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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터키의 무게

디지털 소통에도 기본은 있다

by 케니스트리

“보고서 이메일로 송부해 주세요”


회사에 새로 온 상급자로부터 이런 부탁을 받자 어색한 기분이 들었다. 평소 이메일은 외부와의 소통 이외에는 거의 활용하지 않았고, 더구나 클라우드로 관리하는 문서는 링크(link)를 통해 메신저로 공유하는 것이 당연했기 때문이다. 한 번 이런 방식이 익숙해지자, 디지털 소통의 시초나 다름없는 이메일이 불편하게 느껴지다니,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라는 걸 다시 한번 깨닫게 된다. 그렇게 이메일을 열어 문서를 첨부하며, 영화 속 한 장면이 떠올랐다.


영화 <인턴(The Intern, 2013)>의 주인공 줄리(앤 해서웨이)에게는 남모를 고민이 하나 있다. 직장에서는 성공한 사업가로 존경받지만, 개인적으로는 자신을 인정해 주지 않는 엄마에게 늘 불만이었다. 그녀는 그날도 엄마와의 대화에서 크게 답답함을 느끼고는, 가까운 부하직원에게 이메일로 “내가 엄마 딸인 게 신기해”라며 험담을 한다. 하지만 그 메일이 스마트폰의 주소 자동완성 기능에 의해 실수로 엄마에게 전송됐다는 사실을 깨닫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크게 놀란 줄리는 어떻게든 사태를 해결해 보려고 회사의 엔지니어들을 소집해 도움을 요청하지만, 그들도 이렇다 할 방법을 찾지 못한다.


그때, 시니어 인턴이었던 벤(로버트 드 니로)이 아주 고전적이면서도 확실한 해결책을 제시한다. 엄마는 저녁에야 개인 이메일을 확인할 테니, 그전에 집에 몰래 들어가 노트북을 찾아 이메일을 삭제하라는 것이다. 모두 말도 안 된다며 만류하지만, 줄리는 바로 동의하고, 우여곡절 끝에 벤은 동료들과 함께 엄마 집에 침입해 문제의 이메일을 지우는 데 성공한다. 영화 속 한바탕 소동은, 이메일을 공적 업무에만 드물게 사용하는 요즘엔 역사 속 에피소드나 다름없다.


디지털 커뮤니케이션 4.0


이메일의 보조 수단에 불과했던 메신저가 이제는 자료 공유와 검색 기능까지 강화되며 사내 협업의 허브로 발전하고 있다. 멀리 떨어진 동료뿐만 아니라 바로 옆에서 일하는 직원과도 메신저로 대화하는 일이 더는 어색하지 않다. 대표적으로 슬랙(Slack)은 대화 검색과 파일 공유가 편리하고, 외부 클라우드 드라이브와의 연동이 쉬우며, ‘채널’ 기능을 통해 주제별 협업이 가능하다. 게다가 캘린더, 문서, 저장공간 등 기본적인 클라우드 기반 써드파티(3rd-party) 협업 툴을 연결해 사용할 수 있다는 확장성이 매력적이다. 이메일과 달리, 메시지의 사후 수정과 삭제도 가능해 사용자의 실수에 대한 부담을 줄여준다.


메신저와 이메일, 신뢰와 편의 그 어딘가


슬랙으로 대표되는 업무용 메신저는 스타트업의 간소화된 의사결정 구조와 빠른 소통에 적합한 툴로 평가받는다. 슬랙은 한 게임 회사의 개발자들이 좀 더 손쉽게 협업하고자 자체적으로 개발해 사용하던 내부 커뮤니케이션 도구였다고 한다. 대체로 소프트웨어 엔지니어링 기술이 경쟁력의 핵심인 스타트업에서 개발자들이 슬랙을 선호하게 된 배경이다. 그러므로 슬랙과 같은 메신저 문화를 이야기하자면 먼저 스타트업의 소통 문화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스타트업


스타트업(Start-up)은 미국 실리콘밸리에서 처음 생겨난 개념으로 알려져 있다. 옥스퍼드 사전에 따르면, 스타트업은 ‘막 운영을 시작한 인터넷 기업’을 뜻하지만, 대중이 인식하는 스타트업은 이보다 더 넓은 의미를 포함한다. 포브스(Forbes)는 스타트업을 “산업을 혁신하고 세상을 바꾸는 것을 미션으로 스케일 경영을 하는 기업”이라고 소개했다.


가장 성공한 스타트업의 사례로 손꼽히는 FAANG(Facebook, Amazon, Apple, Netflix, Google)이 추구한 업무 방법론으로 알려진 린(Lean)이나 애자일(Agile)은 사실 Intel, IBM 같은 오래된 IT 기업들의 업무 방식을 개선해 적용한 것이다. 이러한 스타트업의 핵심 가치들은 빠른 실행을 위한 간소한 절차의 추구로부터 발전했다.


간소한 절차에는 간결한 소통이 필요하다. 소통이 간결해지려면 문장이 늘어지고 장황해지는 것을 최대한 피해야 한다. 어느 스타트업에서는 직원들에게 오프라인 회의 시간을 30분 이내로 제한하고, 회의에서 꼭 필요한 사안만 논의할 수 있도록 내용의 사전 숙지를 '적극적으로' 권장한다. 이처럼 스타트업의 효율을 중시하는 업무 문화와 함께 메신저 소통이 발전해 왔다. 코로나(Covid-19) 팬데믹으로 인해 비대면이 트렌드가 되면서 업무 방식도 메신저를 중심으로 변화했다.


메신저


1300년경 오래된 프랑스어 ‘message’에서 유래된 메신저(messenger)는 구약성경에서 사자(使者)나 특사를 의미했다고 한다. 여러 자료에 의하면 메신저는 넓은 의미로 천사나 예언자를 뜻하기도 했다. 하지만 우리는 언제나 예측할 수 없다. 메신저 속 대화의 향방을.


이메일을 주로 사용하던 시기엔 대체로 정돈된 문장과 첨부자료 등을 이용해 일종의 폼(form)을 갖춰 소통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메신저 위주의 소통에선 동료에게 좀 더 간단하게 업무 협조 요청을 할 수 있어 간편하다. 이러한 속성이 있어 메신저 속 대화를 인스턴트 메시지(IM)라 부른다. 많은 이들은 IM이 전체적으로 업무 시간을 줄여준다고 생각한다. 정말 그럴까? IM 소통에서 의외로 업무 처리시간이 더 늘어나게 되는 건, 지나친 간편함에 의한 부작용 때문일지 모른다.


예를 들어, 디자인 작업을 담당자에게 의뢰할 때 정돈된 메시지로 참고자료를 더해 요청한 경우 4-5차례의

스레드(thread) 댓글로 처리가 완료되었다면, 사전 준비 없이 대화를 시작하는 경우에는 수십 번의 문답과 정정 요청으로 업무 진행이 원활하지 않게 된다. 한 개발자는, 오픈된 채널에서 형식을 갖춰 요청하면 팀 단위에서 좀 더 투명하고 확실하게 처리될 일을 개인의 친분을 앞세워 메신저로 가볍게 요청해 두세 차례의 절차가 추가되는 불편함이 종종 있다고 말한다. 모두 메신저 속 IM의 편리함이 남용되는 사례다.


메신저 대화 - 가벼움과 진정성의 차이


이와 관련해 한 해외 매체는 효율적인 업무를 위한 메신저 대화 속 에티켓으로 이해하기 쉽게 직접적이고 간결한 언어를 사용할 것과 하나의 메시지로 요청할 것을 제안한다. 개인 간의 대화든 여럿이 포함된 채널이든, 메신저는 모두가 공유하는 공간이므로 독점과 남용은 삼가고 최대한 효율적으로 사용해야 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비동기 커뮤니케이션


많은 업계 관계자는 스타트업의 강점으로 빠른 호흡을 꼽는다. 그들은 불필요한 절차를 생략하고 협업 도구를 적극 활용하는 업무 문화가 성공의 동력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빠른 협업을 위한 소통 채널의 중심에 메신저가 있다. 메신저는 실시간 문답이 가능하다는 점에서 이메일의 사용 빈도를 줄여왔다. 하지만 메신저 위주의 소통 환경에서 빠른 호흡만을 추구하는 협업 문화는 종종 비효율과 소통 피로도를 유발한다.


우리는 대체로 즉시 답변하는 동료를 ‘일 잘한다’고 평가해 왔다. 하지만 빠른 응답이 당연한 업무 문화에서는 문제의 핵심을 겉돌거나 오류가 발생해 결국 처음으로 돌아가는 등 심각한 지연이 발생할 수 있다. 학자들은 충분한 고민을 거쳐 질문하고, 상대의 답변을 인내하며 기다릴 것을 비동기 커뮤니케이션(Asynchronous Communication) 개념으로 제시한다. 비동기 커뮤니케이션은 지연을 통한 조정(coordination)을 허용하는 소통 문화를 전제로 한다. 결국, 바른 소통 문화의 정착이 협업 도구의 완성을 만든다.


비동기 커뮤니케이션


엔터키의 무게


인턴(The Intern)에서 벤은 한 회사의 중역으로 은퇴한 후 무료함을 느껴 스타트업의 시니어 인턴십 프로그램에 지원한다. 그렇게 인터넷 스타트업의 말단 사원으로 출근한 첫날, 그는 하루 종일 자리에 앉아 상사인 줄리의 첫 번째 업무 지시 메일을 기다리지만, 메일함은 좀처럼 채워지지 않는다. 하루가 지나도 여전히 비어있는 메일함은 그의 회사 안에서의 가치를 의미한다.


디지털 소통 환경이 익숙하지 않은 벤은 모두 말없이 자판만 두드리는 사무실에서 외로운 섬과 같은 감정적 공허함을 느꼈을 것이다. 하지만 며칠이 지나자 그는 빠르게 적응하고, 동료들도 생긴다. 그에게 특별한 노하우가 있는 것은 아니다. 경청하고, 기다리고, 한마디 한마디 존중과 예의를 담아 말하는 것, 그것이 전부였다.


매일 수많은 메신저 대화를 주고받는 요즘, 종종 엔터키의 무게가 내뱉는 말 한마디, 보내는 이메일 'Send' 버튼 한 번 보다 결코 가볍지 않음을 느낀다.




<우리는 기업문화를 만들어가는 중입니다 (바라보다, 2023)>에 수록된 작가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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