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채화 캘리그래피 연습노트 #008
조색(調色). 색을 만든다는 뜻이다. 이 색과 저 색을 섞으면 무한한 색이 탄생한다. 적은 물감만으로도 간단한 수채화를 그리는 데 무리가 없다. 그러니 팔레트에 많은 색을 담을 필요는 없다.
보통 색을 구성할 때, 우선순위에서 밀리는 색이 있다. 검은색, 그리고 흰색. 조화롭기 힘든, 양 극단의 색들이다. 검은색은 없어도 왠만큼은 조색할 수 있다. 하지만 흰색은 불가능하다. 그러니 흰색은 꼭 필요하다. 흰색은 그것만으로 완결된 색, 어떤 것도 대신할 수 없는 기질이다.
흔히 아이를 순수하다고 말한다. 흰 도화지처럼 쉽게 물들기 때문이라고. 하지만 흰색에 티가 한 점이라도 묻으면, 다시 원래의 흰색으로 돌아갈 수 없다. 섞는 건 가능하지만, 빼는 건 불가능하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아이에서 어른이 되는 동안 어둡거나, 탁해진다. 그 것을 영원히 피할 수는 없다.
우리는 이미 여러 색으로 물들어 있다. 시간이 지나면서 희어지는 것은 머리카락뿐이다. 다소 맑아질 수는 있어도, 순백으로는 돌아가지 못한다. 나는 생각했다. 피할 수 없다면, 차라리 좋은 색으로 물들자고. 조화로운 색, 편안한 빛, 누구에게도 부담스럽지 않고, 오래 바라보아도 좋은 그런 사람이고 싶다고.
지난 과제를 마쳤다. 수국 그리기. 기초에서 심화반으로 넘어온 첫 번째 꽃이었다. 잎도 많고, 구조도 더 복잡해 보였다. 원래는 붉은 계열의 꽃이었는데, 맘대로 바이올렛으로 바꿔 칠했다.
꽃의 중심에 하얀 점으로 입체감을 표현했다.
- 이번엔 무슨 색으로 하고 싶어요?
"글쎄요, 지난번에 바이올렛이었으니까..."
둘러보다 보니 너무 예쁜 색감의 꽃을 발견하고, 그걸 가리켰다.
"저 색이요..!"
그러자 선생님은 난처해하면서 그 색은 지금 물감에 없다고 했다. 조색을 해도 그 색감은 어려울 거라고. 말 끝을 흐린 선생님의 답은, 마치 '으이구, 예쁜 건 알아갖고'정도의 핀잔 비슷하게 들렸다. 그러자 곁에 있던 민화 선생님이 말했다.
- 일반 물감에는 없고, 민화 분체도료에는 있어. 산호색이지 아마?
그래서 찾아봤다, '산호색'이란 무엇인가? 검색해 보니, 이런 걸 찾을 수 있었다.
다시 드는 생각이지만, 민화의 색감은 정말 곱다.
(참고: 친절한 민화)
같은 색의 물감은 없었다. 그냥 가진 색으로 조색을 해 보았다. 주황에 노랑 살짝, 아주 살짝 섞으니 엇비슷한 색이 되었다.
결과물이다. 이 색도 마음에 들었다. 푸른 계열이나 보라계열의 색과 더불어, 붉은 계열의 어느 색이든 수채화의 투명도를 더하면 꽃에 잘 어울린다.
이제 문구를 캘리로 넣어야 하는데, 무슨 문구가 좋을지는 아직 고민 중이다. 여전히 글씨를 자신 있게 쓰지 못한다.
혹은 이성과 감성의 조화를 수채를 그리며 자주 생각한다. 어떤 면은 물기가 마르기 전에 처리해야 자연스럽고, 어떤 면은 인접한 면의 건조가 끝나고 칠해야 침범이 없다. 자연스러운 번짐은 아직 면이 촉촉할 때 가능하고, 수분을 머금은 물감이 완전히 말라야 깔끔하게 선이 산다. 사람도 그렇다.
항상 감성적이어도 문제고 언제나 이성적이어도 문제다. 채색하다 말고 또 사색을 해 버렸다.
아래는 기초반의 결과들이다. 물기 조절 실패, 덧칠 실패 등 여러 미숙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있다.
그래도 회차를 거듭할수록 조금씩 좋아지는 것 같아 감사한, 붓의 흔적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