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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트로츠뎀 Aug 26. 2019

더 이상 타락할 수 없다

1967년 6월 8일 실시_제7대 국회의원 선거

1967년 5월 제6대 대통령선거가 실시된 후 1달 정도가 지난 6월 8일 실시된 제7대 국회의원선거는 이승만의 3.15 부정선거 이래 최악의 타락한 선거라는 평가가 많습니다. 이때부터 우리나라 선거가 이른바 '돈 선거'로 불리기 시작했습니다. 선거 직전에 있었던 한국비료의 사카린 밀수 사건은  1966년 5월 삼성 계열의 한국비료가 밀수한 사카린이 부산세관에 적발되어 문제가 되었는데 이 사건이 정경유착으로 확대되자 삼성은 한국비료 주식 51%를 국가에 헌납하면서 사태를 가까스로 수습할 수 있었습니다. 이 사건의 배경에도 정치권의 정치자금을 조달하려는 시도가 숨어있었으며, 당시 국내에 도입된 많은 해외차관이 정치권의 정치자금으로 유용, 활용되었던 것입니다.


40대기수론의 선봉 김대중 후보와 김영삼 후보 선거벽보



이때부터 우리나라 선거에서 금품살포와 선거 관광이 본격적으로 등장하게 됩니다. 후보자들의 관광버스를 이용해 전국 방방곡곡의 유원지에 관광을 시켜주는 선거 관광이 선거철마다 벌어졌습니다. 이전의 부정선거가 고무신과 막걸리로 대표되었다면 제7대 국회의원선거부터는 선심관광과 돈선거를 통한 매표행위가 자행되었습니다.


1960년 4.19 민주혁명으로 금기시되었던 공무원의 선거개입이 다시 등장한 것도 이때이며, 정부여당과 공무원들의 선심공약이 남발하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입니다. 이런 관권선거가 자행될 수 있었던 데에는 정부여당의 법 개정 시도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대통령과 국무총리, 장관과 차관들이 특정 후보를 지지하는 선거운동을 할 수 있도록 박정희 정권은 선거법 시행령을 개정했습니다. 시행령 개정으로 대통령, 국무위원, 장차관들이 지방 출장을 다니면서 특정 후보를 위한 지지연설이 가능해졌는데, 중앙선관위는 선거법 시행령 개정을 통한 정무직 공무원들의 선거개입은 부당하며, 별정직 공무원을 포함한 모든 공무원은 선거운동이 불가하다는 해석을 내려 정부와 정면충돌하기도 했습니다.

선거표어와 선거홍보 포스터



논란이 일자 박정희는 국무위원들에게 선거유세를 중단하도록 지시했지만 '지방시찰'을 명목으로 지방을 순회하면서 공약을 발표하기를 계속했고, 국무위원들도 선심공약 남발을 위한 '지방순회'를 이어갔습니다. 이렇듯 제7대 국회의원 선거는 이승만 정권하에서 자행된 공무원들의 선거개입과 관권선거의 망령이 되살아난 최악의 '망국적 선거'로 기록되었습니다. 따라서 선거 이후 후유증도 심각했습니다.

선거 선전탑


제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의원 정수는 지역구 131명과 전국구 44명 등 총 175명으로 제6대 국회의원선거와 동일했습니다.  이번 선거에서 지역구에서는 702명이 입후보하여 5.4 대 1의 경쟁률을 보였고, 민주공화당과 신민당 이외에 대중당·민중당·자민당 등 모두 11개 정당이 참여하였습니다. 선거 결과 민주공화당은 의원정수의 73.7%에 해당하는 129석(지역구 102명, 전국구 27명)을 얻어 개헌선이 117석보다 12석이나 많은 절대 다수의석을 차지하였고, 신민당은 불과 45석(지역구 28명, 전국구 17명)을 차지하였습니다. 특이한 현상은 서울에서는 14개 지역구 의석 중 13개를 야당인 신민당이 확보하는 등 공화당은 여전히 농촌지역에서 압승을 거둔 반면에, 신민당은 대도시에서 크게 승리하여 ‘여촌야도 현상’을 보였다는 것입니다.

투표소 전경

심각한 부정선거의 양상을 드러낸 이번 선거로 선거 직후부터 학생들과 야당의 부정선거 규탄 시위와 부정선거 폭로가 이어졌습니다. 결국, 부정선거로 당선된 공화당 당선자 7명이 제명되고, 고위 공직자들의 일괄사표를 제출하고 여러 국회의원이 사퇴했지만 부정선거로 인한 후유증은 가라앉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중앙정보부는 독일 유학생들을 간접으로 몰아 국내로 압송하는 이른바 '동백림 사건', 한일 협정 체결에 반대하는 시위를 조직했던 서울대 '민족주의 비교연구회' 사건 등 공안사건을 확대 조작하여 부정 선거로 인한 후유증을 무마하려고 시도했습니다. 결국 이번 선거로 개헌선을 확보한 박정희는 이른바 3선 개헌을 통해 3번째 집권 시도에 나서게 되고 뒤이어 종신집권을 위한 유신체제의 서막을 알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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