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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케니스트리 Dec 25. 2024

빛이 쉬어간 공간

수채화 캘리그래피 연습노트 #003

공감하는 이들 모두, 메리 크리스마스 =)




"유럽의 도시들은 십수년이 지나도 크게 변한것이 없는데, 우리는 너무 빨리 바뀌어."


지인은 최근 결혼기념일을 맞아 아내와 추억의 장소를 찾으려 했지만 결국 찾지 못해 아쉬워 했다. 나도 그 아쉬움에 공감했다. 얼마 전 다시 찾아간, 세상 다시는 없을 기묘한 칵테일도 척척 만들어주던 추억의 바(bar)도 정체 모를 남미풍 맥주집으로 바뀌어 있었다.


옛 공간이 그리워 다시 찾아보면 사라진 경우가 많다. 난개발로 아픈 도시는 고즈넉한 멋뿐만 아니라 오래 터 잡고 장사하던 상인들을 잃는다. 그리고, 그 장소에 머물던 추억도 갈 곳을 잃는다. 요즘 우리 도시의 모습이다. 바삐 변하는 도시에서의 기억이란, 너무 빠르게 지워지고 또 대체된다. (그러니 글이 있어 얼마나 다행인지.)


이번에 다시 찾은 추억의 공간은 다행히도 아직 그 자리에 있다.


카페 그리너리


송파구 풍납동의 한 카페는 마치 시간이 멈춘 듯, 세월묻은 외관과 심플한 우드 인테리어가 특징이다. 차분한 공간엔 드는 빛조차 편히 머문다. 주변 건축물들도 대체로 눈높이 낮은 지붕들이라 너른 시야가 여유롭다. 덕분에 카페는 찾는 이를 멀리서부터 마중하듯 반긴다.


오랜만에 찾았지만 핫샌드위치와 라테는 여전했다. 잠시 그 맛을 음미하다가 글을 썼다. 주말 새 다녀온 민화 전시회를 회고했다. 예술의 여운을 느끼기에도, 주로 자연의 빛이 은근히 밝힌 이런 차분한 공간이 좋다.





카페에서,


글을 쓰다가 잠시 한숨 돌리려 캘리 붓을 잡았다. 친구 커플을 만나는 날인데, 그들에게 선물할 연하장 정도의 의미로 '꽃'과 어울리는 문구를 찾아봤다. 아직은 꽃을 수채화로 그릴 실력이 안돼 인쇄된 배경지에 최근 연습한 문장을 적어보기로 했다.



헤아림을 길잡이로, 두 사람이 손 꼭 잡고 예쁜 길만 걷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았다.




사무실.


크리스마스 전날이라 그런지 직원이 별로 없어 조용한 와중에 한번 써 봤다. 날이 날이라 배경지 그림이 산타나 눈사람이면 더 좋았을텐데, 아쉽게도 꽃이라 문구에도 '꽃'을 넣어 적었다.


캘리그래피는 특이하게, 글씨가 모두 일정한 크기이거나 적당한 간격을 두면 예쁘지가 않다. 글자끼리는 더 가까이, 크기도 선의 굵기도 강약중강약약 - 마치 리듬 타듯 이어 적는다.





캘리 교실에서,


이번에 배운 수채화의 주제는 겨울이면 그리운 '가을'이다. 가을은 알록달록한 색채의 계절이다. 나뭇잎들은 노랗게, 또는 붉게 물들며 산이나 들을 채색한다.


단풍 져 떨어진 잎 하나하나를 보면 같은 나무에서 나왔어도 색이 다 다르다. 심지어 붉은 단풍잎도 저마다 다른 농도로 붉고, 노란 은행잎도 군데군데 초록이 묻어있다. 빛이 더 많이 또는 적게 닿은 결과이다.


자연은 언제나 이처럼 잘 어우러진 불확실성으로 그 존재를 증명한다. 그러니 물의 농도와 우연한 번짐을 이용해 그리는 수채화는 자연을 가장 자연스럽게 그리는 방법이 아닐까.


사색 그만. 이제, 채색의 차례다.


칠하기


여러 형태의 낙엽 예시 그림을 가지고 각각 적절히 종이 위에 습사를 해 배치한다. 그리고 색을 조합해 칠한다. 처음에는 노란색을 연하게 칠하고, 그 위에 빨간색 혹은 초록 색을 레이어로 포인트를 준다.


색을 입히다가 실수도 여러 번 했다. 물기가 지나치게 적은 물감을 포인트로 칠한 탓에, 의도대로 잘 번지지 않아 덧칠하다가 색이 온통 진해지기도 했다.



잎맥 표현하기


마무리로 각 이파리 색보다 진한 색으로 세필을 이용해 선을 그려 주었다. 잎이 잎이 되려면, 잎맥(脈)을 잘 그려줘야 한다. 사람으로 치자면 혈관으로, 잎맥을 그려 줘야 비로소 잎 같아진다. 잎맥은 잎마다 모양이 다르므로 특징을 파악하고 신경 써서 그려준다.



세필로 일정하게 선을 긋는 일이 생각보다 쉽지 않아서, 은행나무 잎을 스케치하고 연습장에 먼저 연습을 했다.



오늘의 완성품. 전반적인 배치와 특히 은행잎의 색감이 아쉽다. 기회가 되면 다시 해 보고 싶다. 이 그림에는 어떤 글과 글씨체가 어울릴지, 잘 생각해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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