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7년 5월 3일 치러진 제6대 대통령선거는 큰 특징이 없는 선거였습니다. 심지어 역대 대통령선거 중에서 가장 재미없는 선거였다는 평도 있습니다. 제6대 대통령선거가 이렇듯 별 특징이 없는 선거가 된 이유는 무엇보다 1965년 6월 22일 체결된 문제의 '한일 청구권 협정'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정부 여당 쪽에서는 그동안 추진한 경제 개발 계획이 조금씩 성과를 내기 시작하면서 국민들의 살림살이가 다소 개선되었습니다. 또한 '한일 청구권 협정'을 통해 들어온 일본의 차관과 구상권 자금 및 미국, 서독 등에서 유입된 각종 해외 차관으로 우리 경제를 발전킬 투자자금이 많이 유입되어 정부 여당의 든든한 버팀목 역할을 했습니다.
1965년 6월 22일, 한일협정 조인식
이에 반해 야당은 한일협정에 대한 대응 방안을 놓고 심각하게 분열되어 제 역할을 다하지 못했습니다. 중앙정보부의 야당 와해 공작은 박정희 정권 내내 지속되었고, 야당은 한일협정 반대 투쟁에 적극적인 윤보선의 민정당과 한일협정 비준 투쟁에 미온적인 박순천의 민주당으로 갈라져 있다가 1965년 한일 청구권 협정이 체결되기 직전에 양당이 민중당으로 통합되었습니다. 제6대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민중당은 고려대 총장 유진오를 영입했으나 인지도가 낮은 유진오로는 역부족이었고 결국 윤보선이 대통령 후보로 나서고 유진오는 새로 생긴 신민당 당수를 맡기로 역할 분담이 이루어졌습니다. 정부 여당은 당연히 박정희 대통령이 '황소같이 일하겠다'며 대통령 후보로 나섰습니다.
제6대 대통령선거 홍보포스터와 중선위 담화문
선거 결과 박정희는 5,688,666표를, 윤보선은 4,526,541표를 얻어 116만 표 차이로 박정희가 제6대 대통령에 당선되었지만 표 차이는 그리 크지 않았습니다. 경제 발전이 가시적인 성과를 보였고 야당은 사분오열 분열되어있음을 고려할 때 이는 예상 밖의 결과였습니다. 단지 선거 결과가 이전의 여촌야도 현상이라기보다 '여동야서'의 동서 투표 현상이 나타났습니다. 동쪽인 강원도, 경상도, 충북에서는 박정희가 이기고, 서쪽인 서울, 경기, 충남, 전라에서는 윤보선이 이기는 '여동야서' 투표 현상이 나타났던 것입니다. 특히 박정희는 경상도에서 압도적인 몰표를 획득함으로써 당선될 수 있었습니다.
베트남 파병 병사 부재자 투표소와 6대 대선 개표소 풍경
선거 홍보 표어
야권 분열로 신민당 윤보선, 대중당 서민호, 한국독립당 전진한, 민중당 김준연, 통한당 오재영, 정의당 이세진 등 6명의 야당 후보가 입후보하였지만 실제 경쟁은 민주공화당 박정희와 신민당 윤보선의 재대결로 압축되었습니다. 선거 결과 민주공화당 박정희 후보는 유효투표 총수의 51.4%를, 윤보선 후보는 40.9%를 득표하였던 것입니다. 선거제도 측면에서 보면, 선거 실시 전 1966년 12월 14일 개정된 대통령 선거법에 따라 국외 체류 부재자에 대한 우편투표제도가 최초로 도입된 것이 특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