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이 오면
한밤의 꿈은 아니리 오랜 고통 다한 후에
내 형제 빛나는 두 눈에 뜨거운 눈물들
한 줄기 강물로 흘러 고된 땀방울 함께 흘러
드넓은 평화의 바다에 정의의 물결 넘치는 꿈
그날이 오면 그날이 오면
내 형제 그리운 얼굴들 그 아픈 추억도
아 짧았던 내 젊음도 헛된 꿈이 아니었으리
그날이 오면 그날이 오면
그날이 오면 그날이 오면
내 형제 그리운 얼굴들 그 아픈 추억도
아 피맺힌 그 기다림도 헛된 꿈이 아니었으리
그날이 오면 그날이 오면
- 작사, 작곡 문승현
1987년 12월 16일 실시된 제13대 대통령 선거는 전두환 신군부 세력의 독재에 온 국민이 항거한 87년 6월 민주 항쟁의 결과로 다시 직선제로 치러진 선거였습니다. 6.29 선언으로 실시된 1987년 10월 제9차 개헌에 따라 16년 만에 대통령 직선제가 부활되었습니다. 민주화 세력은 선거를 통해 박정희의 유신 독재 이후 전두환으로 이어진 군부 독재를 끝내고 새로운 민주정부를 수립할 기회를 맞이했습니다. 그러나 김대중과 김영삼의 후보 단일화가 실패하고 이에 따른 민주화 세력의 분열로 선거 결과는 어의없게도 정권교체가 아니라 신군부의 후계자 노태우 후보의 당선으로 귀결되었습니다.
영화 <1987년>에서 자세히 묘사하고 있듯이 1987년은 우리 현대사에서 가장 역동적이고 극적인 순간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시작에는 1985년 제12대 국회의원 선거가 있었습니다. 1985년 치러진 제1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선명 야당'의 기치를 내건 신한민주당이 제1야당으로 부상하고 대통령 직선제를 골자로 하는 개헌 서명운동을 시작하면서 87년 민주화 운동의 서막이 시작됩니다. 1986년 2월에는 <민주화추진위원회>(민추협)가 결성되어 재야에서도 대통령 직선제로의 개헌 요구가 점차 증가하고 있었고, 대학가에서는 1985년 5월 23일 서울 미문화원 점거 농성과 1986년 10월 28일 건대 농성을 통해 80년 광주 민주화 운동에서 미국의 역할에 의문을 제기하며 책임을 물었고, 전두환 독재에 정면으로 저항하기 시작했습니다. 전두환 정권은 건대항쟁에 참가한 대학생들을 무자비하게 진압하여 1,525명을 연행하고 1,288명을 구속하는 만행을 저질렀습니다.
영화 <1987년 포스터>
1986년 6월에는 부천경찰서 경찰관 문귀동이 연행된 학생운동가 권인숙에게 성고문을 가한 이른바 <부천경찰서 성고문 사건>이 발생해 부패한 공권력의 민낯을 드러냈습니다. 1987년 1월에는 서울대생 언어학과 3학년생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발생해 87년 민주항쟁의 도화선이 되었습니다. 학생운동 세력을 대거 검거하여 공안사건으로 확대 조작하고 이를 민주화운동 세력 탄압의 기회로 이용하려던 경찰은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24살 대학생 박종철군을 고문하여 사망케 한 뒤 이를 사고사로 위장하여 은폐하려 시도했습니다. 그러나 사건 현장에서 시신을 살펴본 중앙대 부속병원 의사 오연상의 진술과 중앙일보 신성호 기자, 동아일보 홍길동 기자의 폭로에 의해 사고가 아니라 물고문에 의한 사망으로 기사화된다. 경찰은 수사 중에 발생한 사고로 사건을 은폐하여 수사관 2명의 구속으로 사태를 종결지으려 했으나 같은 교도소에 수감 중이던 동아일보 해직기자 이부영이 경찰의 은폐 조작과 사건 축소 시도를 천주교 정의구현 사제단에 알림으로써 사건의 진상이 폭로됩니다.
박종철 군 고문 사망 사건을 보도한 신문
박종철 고문 사망 사건으로 정권의 도덕성은 땅에 떨어지고 민주화의 요구가 거세지자 전두환 정권은 87년 4일 13일 호헌선언으로 대통령 직선제 개헌 논의를 저지하려 시도했습니다. 그러나 국민들은 전두환 정권의 호헌조치를 독재정권 연장 기도로 파악했고 대통령 직선제를 위한 개헌과 민주화 항쟁을 이어나갔습니다. 87년 5월 27일 국본 민주헌법 쟁취 국민운동본부가 결성되어 국민들의 직선제 개헌 열망을 담아내고 대학생들의 민주화 요구가 더욱 거세지던 와중에 6월 9일 서울 연세대학교에서 있었던 민주화 시위에서 이한열 군이 시위 진압부대가 쏜 최루탄을 머리에 직격으로 맞고 사망하는 일이 발생합니다. 6월 10일 서울에서는 명동성당 일대를 중심으로 학생들과 시민들이 민주화 시위에 대거 가담하여 6.10. 항쟁이 시작되었습니다. 6.10. 항쟁을 시작으로 전국적으로 민주화 시위가 확대되고 종교인과 일반 직장인들까지 시위에 가담하면서 시위 진압을 위해 동원된 전경과 경찰이 무장해제당하기도 하는 등 공권력은 통제력을 상실했습니다.
6.10. 민주항쟁의 도화선이 된 이한열 군 사망 사건
결국, 6월 29일 전두환 정권의 후계자였던 노태우는 대통령 직선제 개헌, 김대중 사면복권, 시국사범 석방 등 민주화 진영의 요구를 반영한 <6.29 특별선언>을 발표하여 정국을 수습하려 시도합니다. 10월 12일 국회에서 개헌안이 통과되고 10월 27일 제6차 국민투표를 통해 대통령 직선제 도입, 대통령 임기 5년 단임, 헌법재판소 신설 등을 골자로 하는 개헌안이 확정되어 16년 만에 다시 대통령 직선제 선거가 실시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직선제로 치러진 제13대 대통령 선거에서 민주화 세력은 후보 단일화를 이루지 못하고 분열되어 신군부의 정권 연장 시도를 저지하지 못했습니다. 김대중 평화민주당 후보를 지지하는 비판적 지지세력과 김영삼 통일민주당 후보를 지지하는 진영으로 민주화 세력은 갈라졌고, 이에 어부지리로 전두환의 후계자 노태우 후보가 36.6%의 저조한 득표율로 제13대 대통령에 당선되기에 이릅니다. 당시 우리나라 총인구는 41,338,959명에, 선거인수는 25,873,624명이었는데 투표율은 민주화를 열기와 관심을 반영해 89.2%로 매우 높았습니다.
그러나 제13대 대통령 선거는 87년 민주화 항생의 결과로 획득한 선거를 통한 정권교체의 소중한 기회를 민주진영의 분열로 상실했으며, 김대중, 김영삼, 김종필, 노태우 4명의 후보자는 각자의 출신지역을 지지기반으로 하는 선거전략을 활용함으로써 지역감정이 심하게 표출된 선거였습니다. 선거 결과 김영삼과 김대중 양김의 분열과 노태우 군부세력의 재집권이라는 참담한 결과 앞에서 국민들의 정치와 민주주의에 대한 환멸과 실망은 매우 컸습니다.
13대 대통령선거 투표용지
결국, 1987년13대 대통령 선거는 87년 민주항쟁으로 민주화 세력이 스스로의 힘으로 직선제 개헌을 쟁취해냄으로써 가능해진 선거였지만, 민주화 세력이 후보 단일화에 실패함으로써 선거를 통해 평화적으로 군부독재를 종식시키고 정권을 교체할 기회를 스스로 상실하고 말았습니다. 비록 정권교체에는 실패했지만 1987년 헌법에 기초하여 수립된 제6공화국은 이후 현재까지 우리나라의 권력구조와 헌법질서, 기본권 구조의 근간이 되고 있다는 점에서 1987년 제13대 대통령 선거 이후 수립된 정치제제를 이른바 '87년 체제'라고 합니다.
87년 6.10 민주항쟁
87년 민주화항쟁을 다룬 영화 <198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