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대화 속 상호 존중의 습관
신 부장은 오늘도 이메일을 열며 하루를 시작한다. 사업상 거래처, 부하 직원, 타 부서 동료, 각종 공지, 미처 시스템이 거르지 못한 광고 등 무수히 많은 메일 대화가 또 쌓여 있다. 어떤 건 무시하고, 어떤 건 답변하고. 때로는 누군가에게 그 메일을 전하며 참고나 협조 요청을 하기도 한다. 대부분 메신저나 가상 협업 공간을 이용해 일해도, 메일이 차지하는 비중은 여전히 크다.
그날도 바쁜 하루를 보내고, 평소처럼 퇴근을 준비했다. 퇴근 전 PC를 끄려는데, 이례적으로 PC가 잠시 버벅거리는 듯하더니 상태 표시줄에서 알림이 하나 뜬다. 대화 매너 감시 봇(bot), '캠(CAM - Communication Attitude Monitor)'이 보낸 리포트였다.
'오늘 당신의 디지털 배려도는 39점, [건조주의] 레벨입니다.
온기와 수분이 많이 필요하겠네요! 마침표, 웃음, 격려의 한마디를 아끼지 마세요!'
'아, 맞다. 얼마 전 도입된 이 성가신 녀석.' 짜증이 밀려왔다. 그런데 39점이라니? 대체 왜?
리포트를 살펴본다.
업무시간 동안 이메일 발신 6회, 회신 12회, 메신저 대화 129회 분석 대상 총 1,217자 중:
첫 메일 인사 누락 7회
회신 인사 누락 17회
문장 말미 마침표 누락 72회
이모티콘 사용 1회
'쓸데없는데 돈을 쓰는군.' 회사가 도입한 시스템에 불만이 가득해지면서도, 점수가 은근 신경이 쓰인다. 리포트가 정리한 더 구체적인 내용을 살펴봤다. 부하직원이나 협력사 직원에게 보낸 메일을 보면, 두서없이 지시만 내리거나 아예 답이 없거나, 마무리 인사가 빠진 경우가 많았다. 그제야 깨닫는다. '내 대화방식이 이렇게 건조했나?'
그리고 마지막 문장이 신경에 거슬린다.
'1주일 지속 50점 미만인 경우, 한동안 매너 자동완성 모드가 활성화됩니다. 오늘도 즐거운 하루 보내세요!'
‘뭐라는 거야?’ 신 부장은 코웃음을 치고 퇴근을 했다. 그리고 그날 이후 캠 리포트는 잊혀 갔다. 1주일 뒤 경고 알림과 함께 PC에 새로운 기능이 활성화되기 전 까지는.
'삑-삑.'
경고음과 함께 브라우저, 아웃룩, 메신저 앱이 재부팅된다.
“뭐지? 귀찮게 하네.” 신 부장은 다시 메일을 확인한다. 첫 번째 회신을 작성한다.
- 네 확인했습니다
보내기 버튼을 누르자, 평소와 다름없이 메일이 전송된다. 그런데, 메신저에서 타 부서 대화 말미에 직원이 인사를 건네자 이상한 일이 벌어진다.
- [자동 응답] 안녕하세요! 좋은 하루 보내세요.
‘어? 난 답한 적이 없는데?’ 당황한 신 부장은 메일 ‘보낸 편지함’을 확인한다.
- [자동 응답] 네, 확인했습니다. 고생 많으셨어요.
‘뭐라고? 이건 내가 아니야! 내 말투가 아니라고!’
황급히 작업표시줄을 살펴보니, 낯선 아이콘 하나가 보인다. 클릭 하자 알림이 뜬다.
[매너 자동완성 기능이 활성화되었습니다.]
캠의 개입으로 신 부장은 본인의 의지와 관계없이 더 따뜻한 말을 건네게 되었다. 스스로는 만족하지 못하겠지만, 아마 상대는 더 편하게 묻고, 협조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과연, 자동완성으로 모든 상황이 원만한 걸까?
캠은 극단적인 예시다. 하지만 디지털 환경 속에서 대화가 점점 건조해지는 것도 사실이다. 그 원인 중 하나는, 여전한 권력 체계가 디지털 대화의 온도에도 반영된다는 것이다.
상위 직급자라도 부하직원의 사기를 북돋우는 일은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니다. 거창한 칭찬이 아니라도, 일상의 '수고했다'는 식의 가벼운 인정이 의욕에 도움을 준다.
물론 누군가는 반발할 것이다.
"왜 내가 굳이?"
"우리 회사는 수평적 조직문화야. 굳이 형식을 따를 필요 없어."
"배려는 강요할 수 없는 거야."
모두 일리가 있다. 하지만 ‘받았을 때 기분 좋은 메일’은, 결국 그것을 보낸 사람의 사소한 말습관에서 시작된다는 것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마침표 하나, 문장부호 하나, 짧은 인정의 한마디와 같은.
‘캠’은 가상의 존재다. 현실에서는 이런 시스템의 필요도, 소용도, 실제 구현될 일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캠이 전하는 메시지는 분명히 있다.
우리는 서로의 얼굴 보다 화면을 보며 대화하는 시간이 더 길다. 그러면서, 말 한마디의 무게도 시간을 두고 계량하고, 조절할 수 있게 됐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디지털 소통에 언어 패턴이 생겼다.
디지털 대화에서 직급이 높을수록 길고 정중한 메시지를 받고, 하위 직급일수록 짧고 건조한 답을 받는다. 디지털 시대에도 권력은 언어에 스며들어 있고, 상호 존중은 선택적이다. 소통의 형식이 권위를 강화하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연결을 만드는 방향으로 나아갈 순 없을까?
슬랙(Slack)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텍스트보다 가벼운, 그러나 충분히 의미 있는 커뮤니케이션 방식을 제안했다. 이모지(emoji) 기능을 강화하여, 대화 하나하나에 이모지 반응을 무제한으로 할 수 있게 한 것이다. 간단한 이모지로 동료의 말에 감성적인 반응을 할 수 있으며, 조직마다 특유의 이모지를 만들어 팀 문화에 녹일 수도 있다. 기능을 넘어 공감의 도구로 활용되고 있다.
줌(Zoom)이나 구글 미트(Meet)와 같은 영상통화 서비스도 '이모지 반응'과 '손들기' 기능을 통해 따뜻한 반응을 유도하며 있다. 디지털 소통의 발전 방향은 점점 더 "말을 많이 하는 사람"이 아니라 "함께 반응하는 사람"을 중심으로 움직이고 있다.
1971년, 미국의 컴퓨터 엔지니어 레이 톰린슨(Raymond Tomlinson) 이 이메일을 발명한 이후, 이는 가장 흔한 커뮤니케이션 수단이 되었다. 이후 오피스 소통 문화는 더 건전하고 합리적이며, 예의와 배려를 갖춘 따뜻한 문화를 추구하며 발전해왔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더 건조해져가는 느낌이다.
건조함의 실체는 '존중의 결여'다. 존중은 선택의 문제가 아님을 기억하는 것이, 하루 중 적지 않은 시간을 타인과 함께 머무는 사무실의 온도와 습도를 적정 수준으로 유지하는 대화 매너의 시작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