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마음 | 수채화 캘리그래피 연습노트 #005
모나미. 추억의 국산 필기구 상표를 성수동의 콘셉트 스토어 간판에서 보고 마치 개미가 설탕 못 지나치듯 문을 열고 들어갔다. 스토어는 일반적인 문구점이 아니었다. 펜촉, 펜 몸통, 뚜껑 등을 마치 레고를 조립해 나만의 집을 짓듯 취향껏 만들 수도 있는 필기구 중독자들의 놀이터 같은 곳이었다.
가게를 둘러보니 다양한 용도의 펜뿐만이 아니라 이 분야 마니아들을 위한 노트, 종이, 잉크가 전시되어 있었다. 우리에게 익숙한 각진 형태의 기본 모나미 볼펜도 다양한 디자인이 있어 국민 볼펜의 재림이 참 대견하고 뿌듯하게 느껴졌다.
모나미 콘셉트 스토어를 쭉 둘러보다가 진열된 글쓰기 관련 책 중 하나를 펼쳤는데 마음에 드는 문구가 있었다. 스코틀랜드의 작가 헨리 드러먼드의 글이다.
인생을 돌아보면 제대로 살았다고 생각되는 순간은 사랑하는 마음으로 살았던 순간뿐이다
“You will find as you look back upon your life that the moments when you have truly lived are the moments when you have done things in the spirit of love.” -Henry Drummond
이 문장을 인용한 작가는 에세이에서, 이 문구를 발견하고 자신의 삶을 돌아보니 정말로 그렇더라고 공감했다. 나도 잠시 회상해 보았다. 과정에 후회되는 순간들도 물론 있지만, 기억에 '참 잘했어'라고 생각되는 때는 마음껏 사랑한 순간이었다. 삶이 불행할 때는 사실 그때 한 것이 사랑이었다는 걸 모르고, 당장 눈앞의 상실 자체에 감정이 볼모로 잡혀있을 때였다.
작가가 사랑을 말하며 ‘한 때(upon a time)’가 아닌 ‘순간(moments)’이라고 표현한 것은 절묘했다고 생각한다. 그만큼 귀하고, 딴 데 정신을 팔다가는 어느새 나를 지나쳐 멀리 떠나가버릴수도 있는게 사랑이니까.
여러 의미로, 나의 첫 만년필은 모나미로 결정했다. 1번부터 3번까지 필요한 부품을 내 맘대로 골라 조립하고, 컨버터를 이용해 잉크를 쭈욱 빨아들여 몸체에 이식해 만년필에 생기를 불어넣어 줬다. 창조주 놀이가 끝나면, 이제 글씨를 창작할 차례다.
사실 만년필은 편지를 쓰려고 샀다. 계획은 했지만 쉽게 실행하지 못해서, 미루고 미루다가 눈에 띈 그 가게에서 너무 고급은 아니어도 기능은 제대로인 만년필을 만나게 된 것이다. 잉크를 채우고 글씨를 써 보니, 확실히 볼펜만큼 편하지 않다. 같은 각도로 선을 그어도 가끔 선이 끊기기도 한다. 하지만 잉크의 질감은 매력이 있고, 색 감성은 깊다.
편지를 다 적고 보니 뭔가 글씨가 정돈된 느낌은 아니었다. 중간중간 마치 덧대고 기운 옷 같달까. 그 자체가 물론 매력이겠지만, 조금 더 일관된 선으로 정돈된 글씨를 쓰기 위해서는 잉크 조절과 필압의 노하우가 필요할 듯. 도구에 익숙하도록 더 연습해야겠다.
요즘은 쓸 문구를 찾으려 종종 성경을 들춘다. 오늘은 점심시간에 여유시간이 있어서 루카 12장의 성경 구절을 인용했다.
"숨겨진 것은 드러나게 마련이고, 감추어진 것은 알려지게 마련이다." (루카 12:2)
캘리그래피용 세필 붓으로 날림의 느낌 없이 정성껏 쓰되 글자들을 오밀조밀 붙여 적어 보았다. (역시 사이좋은 글자들이라 그런지 모였을 때 예쁘다.)
글씨를 촬영하고 '감성공장' 앱을 이용해서 배경과 합성했다. 눈의 결정체가 주제와 잘 어울리는 듯했다. 눈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결정체가 보인다. 하지만 사람의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고배율로 확대해야 볼 수 있는 진실은, 언제나 아주 약하디 약한 착각에 의해 가려져 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