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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케니스트리 Dec 18. 2024

마음의 흔적 따라

수채화 캘리그래피 연습노트 #002

이파리. 아무리 작은 잎에도 동무가 있고, 그들을 잇는 줄기와 뿌리가 있다. 아래에서 위로 갈수록 잎의 색은 옅어지고 크기도 작아진다. 줄기도 땅과 가까울수록 강하고 하늘과 가까울수록 유연하다. 아래는 지지하고, 위는 받아들인다. 이 모든 어우러짐이 하나의 완전한 나무를 만든다. 사람은 붓과 물감, 물의 번짐을 이용해 그것을 표현한다.


그림은 때로, 지나치게 솔직한 경계로 비 현실적인 교감을 자아낸다.




유칼립투스 그리기


지난 테이블야자에 이은 두 번째 수채화 소재는 둥근 잎 구조가 예쁜 유칼립투스다. 예시 그림을 잘 살펴보니, 잎 표면의 질감 표현과 줄기와 잎이 만나는 지점의 오묘한 번짐이 재미있다. 잎의 색을 두어 개 정하고, 가장 위의 잎부터 하나하나 묽은 초록색으로 칠하기 시작한다.


예시 그림


잎의 음영과 줄기와 잎이 만나는 지점의 표현은 번짐을 이용해 아직 배경면이 마르기 전에 한다. 조금 더 짙은 색을 아직 마르지 않은 배경색 경계에 콕 찍어 주면 번짐이 시작된다. 그러니 타이밍이 중요하다. 적당한 물기 위의 번짐은 어느 정도는 의도한 대로 잘 나온다. 그러나 겹쳐진 두 잎을 그릴 때에는 조심해야 한다. 하나가 완전히 마르고 다음 것을 칠해야 침범 없이 경계가 예쁘게 생긴다.


겹친 잎의 경계가 무난한 경우
옆의 잎이 다 마르기 전 칠해서 침범한 경우


잎 표면 물기의 분포를 이용해 전체적인 음영을 조정할 수 있다. 가장자리를 연한 색으로 표현하고 싶다면 붓으로 물을 아래로 살살 밀어준다. 그러다가 부자연스러운 경계가 생기면, 나중에 수정할 기회가 있으니 여러 번 덧칠하지 않는다.


줄기를 그릴 때는 마디와 끄트머리를 필압으로 조절한다. 한 번에 쭉 선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중간에 한 번씩 필압을 줘 가며 끊어간다.



그렇게 완성된 유칼립투스 그림.



조금 부자연스러운 부분이 있어 수정하고 싶다고 하자 선생님이 이 자체가 훨씬 자연스럽고 예쁘다고 하셔서 그대로 마무리했다. 그리고 칭찬받았다. 꼼꼼하게 잘 그렸고, 처음치고 색이 아주 잘 나왔다고. :-)


캘리그래피로 완성하려면 문구를 정해야 하는데, 아직 지난 테이블야자잎 그림과 어울리는 문구도 정하지 못했고, 유칼립투스도 마찬가지다. 그렇다고 아무 글자나 쓰고 싶지 않아서 선생님께 다음 시간까지 꼭 생각해 보고 오겠다고 했다.




마흔 번째 생일을 맞는 친구가 있어 어떤 의미 있는 선물을 할까 고민하다가 배경 엽서에 캘리를 써 보기로 했다. 글자를 그림자배경 엽서에 쓰고, 보라색 프리저브드(preserved) 드라이플라워로 데코를 하면 보기에 괜찮을 것 같았다.


문장을 생각해 보았다. 문장 속에 '마흔'이나 '40'을 잘 숨기되, 그 의미를 담고 싶었다. 그래서 마흔이라는 나이의 의미를 먼저 생각해 보았다. '나의 마흔은, 어떤 의미였지?'


나의 마흔은 '미혹되지 않는다(不惑)'라는 공자님의 말씀과 같지는 않았다. 여전히 잘 흔들리고, 여전히 미숙했다. 그럼에도 마흔이라는 나이는 인생의 중반쯤, 살아온 날도 살아갈 날도 많은 경험과 미래가 균형 잡힌 나이라고 생각했다. '지혜로운 그의 마흔도, 틀림없이 그렇게 매력적일 거야.'


마음의 흔적 따라

사랑하고, 공감하고


우리는 자주 '마음은 그렇지 않은데'라거나, '마음먹은 대로 잘 되지 않아서'라며 아쉬워한다. 그래도 잘 살아온 사람들은 지나고 보면 그 삶이 아름답다. 그들이 걸어온 길은 캘리를 닮았다. 캘리는 붓이 지난 흔적이고, 지날 땐 잘 모르지만 완성하면 예쁘다. 지은 글에는 그런 의미가 담겼다.


문장을 쓰기 위해 연습장을 들춰 어울리는 글씨체를 하나하나 찾아내서 연습해 보았다. 종이에 이리저리 배치하면서 글자의 간격, 행간, 선후를 조금씩 조절하며 가장 어울리는 구조를 찾았다.



그림은 몰라도 글씨는 수정이 어렵다. 한번 쓰면 돌이킬 수 없고, 망치면 버려야 한다. 그래서 잘 되지 않는 글자는 다시 연습장에서 여러 번 연습하고 옮겨 적었다.


나의 경력과 실력을 감안할 때, 꽤 그럴듯한 결과물 몇 개를 얻을 수 있었다.



엽서의 비어있는 면에 배송 온 프리저브드 드라이플라워를 배치했다. 넣을 상자에 맞게 테두리를 잘 잘라준 다음, 드라이플라워를 고정하고 상자에 넣어 완성했다.


생애 첫 창작 캘리그래피 엽서다.





"캘리는 정답이 없어"


태어나 처음으로, 구성과 카피, 폰트까지 직접 기획한 캘리그래피를 본 다른 친구가 한 말이다. '음, 그럭저럭 괜찮네'라는 말보다 듣기 좋았다. 그렇다. 글씨에 정답이 어디 있겠는가. 그래서 매력적이다. 같은 사람이 같은 문구를 써도, 단 하나도 같은 모양이란 있을 수 없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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