될지 모른다. 일단, 카카오톡은 한 개인이 고집스럽게 의지를 들여 쓴다 안 쓴다를 결정할 만큼 대단한 것도, 또 하찮은 것도 아니다. 분명 있으면 좋고, 없어도 그만일 서비스일 뿐이다.


카카오톡이 휴대폰에 있든 없든, 난 여전히 목소리를 듣기 위해 가족이나 옛 친구에게 전화를 하고, 메시지를 보내고, 이메일을 쓰고, 특별한 날에는 손으로 쓴 편지로 마음을 전할 것이다. 결코 하나의 수단에만 매몰되진 않을 것이다. 불과 10년의 세월이 바꿀 수 있는 것은 유행처럼 번지는 소통의 수단이지만, 거기 까지다. 수십만 년이라 가정된 역사를 지닌 언어는 음성과 글자의 모습으로 얼마든지 다양한 형태의 소통에 사용될 수 있도록 발전하고 진화해 왔기 때문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채울 준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