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채화 캘리그래피 연습노트 #10
영화 <검은 수녀들>은 개봉 전부터 기대가 컸다. 전작 <검은 사제들>의 작품성이 워낙 훌륭해서였다. 나처럼 기대한 사람들이 많았을 것이다. 하지만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크다는 법칙은 예외가 없었다. 영화는 관객 수라는 성적표와 상관없이 대중의 혹평을 받았다.
그래도 영화를 봤다. 영화가 아니라 나 자신에게 기대를 걸었던 것 같다. 늘 그렇듯, 나는 영화 속에서 다른 매력을 발견할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그리고 영화는 예상대로 매력적이었다. 영상미와, 연기와, 오랜 관념과 상식을 깨는 새로운 시도가 좋았다. 하지만 재미있지 않았다. 사람들의 혹평이 왜 나왔는지도 이해가 됐다.
이 영화는 흐름이 어딘가 어색하다. 강약 조절이 부족하고, 이야기의 맥이 끊기는 느낌이다. 기대를 높여줄 사전 장치도, 이야기 속에서 ‘왜 그래야 하는지’에 대한 개연성도 약하다. 수녀들의 퇴마 의식은 그럴싸하지만 임팩트는 기대 이하다. 천주교의 신성함과 무속신앙이 결합한 신선한 설정도 제대로 그 매력을 살리지 못했다. 좋은 소재와 수려한 연출은 시퀀스(sequence)에 도움이 되지 못했다.
지난 그림 시간에 배운 수채화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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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퀀스(Sequence) : (영화에서)하나의 주제를 이루는 여러 장면(Scene)의 이어짐.
이번 연습 주제는 '스케치 없이 그리는 장미꽃'이다. 단색을 이용해서, 오직 붓의 터치와 농도의 조절만으로 꽃잎으로 표현한다. 단순화한 그림이다. 포스터 배경지로 쓰이면 좋다. 먼저 이야기한 대로, 이 그림은 사실 실패에 가깝다.
붓으로 처음 시작하고 눌렀다가, 떼는 과정에서 잎과 잎의 겹침이 자연스럽고 조화롭게 이루어져야 하는데, 생각보다 배열을 일정하게 유지하기가 어려웠다. 결과물을 보며 피보나치 수열(Fibonacci Sequence)이 떠올랐다. 수열은 자연의 조화를 숫자로 나열한다.
황금 비율
자연은 언제나 신비로운 패턴을 품고 있다. 피보나치수열은 연속된 소수(素數, prime number)로 이루어진다. 이 수열은 작은 숫자들의 간단한 규칙에서 시작하지만, 끝없는 확장을 통해 놀라운 조화로 수렴한다. 0과 1에서 출발해 앞의 두 수를 더하며 만들어지는 이 수열은, 연속된 숫자를 나눌 때 점점 1.618에 가까워지는 성질을 가진다. 1:1.618은, 사람이 바라보았을 때 가장 편안하다는 황금비율이다.
흥미로운 점은 이 비율이, 해바라기 씨의 배열, 조개껍질의 나선, 나뭇가지의 분포, 심지어 은하계의 소용돌이에서도 발견된다는 것이다.
이 날 그린 장미꽃도 마찬가지였다. 황금비율에 따라 나뭇잎은 나선형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질 때 가장 아름답다. 잎 하나하나가 서로 간섭하지 않고, 적당한 거리에서 어우러질 때 조화롭다. 우리가 일상에서 마주하는 자연이 어색하지 않고 편안한 것도 같은 이유다. 자유로운 변화 속에서도 균형을 이루는 비율과 규칙이 있기 때문이다.
붓은 한 번 지나가면 되돌릴 수 없다. 그래서 조심스럽게, 신중하게 그리게 된다. 잎 하나씩 그릴 때는 모양도 색도 나쁘지 않았다. 그런데 완성된 그림을 조금 멀리서 바라보니, 어딘가 어색해 보였다.
조화로움의 비밀은, 적절한 무심함과, 적절한 밀도와, 적절한 비율에 있었다. 영화도, 그림도, 살아가는 방식에도 예외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