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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케니스트리 Jan 23. 2025

완벽한 쉼

수채화 캘리그래피 연습노트 #7

맑은 술은 거친 누룩에서 탄생한다. 복잡한 것을 잘 풀어낼 수 있어야 간단명료해진다는 것은 글과 그림의 닮은 점이 아닐까. 쓰고 보니, 능숙함이 곧 해탈인 인생과도 비슷하다. 아무렇게나 그리는 것처럼 보이는 추상화가들도 정물화나 풍경화를 분명히 잘 그릴 터다.


언젠가 프랑스 화가 장줄리앙(Jean Jullien)의 전시회에서, 그의 예술 스펙트럼이 아주 넓어 복잡하고 정교한 풍경화나 정물화에도 상당한 깊이가 있음을 알고 놀란적이 있다. 그의 대표적인 유명 작품들이 커머셜 디자인으로 활용된 재치 있는 일러스트라서 잘 모르던 사실이었다.


장 줄리앙의 풍경화 'Petrichor' (www.booooooom.com)


지난 연습에서 배움 없이, 그리고 스케치 없이도 그릴 수 있는 단순한 그림을 찾아 비슷하게 그린 후, 작가들의 어떤 작품이든 단순하다고 해서 그 느낌까지 따라 그리기는 힘들다는 것을 깨달았다.


취미로 시작한 미술이지만 더 잘하고 싶다는 의지가 생겼다. 연습만이 길이다.


선을 따고, 잎 하나하나 꼼꼼하게 칠하기. 아직 미완성 '바이올렛 수국'




"그림보다는 글씨가 더 어려운 것 같아요 선생님"


"원래 글씨가 더 어려워요. 그림은 어느 정도 후보정이 되는데, 글씨는 쓰고 나면 끝이니까요."


그래서 꽤 괜찮게 그린 그림 다음에 빈 여백에 쉽게 글씨를 쓰지 못한다. 망치는 게 싫어서 조심스럽게 적다가 오히려 실수를 한 적도 있다. 어떤 경우에는, 붓이 빠르게 지나가야지 너무 오래 종이에 머물다 보면 오히려 어색한 획이 생기고 전체적인 조화가 깨진다.


그래서 더 많은 글씨 연습을 하기로 했다. 생각나는 대로 연습장에 이런저런 문구들을 적었다. 사실상 붓펜만 있으면 되므로 집에서도 회사에서도 틈틈이 연습할 수 있다. 퇴근 후 할 소일거리로도 한두 자씩 연습하기 좋다.

가끔은 정체와 의미가 모호한 카피를 적는다


새 도구


집에서 쓰는 파렛트 외에 가지고 다니기 편한 여행용 미니파렛트를 샀다. 물감을 팬에 담아 취향껏 옮겨 조합할 수 있어 편리하고, 색도 모양도 예쁘다. (원래 보라색 계열을 좋아하지 않았는데, 언제부턴가 보라색을 선호하게 되었다.)



새로 산 4B연필과 파버카스텔 니더블 지우개, 수채화패드다. 니더블 지우개는 찰흙처럼 말랑해서 습사 한 연필 선을 콕콕콕 두드려 원하는 경도로 지울 수 있다.


입문한 지 석 달째, 도구가 하나씩 늘고 있다.



기초반 마지막 그림


감기로 센터에 가지 못해 선생님으로부터 문자로 전달받은 예시 그림을 하나는 집에서, 하나는 해가 잘 드는 카페에서 그렸다.


진달래(혹은 철쭉?)와 벚꽃으로, 둘 다 봄꽃의 대명사다.


예시 작품


모양은 따르되 색은 조금 다르게 하고 싶어 주황색 톤을 더 짙게 사용했다. 먼저 습사로 선을 따고, 조색을 해 묽게 칠해 주었다.


잎 면은 1도 채색을 하고, 마르기 전 조금 더 짙은 색상이 번지게 해 음영을 준다. 겹치는 꽃잎은 하나가 완전히 마르고 다른 것을 칠해야 잎 사이 경계가 자연스럽게 분명해진다.



꽃잎이 다 마르면 수술과 줄기를 그려 완성한다. 다 그리고 보니 색감이 마치 영산홍 같기도 하다. 영산홍의 꽃말은, '첫사랑'.



캘리를 더한 결과물이다.



벚꽃은 조색 후 묽기를 다르게 하여 먼저 흐린 꽃잎 먼저, 짙은 꽃잎은 나중에 칠했다. 연필 가이드선 없이 채색만으로 그렸다. 꽃이 작지만 개수가 많아 생각보다 시간이 오래 걸렸다.



이번에 배운건 '덧칠은 함부로 하지 말라'는 것이다. 수채화의 매력인 '투명도'가 사라져 마치 도장으로 찍은 듯한 부자연스러운 꽃이 곳곳에 남았다.


마무리로 가지를 곳곳에 이어주고 완성했다. 떨어지는 꽃잎은 그야말로 화룡점정. 왠지 불어오는 바람의 생동감과 봄이 지나는 쓸쓸함이 함께 느껴진다.





쉼의 공간


휴일. 일부러 약속을 잡지 않고 집에서 차분히 쉬려는데 문득 지난 계절 주말에 자주 가던 카페가 생각이 났다. 주로 글을 쓰거나 책을 읽고, 커피를 마시며 쉬는 공간이었다. 그 카페는 더는 그 자리에 없다. 사장님은 잘 준비해서 인근에 다시 열겠다는 약속을 했었는데, 아직 소식이 없다.


그 카페가 없어지고 나서는 주로 집에서 글을 쓴다. 그런데 지난 주말엔, 왠지 다시 어딘가 좋은 공간에서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바로 떠오른 카페는 대안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도 훌륭하다. 석촌동 카페 '뷰클런즈'에는 차분한 우드톤 인테리어 벽과 선반 여기저기에 좋은 글귀가 적힌 메모가 있고, 신경 써서 보면 아기자기한 소품들과 메모장, 필기구들도 발견할수 있어 글을 좋아하는 이들의 놀이터 같은 곳이다.


책의 문구, 혹은 나의 메시지를 적어 넣는 메모 서랍


2층 공간 입구에 적힌 것처럼, 그냥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좋은 그런 카페에서 나는 챙겨간 화구를 꺼내 그림을 그렸다. 어떤 의미로는 그림을 그리는 것이 내게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다. 앵앵거리던 이명도 사라지고, 그리움도 아득해지고, 나무를 그리면 숲에, 꽃을 그리면 그저 꽃밭에 머물게 된다. 아무 생각 없이.



뷰클런즈(BJÖRKLUNDS)는 스웨덴어로 '쉼'을 뜻한다.




선생님이 이제부터는 심화반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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