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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의 집

자발적 문화 활동이 남긴 것

by 케니스트리

<진짜 커피 코너> 에필로그입니다.




나는 마침표보다 느낌표보다 쉼표가 더 좋았다. 이야기가 끝나지 않고 계속될 것만 같은, 기대와 여운이 남는 ‘연속’의 느낌 때문이었다. 우리가 함께했던 시간들이 가장 생산적인 쉼(,)이었기를 바랐고, 다행히도 많은 동료들이 그렇게 기억하고 있었다.


콘텐츠를 만드는 '크리에이터스'를 향한 마음속 바람(望)은 2017년 초, 겨울의 찬 바람과 함께 찾아왔다. 찍고, 편집하고, 쓰는 일이 어쩌다 내 일이 되었고, 사람을 만나야 소재를 찾을 수 있었다. 다행히도 많은 동료들이 기꺼이 내미는 손을 잡아 주었다. 우리는 그게 '일'임에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함께 고민하고 만들어가는 과정에 깊이 빠져들었다. 조직 안에서는 감성적이고, 경계가 뚜렷하지 않은 그 일들을 곱게 보지 않는 시선도 있었다. 하지만 나의 작업에 공감하고 응원하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갔고, 나는 용기를 내어 계속해서 결과물을 만들어 나갔다. 시간과 의미를 맞바꿔갔다.


그 과정에서 알게 된 사실이 있다. 회사에는 재능과 열정이 넘치는, 반짝이는 사람이 참 많다는 것. 그림을 그리는 사람, 이야기를 쓰는 사람, 음악을 잘하는 사람, 여행을 사랑하는 사람, 열정을 불태우는 사람, 그리고, 사람의 따뜻함을 믿는 사람. 이토록 다채로운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에서 우리는 그동안 감정을 숨긴 채 형식적인 인사만 하며 지내왔었다. 일단 모여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크게 호와 불호 없이 다 가능할 것 같았다. 그렇게 탄생한 것이 <리얼 커피코너>였다. 동료들과 회사 내 모든 커피를 마시고 평가하면서, 회사 안팎의 문화 이야기를 전했다.


초기 구성원들과 함께 더 많은 창작자들이 모였고, 우리는 단순한 취미 활동을 넘어 회사 브랜드를 알리는 역할까지 하게 되었다. 하지만 비공식 동호회였기에 예산은 우리의 주머니에서 나왔고, 장비는 비공식적으로 구했고, 홍보는 사회관계망을 통해 은근히 이루어졌다. 좋은 소식은 사내 동호회 개편이 진행 중이라는 것이었다. 우리 활동을 지지하는 동료들도 적지 않았다. 인원을 모집하고 서명을 받고, 활동 계획서를 작성했다. 하지만 승인 과정은 쉽지 않았다. 기존의 문화 동호회와 무엇이 다르냐는 질문에 답해야 했다.


우리는 달랐다. 특정 주제가 아닌, 창작 자체를 목적으로 하였다. 그리고 창작은 단순한 소비가 아니라 만드는 과정에서 즐거움을 주어야 했다. 우리는 다양한 방식으로 창작 활동을 기획하며 영상, 글, 디자인 등 여러 가지 예술적 경험을 공유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고자 했다.


입소문이 퍼져 초기 가입 인원은 40명에 달했다. 이후 ‘더 크리에이터스’은 공식 사내 동호회로 승인되었고, 활동을 위한 3개월 한정 예산도 배정받았다. 2017년 6월, 첫 모임을 시작으로 도심 속 익선동 탐방, 동료들의 재능 공유가 이어졌다. 우리는 그림을 그리고, 여행을 떠나고, 이야기를 만들었다. 그리고 그 모든 순간을 사진과 글, 영상으로 남겼다. 경험을 기록하는 것이 본질이자 목적이었다. 각기 다른 일을 하고, 다양한 재능과 호기심을 지닌 우리들. 현재에 안주하지 않으려 했던 우리들. 각자의 도구는 달랐다. 나에게는 펜과 카메라가 있었다.


같은 해 가을, 나는 회사를 떠나며 더는 그 일을 하지 않게 되었다. 낯선 환경에서 펜은 길을 잃었고, 카메라는 깊은 잠에 빠졌다. 일상에 묻혀 지내던 어느 날, 반가운 이의 연말 모임 초대 연락이 왔다. 이유를 알 수 없는 설렘이 다시금 마음속에서 피어올랐다. 그간 묵혀두었던 기억을 꺼내어 잇고 붙여보며, 하마터면 너무 현실에만 몰입할 뻔했다고 깨달았다.


연말 모임에서 우리는 함께 올해의 마무리 영상을 감상했다. 불과 몇 주 사이였지만, 나는 손끝으로 느껴지는 창작의 즐거움을 잊고 살았구나 싶었다. 무언가를 만드는 과정이 다시 이렇게 즐거울 줄이야. 야근 대신 소파에 몸을 파묻던 일상이 익숙해진 줄 알았는데, 그 기억 속으로 돌아가니 손은 힘들어도 귀는 즐겁고 마음은 뿌듯함으로 가득 찼다. 그리고 나는 다시 카메라를 들었다. 마치 농부가 농담을 하듯, 나도 원래의 나로 돌아온 듯한 기분이었다.


그리고 그 해 연말, 옛 동료들을 다시 만났다. 우리는 여전히 행복했고, 회사가 마련한 공간에서 오랜만에 마음껏 웃으며 밤을 보냈다. 대형 마트에서 준비한 음식과 음료 덕분에 배도 부르고 마음도 따뜻했다.


그날 찍은 사진들을 보정하며, 한 명 한 명의 얼굴과 표정을 다시 살펴보았다. 설렘, 따스함, 당황함, 즐거움. 기억을 선명하게 남겨주는 영상과 사진이 있기에, 나는 다시 그때로 돌아갔다. 추억 속 여행과, 이 순간의 동반자들에게로.


일을 마무리하고 회사를 떠날 때, 어느 동료가 전한 인사말이 떠오른다.


“러시아어로 헤어질 때 하는 말이 ‘До свиданья (다 스비다니아)’인데, 이게 단순한 ‘안녕’이 아니라 ‘다시 만날 때까지’라는 뜻이라고 하네요.”


문화란 그런 것이 아닐까?


곁에 있던 동료, 책상 위 포스트잇, 노트북과 의자, 사무실 구석에서 자라다 시들어버린 토마토 화분까지. 모든 흔적이 그 공간에서 사라지고, 한참 뒤 잊힌다 해도, 언젠가 문득 돌아보면 입가에 미소 번지게 하는 그런 기억.


상상 속에 지어진, 추억의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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