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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리안 Mar 20. 2023

사춘기 중2 아들과 캠핑을 갑니다

작년까지 한 달에 두 번은 가던 캠핑이었는데, 큰애가 중2가 되면서부터 약속이나 한 듯이 딱 끊겼다. 3달 동안 카라반은 강원도에 방치되어 있었고, 우리 네 가족은 서울집에서 말 그대로 '지지고 볶으며' 겨울 방학을 보냈다. 아들은 워낙 바깥 활동을 싫어하는 찐 I type데, 중2를 준비한다고 이런저런 과외를 붙이다 보니 숙제가 쌓이고 쌓여서 매일 방에만 틀여 박혀 지다. '이참에 잡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의기투합한 부부는 퇴근만 하면 아이 방으로 직행했다. 숙제 진도 검사를 한 후 일장 훈계를 늘여놓으면, 사춘기에 돌입한 아이는 아이대로 목소리를 높여 항쟁하니, 정말이지 바람 잘 날 없던 겨울이었다.


그런 날들이 지나고 봄이 왔고, 새 학기 상담주간이라 담임선생님을 만나 뵈러 갔다. 학교에서도 느릿느릿 행동하면 어쩌지, 또래에 비해서 학습 역량이 떨어지면 어쩌, 하고 싶다는 것이 없는 아이인데, 진로 상담은 잘했을까 등등 걱정에 걱정을 달고 교실에 들어갔는데, 담임 선생님의 답변은 정말 의외였다. 너무도 해맑고 예의 바르고, 자기 주관이 또렷하고, 공부에 대한 의지도 강해서 별 걱정이 안 되신다는.. 우리 아들의 또 다른 면을 우리가 못 보는 것일까. 아니면 아들은 하나인데 우리가 걱정요정에 씌어서 너무도 엄격한 잣대를 들이댄 것일까.


아무튼, 이를 계기로 길었던 모자 갈등에도 Pause를 누를 수 있었다. 아들에게는 숙제에 대한 자율권을 주었고, 우리 가족은 드디어 90여 일 만에 주말 캠핑을 나다. 마침 꽃도 피고 날도 따듯한 봄이니!



사람 마음이 참 간사하고 우습다. 같은 곳을 20번 넘게 오다 보니 사실 조금 식상해졌던 우리 캠핑장이 매마르고 싸늘했던 겨울 동안 얼마나 보고 싶던지. 늘 내려먹는 아침 커피와 크루아상이 이번에는 호텔 조식 부럽지 않게 좋고 맛있었다. 원하면 바로 떠나올 수 있는, 집에서 3시간 남짓 걸리지 않는, 이런 시간과 장소가 존재했는데, 미련한 중2 부모가 스스로를 그리 옭아맸구나. 고2 때는 부디 이 깨달음을 잊지 않아야 하는데 말이다.



잦은 말싸움으로 어색해진 사이 풀기에는 운동만큼 좋은 것도 없지! 강원도 여행이야 너무 자주 와서 이제는 새로운 것을 잘 안 찾는 편인데, 이번 캠핑에서는 '굳이' 강릉까지 내려가서 빙상장을 찾았다. 스키는 탈 줄을 모르고, 눈썰매 타기엔 너무 커버린 가족 구성원으로 할 수 있는 액티비티를 찾고 찾은 고뇌의 결과물이랄까.


처음엔 하기 싫다고 궁시렁 대던 아이들도 한 두 바퀴 엉금엉금 걸은 후로는 제법 스케이트 폼을 잡고 기 시작했다. 작년에 인라인 스케이트 배운 기억이 아주 사라지지는 않은 모양이다. 왕년에 피겨를 배웠다는 와이프가 오히려 쩔쩔맸는데, 그럴 때마다 큰 아이가 달려와 살뜰하게 엄마를 챙겼다. 넷 중 어느 한 명도 멋지게 타지는 못했지만, 모처럼 넷이 즐겁게 논 것 같으니 좋았다. 2시간을 타고나니 땀에 푹 젖어서, 서로 깔깔 거리며 카라반으로 돌아왔다. 


사실 저녁은 강릉에 간 김에 예전에 즐겨 찾던 장치찜을 먹고 오려했는데, 굳이 아이들이 카라반에서 먹자고 하여, 오는 도중 양양시장에서 장을 다. 저녁인데도 날씨가 춥지 않아 밖에서 고기를 구워 먹기에 적당했다. 나는 불을 피우고, 와이프랑 아이들은 야채를 손질했다. 뜨겁게 달군 그릴에 한점 한점 정성을 다해 구웠고, 구운 마늘, 버섯, 양파와 곁들여 '천천히, 느긋하게' 먹었다. 술 한잔 하지 않았지만 즐거운 자리였고, 모처럼 이야기를 많이 했다. 역시 고기는 한우라는 초3 막내 얘기에 웃기도 하고, BBQ에는 소냐 돼지냐는 답 없는 논쟁도 한참 하였다. 부끄럽지만 지난 90일간 우리 집 저녁 식사 때는 구경할 수 없는 풍경이었다. 밥 먹고 난 뒤의 일정이 없으니 잔소리 할 필요없는 우리도, 아이들도 여유가 넘쳐났다


저녁엔 카라반에 손님이 찾아왔다. 지난해부터 우리가 오면 꼭 찾아오는 냥이 두 마리. 와이프가 캣푸드를 놓은 게 있어서, 얼른 상을 차려줬다. 지난번엔 막내 녀석이 반갑다고 른 소리에  줄행랑을 쳤었는데, 그새 담력 늘었는지, 도망가지 않고 한 그릇 싹 비우고서야 갔다. 어디 사는지는 모르겠지만, 또 오렴. 다음엔 다른 맛으로 준비해 놓을게.


밤에는 아이들이 준비해 온 4인 보드게임 한판 했다. 낮에 탄 스케이트 때문에 노곤해진 40대 부부는 꾸벅꾸벅 조는데, 간만의 캠핑에 신이 난 녀석들은 잘 생각을 안 한다. 와이프가 결국 먼저 잠들었는데, 큰 아들이 잠든 엄마한테 가서 잘 자라며 뽀뽀를 했다! 지난 10년간 해달라고 해달라고 해도 손사래 도망치던 녀석인데? 중2 사춘기가 이렇게도 오나? 방문 걸어 잠그고  동굴로 걸어가는 애들 이야기는 많이 들었어도, 안 하던 꽁냥꽁냥을 마구 시전 하는 케이스는 처음인데.. 사춘기도 역변이 있나.. 되지도 않는 해석을 붙여가며 상황을 파악하려다가 나도 잠들어 버렸다. 


돌아오는 날에는 '정말 아무것도 하지 않고 볕만 쪼이다 오자'가 계획이었는데, 날씨가 너무 따듯하고 좋았다. 내 경험상 양양에 왔는데 바람이 안 불면, 바닷가를 나가야 한다. 일기 예보 다 확인하고 와도 똥바람이 불어대는 게 일상인 곳이니까.


캠핑장에서 30분만 차를 타고 나가면 도착하는, 죽도 해변. 이곳엔 내 경험상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감탄을 금치 못하는 수제 버거집이 있다. 70대 부모님부터, 30대 후배들, 그리고 10대 우리 아이들까지 인정한 곳이니 감히 남녀노소라 말할 수 있다. 10시까지 느긋하게 늦잠을 자고 일어나서, 더벅머리에 꼬질꼬질한 옷차림으로, 네 가족이 그렇게 버거를 사들고 해변가에 나가 앉았다. 지난달 제주도 산방산 아래에서 찾아낸 수제 버거집의 그 끔찍했던 맛을 이야깃거리 삼아, 양양버거 예찬론을 떠들어 대면서, 찰랑찰랑 기분 좋은 파도 소리 들으며, 완벽하다 말할 수 있는, 그런 브런치였다.




아이가 중2가 되면 놀러도 못 나간다는 말을 너무도 많이 들어왔어서, 카라반을 이제는 팔아야 한다는 생각을 많이 했었다. 아직 중2일뿐인데, 한 달에 한 번, 주말을 온전히 놀 수 없는 게 정상일까? 우리가 지레 겁을 먹은 거겠지.

엄마랑 같이 있어서 좋았다는 수줍은 고백을 받은 아내가 4월~5월 캠핑 일정을 다 잡아버렸다. 중2의 사춘기는 예측불허하여 무섭기는 하지만, 지금처럼 꽁냥 버전일 때 부지런히 다녀야지. 언제 녀석이 다크사이드로 변신할지 모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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