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친절한 민화

갤러리 #001 - 제17회 대한민국민화공모대전

by 케니스트리

꿀맛 같은 주중 휴일에 나는 인사동으로 향했다. 인사동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는 각종 화구를 파는 가게와 골동품점, 그리고 갤러리다. 간판의 상호는 모두 한글이고, 각종 한국 전통 소품들이 상점이며 노점에 널려 있어 외국인들에게도 '한국의 멋'을 즐기는 명소로 알려져 있다.


인사동의 한 갤러리에서 열린 '제17회 대한민국민화공모대전' 개관 첫째 날이었다.




한 민족이나 개인이 전통적으로 이어온 생활 습속에 따라 제작한 대중적인 실용화.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이 정의한 민화의 본의다. 문장에서 특히 민족, 전통, 습속, 대중, 그리고 실용이 눈에 들어온다. 민화는 '주로 비 전문가가 그렸다'라고 사전은 정의하지만, 이번 전시회에서 다양한 콘셉트의 전통 민화와 (멋대로 붙인 이름의) 뉴에이지 민화를 보고 그 표현만큼은 동의할 수 없게 됐다.


민화를 속화(俗畵)라 부른 이유는 ‘정식으로 그림교육을 받지 못한 무명화가가 그렸기 때문’이라는데, 현대에는 민화도 예술 장르로써 그 기법에 창의를 더해 많은 확장적 시도와 창작이 이루어지고 있다. 그리고 내가 처음 민화를 접한 한 예술가는 정식으로 미술 교육을 받은 사람이었다.


전시회에서 본 몇몇 작품들을 예시로 민화의 매력을 소개한다.


※전문가의 비평이 아닙니다.


민화는 정직하다.



흔히 볼 수 있는 책가도(冊架圖)의 일부다. 책가도는 책과 함께 각종 소품들이 진열된 책장을 그린 정물화인데, 나는 특히 이 부분, 책 옆면의 사실적 표현이 참 신기했다. 일정한 선과 그 짙고 옅음의 조화로움이 책 옆면을 이룬다.



민화에는 분채도료가 쓰인다. 분채도료는 가루 형태의 도료인데, 먹을 갈듯 물에 풀어 그 농도를 조절해 사용한다. 이 그림은 어느 초대작가의 작품으로, 민화기법을 활용한 추상화로 보인다. 파스텔톤의 물감과 메탈 색상이 조화롭게 쓰였다.


민화는 세심하다.



민화들을 감상하며 놀라웠던 부분이 바로 디테일의 표현이다. 밑그림을 그리고, 그 위에 선과 점, 각종 표현기법들을 조합해 수십 수백 명의 인물과 소품을 표현한 것인데, 대표적으로 '행렬도'가 무척 인상 깊었다. 멀리서 바라봐도 좋은데, 가까이 가서 들여다보면 사람들 제각각 표정이 다른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얼굴이 커봐야 오십 원짜리 동전보다도 작은데, 작은 점과 선만으로 표현한 인물의 표정이 작가가 의도한 것인지, 아니면 그리다가 우연히 만들어진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아마도 의도적으로 그린 표정이지 않을까.



전통 민화의 주제에서 벗어난 창작품들도 다수 눈에 띄었다. 그중 <행복한 날>이라는 작품에는 옛 신혼부부 의상에 각각 행복 행(幸) 자와 복 복(福) 자가 큰 글씨로, 배경면은 한글 문구로 채워져 있다.


문구는 '나 혼자 가는 걸음은 발자국만 남기지만 함께 가는 걸음은 새길을 만든다'.


민화는 여유롭다.



풀과 꽃, 곤충과 동물은 민화의 주요 소재다. 그림에서 나비는 색이 참 다채롭고 화려함을 알 수 있다. 초충도(艸蟲圖)의 매력은 꽉 차지 않아 여유로움에 있다. 화려한 나비가 부드러운 색채의 단조로운 풀꽃과 넓은 여백 속에서 어우러지니 더 역동적으로 보인다.


민화는 부채와 같은 소품에도 장식으로 활용되는데, 민화가 그려진 부채 자체가 그림의 소재가 되기도 하여 이 또한 민화만이 가진 무한한 내면확장 속성이 아닐까 싶다.



이는 실재하는 부채가 아닌, 그림에 등장한 부채이다. 부채는 그림으로 장식되어 있다. 자세히 살펴보니, 부챗살이 접히는 부분까지는 고려하지 않은 듯 보였다. 하지만 그건 대수롭지 않다. 민화가 가진 선과 면의 사실적 표현이 마치 진짜 부채로 착각하게 할 만큼 절묘하기 때문이다.


민화는 꿈을 꾼다.


현대에 와서 민화는 조금 더 다양한 모습으로 발전한다. 민화의 기법을 차용해서 소재의 확장을 이룬 결과로 민화는 더욱 가까이 대중에게 다가선다.



달 토끼 두 마리가 하늘에서 내려와 서로 앞에 수줍게 서 있다. 차림을 보니 남녀 토끼다. 뒤편 건물의 처마 아래에 월하정묘(月下情卯), 즉 '달 아래에서 정을 나누는 토끼'라 적혀 있다. 오래전에는 현판에 보통 우에서 좌로 글씨를 적었던 것을 감안한다면 옥에 티일 수 있으나, 이 또한 현대인들이 읽기 편하게 배려한 민화의 매력으로 볼 여지도 있다.



책가도에 애견 강아지들이 등장했다. 현대에도 흔히 접할 수 있는 소재들이 전통의 민화 기법을 만나 초현실주의 민화가 탄생했다.



흐드러진 꽃과 두 개의 대문, 그 위의 문양, 그리고 창 밖의 연못과 도드라진 색색깔의 잉어 떼가 풍요롭고 화려한 정원을 이룬다. 꽃밭에는 조선시대에는 당연히 없었을 유럽 태생의 강아지들이 나비와 함께 위치한다. 이런 그림은 화려한 빈티지 벽지보다 비슷한 톤의 단조로운 벽 위가 어울릴 것 같다.


민화는 친절하다.


민화를 속화라 부른 이유는 서예나 수묵화와 달리 세속의 모습을 마치 기록하듯 세심하고 사실적으로 그린 화풍이 고고한 사색의 대상은 아니라고 판단한 사대부들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현대 민화는 분명 전문 예술 분야이고, 세대를 거치며 독특한 화풍으로 발전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민화 한 점 앞에서 한참을 서 있어도 계속 새로운 매력을 발견할 수 있으니 사색의 즐거움도 충분하다.


그러므로 민화는 친절하다. 아무 생각 없이 바라봐도 재미있고, 생각을 하며 읽어도 그 의미가 통하도록 소재를 적절히 표현한다. 머리를 쥐어 짜내도 도저히 알 수 없는 숨은 그림 찾기가 아닌, 비교적 쉬운 십자말풀이 같은 민화는 직장인의 휴일에 '참 좋은 그림'이다.


갤러리 세 개 층, 모두 여섯 개 전시관에 걸린 입상작들과 초대 작가들의 민화를 모두 살펴보는데, 한두 시간이 부족했다.




사람은 사람으로부터 자신이 머물던 영역의 경계를 허물기도 한다. 민화를 처음 접한 것은 한 사람으로부터다. 평범한 직장인 같지만 사실 비범한 그는 늘 새로운 것에 도전을 한다. 어느 것 하나 대충 하는 법이 없고, 무엇을 손 대든 참 '잘' 그것을 한다. 그런 그가 정진하는 민화이니, 의심의 여지없이 선뜻 그 분야에 관심을 가지게 됐다. 그리고 이번 민화 전시회에서 민화는 가요 같다고 생각했다.


계절의 경계와 같은 클래식도 좋지만, 때로는 눈의 깜빡임, 또는 들숨과 날숨의 경계처럼 분명한 의미를 읊듯 전하는 친절한 가요도 좋다. 민화는 평소 내가 즐겨 듣는 그런 편안한 노래를 닮았다.

keyword
목요일 연재
이전 02화마음의 흔적 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