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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케니스트리 Jan 16. 2025

동심이란 쉼표

수채화 캘리그래피 연습노트 #006

수요일에서 목요일로, 연재 요일을 변경했습니다.



허락도 없이 귀찮게 계속 드나드는 감기에 몇 주 동안 미술 수업에 가지 못했다. 그래도 틈틈이 글씨를 쓰고, 그림도 그렸다. 그림은 주로 작가분들 것을 참고해 그린다. 이제는 인터넷에서 '아, 이건 해볼 수 있겠는데'하는 그림들도 발견할 수 있다. 어른이 되고, 그림을 취미로 다시 배우기 시작하면서 '어떻게 했더라' 하며 막막하던 처음에 비하면 큰 보폭으로 나아간 셈이다.


어느 평일 저녁, 퇴근을 서두르며 즐거운 색칠 놀이를 해볼 생각에 '참 오랜만에 그림 도구에 신나 보는구나'싶었다. 어린 시절 부모님이 미술 도구를 새로 사주시면, 새 파렛트에 아직 통통한 새 물감을 짜서 얼른 하얀 8절 도화지에 그림을 그려볼 생각에 설렌 것과 비슷한 마음일까. 배송 온 붓과 물감은 아직 포장도 뜯기 전인데, 늦깎이 어른의 탁하고 좁아진 마음에 동심이란 쉼표를 하나 그려 놓았다.




수채화 기법의 기초를 배우고, 그렇게 단순한 채색과 번짐만으로 이파리가 이루어지는 신기한 경험을 하고 나니 이런저런 응용을 해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아직 수채화는 체험의 수준이라서, 그동안은 붓만 구입해서 주로 센터에 구비된 공용 화구를 이용했다. 이제는 일주일에 한 번이 부족해 집에도 붓과 물감 한 세트를 구비하기로 했다.


온라인 몰에서 물감과 파렛트, 붓을 고르며, 잠시 어린 시절로 시간 여행을 했다. 학교에 가기 전 주말, 알림장에 적힌 대로 필요한 준비물을 사야 하는데, 가까운 문방구가 그날따라 문을 닫아 아빠가 옆동네까지 가서 사다 주신 기억도 떠오른다.


아마도 그 시절보다는 가격이 많이 올랐을 것이나, 여전히 신한화구 물감이며 루벤스 붓 등 수십 년 전 문방구에서도 볼 수 있던 반가운 상표들은 여전했다. 달라진 건, 웬만한 미술 도구들은 장바구니에 담는 대로 살 수 있는 어른이 되었다는 것과, 상황이 여의치 않아도 학교에 가져갈 미술 준비물을 어떻게든 구해주시던 부모님의 역할을 지금은 '로켓 친구'가 대신해 주고 있다는 것뿐이다.


요즘 미술을 다시 하며, 그리고, 또 그리워진다.




물감은 18색으로 필요한 색은 거의 다 있는 것으로 골랐고, 파렛트는 세트상품으로 포함되어 있어 따로 주문하지 않았다. 인터넷으로 주문한 지 하루 만에 익숙한 상표의 수채화용 물감과 붓, 물통 등 필요한 물건이 도착했다. (이러니 동네 문구점이 문을 닫지) 종이는 캘리그래피용으로 다이소에서 샀다. (결과적으로, 종이 표면이 약해 수채화를 그리기에 적당하지 않았다. 그래서 나중에 수채화패드를 따로 주문했다.)


즐거운 마음으로 물감을 하나하나 파렛트에 짜 두고, 붓은 물에 담가 흔들며 조심스럽게 녹말 기를 제거하며 풀어준 다음 대의 물기를 잘 닦아 통에 꽂아 말렸다. 그렇게 집에서 틈틈이, 그리고 싶을 때 그릴 준비를 마쳤다.




나무


처음 무엇을 그려볼까 하다가 낮에 보아둔 나무 그림을 선택했다. 아직 니더블(kneadable) 지우개가 없어 샘플 그림의 선을 따지는 못해 스케치 없이도 그릴 수 있는 나무가 최선이었다. (일명 떡지우개가 있어야 예시 그림을 습사 한 밑그림 선을 톡톡 두드려 선을 약하게 만들 수 있다. 선이 강하면 투명도 높은 수채화 채색에 방해가 된다.)


원하는 초록색을 묽게 해 다른 종이에 칠하며 농도를 맞췄다. 하다 보니 파렛트의 표면이 너무 미끌거려 농도 옅은 물감의 색을 확인하기에 적절치 않고, 이염도 잘 되는 듯하여 따로 찬장에서 세라믹 접시를 하나 꺼내 그 위에 조색을 했다.


큰 면은 대충 아주 옅은 농도로 칠하고, 아직 물기가 남아 있을 때 아래쪽에 음영을 주었다. 다음 조금 더 진한 초록으로, 점점이 찍어가며 이파리를 표현했다. 전문가의 샘플 그림과는 비교가 안되지만, 실력에는 꽤 만족스러운 나무 한 그루가 자랐다.



무슨 문구가 좋을까 하다가, 요즘 스스로에게 딱 필요한 한 줄을 캘리 붓으로 적었다. 나무라지 말자, 더 좋아질 테니.




역시나 가이드 선 없이, 붓과 물감만으로 그릴 수 있는 꽃 그림의 예시를 발견하고 바로 도전해 보았다. 일전에 유칼립투스를 과제로 그리며 배운 선 긋기와 번짐 만으로 줄기와 수술을 표현하기에 충분했다.


꽃잎 표면은 옅은 물감의 채색으로, 스케치 없이도 자유롭게 칠해주면 완성될 정도로 간단하다.



때때로 디테일한 묘사보다 이런 뭉뚱그린 표현이 더 재미있게 느껴진다. 아직 문구는 적지 못했다.


며칠 뒤에, 잠자리에 들기 전 분홍 꽃 하나를 추가해 넣어줬다.




바다


제주도로 힐링 여행을 떠난다는 지인의 소식을 듣고 문득 바다가 보고 싶어 졌다. 오래 가 보지 못했는데, 연내 꼭 한번 다시 들러봐야겠다.


단순한 색으로 대충 칠한듯한 그림 이면에, 상상 속 평화로운 섬 마을이 있다.





처음 이파리를 그리며 배운 선 긋기와 면 채색으로도 그릴만한 것들은 꽤 있다. 오히려 캘리와 어울리는 배경그림은 복잡한 것보다는 단순한 것이 글씨가 돋보이도록 돕는 느낌이다.


지향점은 창의(創意)와 응용이다. 뜻하는 대로 그릴 수 있다는 것은, 뜻한다고 모두 이룰 수는 없는 인생 보다야 훨씬 쉬운 성취라고 생각한다.


지금은 그저, 그리는 행위 만으로도 즐겁고, 추억하고, 편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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