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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트로츠뎀 Aug 26. 2019

박정희,
'마지막 선거'를 약속하지만

1971년 4월 27일 실시_제7대 대통령 선거

1971년 4월 27일 치러진 제7대 대통령선거에서 '40대 기수론'을 내세우며 돌풍을 일으킨 젊은 정치신인 김대중 후보에게 기세를 빼앗긴 박정희는 마지막 약속으로 자신은 마지막 한 번만 선거에 나서겠다고 이후에는 후계자를 양성하겠다고 말하며 지지를 호소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이 선거가 끝나고 '다시는 선거에 나서지 않겠다는' 그 약속을 지킵니다. 선거 자체를 없애 버리는 최악의 방식으로! 국민들이 직접 자기 손으로 대통령을 뽑는 대통령 직선제를 폐지하고 국민의 기본권과 참정권을 제한하는 초헌법적인 유신 체체의 수립을 통해 '죽을 때'까지 영구 집권을 꿈꾸며 말입니다. 결국, 박정희는 '죽을 때'까지 권좌에 올랐습니다.

숙명의 라이벌 박정희와 김대중

이승만 정권이 그랬듯이, 박정희 정권도 집권 6년 만에 영구집권을 위한 개헌선을 확보하기 위해 1967년 치러진 제7대 국회의원선거에서 부정선거를 자행했습니다. 그리고 1969년 9월 14일 새벽 2시경 국회 별관에서 여당 의원들만 표결에 참가하여 박정희 3선 도전을 위한 헌법개정안을 통과시킵니다.  야당 의원들은 배제한 채 무리한 방법으로 개헌안을 국회에서 통과시킨 후,  1969년 10월 21일 국민투표를 통해  이 3선 개헌안을 확정합니다. 이후 새로 마련된 헌법에 따라 세 번째로 대통령 선거에 나설 수 있게 된 박정희는 1971년 4월 27일 실시된 제7대 대통령선거에서 젊은 김대중 후보와 싸워 힘겹게 승리했습니다. 그리고 제1공화국 대통령 이승만이 그랬듯이 더 이상 선거에 의해서는 자신이 계속해서 집권할 수 없음을 뼈저리게 깨닫습니다.

투표소 전경

제7대 대통령 선거가 치러지기 직전인 1970년 9월 제1야당인 신민당 후보 지명 대회에서 예상을 깨고 김대중이 신민당 후보로 선출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제7대 대통령 선거는 3선에 도전하는 박정희 대통령과 장기집권 저지와 정권교체를 내세운 신민당 김대중 후보가 치열한 양자대결을 벌이게 됩니다. 박정희 정권이 장기집권과 부정부패에 국민들이 등을 돌리고, 혁신적인 정책과 공약을 표방한 젊은 김대중 후보의 선거유세가 인기를 얻어 선거 판세는 예측할 수 없는 초박빙이었습니다. "논도 갈고 밭도 갈고 대통령도 갈아보자"는 김대중 후보의 선거구호는 엄청난 인기를 끌었고 1971년 김대중 후보의 장충단 유세에는 엄청난 인파가 몰려 30만 명 이상이 모였는데 이는 우리나라 선거역사상 가장 많은 사람이 모인 선거유세였습니다.

투표함와 투표용지 보관함

그러나, 선거 전날 TV를 이용해 박정희는 "이번이 정말 마지막이다. 다음번엔 절대 선거에 나오지 않겠다."라고 호소하며 부동층 유권자들의 마음을 자극했고, 지역감정이 노골화된 선거 결과 경상도 지역의 압도적 몰표로 다시 대통령에 당선됩니다.  박정희는 인구도 많고 높은 투표율을 보인 경상북도에서 압도적인 지지를 받아 6,342,828표를 획득하여 5,395,900표를 획득한 김대중 후보를 946,928표 차이로 누르고 당선되었습니다. 그러나 두 후보 간 표차는 겨우 62만 여표였습니다.

선거 표어와 홍보포스터

제7대 대통령선거 결과를 보며 지역감정에 기반한 지역 몰표와 각종 관권선거, 부정선거에도 불구하고 젊은 김대중 후보에게 어렵게 승리한 박정희는 이제 더 이상 선거로는 재집권할 수 없음을 깨닫고 초헌법적 조치인 유신체제의 수립을 준비하게 됩니다. 대통령선거에 이어 치러진 제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야당인 신민당이 개헌저지선을 확보하자 박정희 정권의 불안감은 더욱 커져만 갔습니다.

   

김대중 후보 낙선사례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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