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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트로츠뎀 Aug 05. 2020

정치적 환멸 속에서
망국적 지역주의 격화되다

1988년 4월 26일 실시_ 제13대 국회의원 선거

선거란 누굴 뽑기 위해서가 아니라,누구를 뽑지 않기 위해투표하는 것이다.
- 플랭클린 P.아담스  



강화된 지역주의 투표 성향

1988년 4월 26일 실시된 제13대 국회의원선거도 불과 4달 전에 치러진 대선에서처럼 극심한 지역주의 성향이 표출됩니다. 13대 총선은 1987년 10월 29일 공포된 제6공화국 헌법에 따라 제12대 국회의원의 당초 임기(1985. 4. 11~1989. 4. 10)를 다 채우지 않고 앞 당겨 실시되었습니다. 17년 만에 다시 소선거구제로 치러진 13대 총선은 13대 대통령 선거의 2차전 성격을 띱니다.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한 노태우는 민주정의당의 총재 자격으로, 패배한 3김(김영삼, 김대중, 김종필)은 각각 자신들이 세운 각자의 정당을 지휘하면서 지역구 또는 전국구 후보로 선거에 참여하였던 것입니다.

13대 총선 의석분포와 선거지도


13대 총선에 출마한 노무현, 이해찬, 김종인 후보


여소야대 국회의 탄생

제13대 대통령 선거에 이어 ‘1노 3김’의 제2차 대결이 된 13대 총선 선거전은 초반부터 각자의 지역 연고에 기반을 둔  4당 대결구도를 보였습니다.  대구, 경북과 강원을 주요 기반으로 한 노태우의 민주정의당, 경남과 부산지역의 지지를 받은 김영삼의 통일민주당, 호남권에 기반을 둔 김대중의 평화민주당, 그리고 충청권 김종필의 신민주공화당의 대립구도는 망국적 지역주의를 지난번 대선보다 더욱 격화시켰습니다. 선거 결과 민주정의당은 125석을 차지하여 제1당이 되었지만 과반의석 획득에는 실패했고, 야당인 평화민주당이 호남권의 압도적 지지로 70석을 차지하여 제1야당이 되었습니다. 김영삼의  통일민주당은 59석을 획득하는데 그쳤고, 김종필의 신민주공화당도 35석을 차지하여 원내교섭단체를 구성하면서 의정사상 최초로 '여소야대' 정국이 형성되었습니다. 하지만 김대중과 라이벌 관계에 있던 김영삼은 자존심에 상처를 입었고 이는 나중에 민정당, 민주당, 공화당 3당 합당의 계기가 됩니다.


6 공화국의 첫 번째 총선


13대 총선에서 투표하는 서울시장과 당시 투표함



13대 총선이 치러진 해인 1988년은 무엇보다 이른바 '88 올림픽'으로 명명된 제24회 국제 올림픽 경기대회 개최가 주목할만한 행사였습니다. 노태우 정부는 1988년 7월 북한이 미, 일과 관계를 개선하는 데 협조하겠다는 7.7 선언을 발표하고, 유고슬라비아나 헝가리 등 동유럽 공산주의 국가들과 관계 개선에 나서는 이른바 '북방정책'을 천명합니다. 그 결과 88년 9월 24일 개최된 88 올림픽에는 자본주의 진영뿐만 아니라 소련 등 공산진영 국가도  대거 참가하여 총 160개국이 참가한 성대한 대회가 되었고, 우리나라는 이 대회에서 종합순위 4위를 기록했습니다.


88올림픽으로 유명해진 굴렁쇠 소년과 마스코트 호돌이



5공 청문회의 열기

제13대 총선 결과 성립된 '여소야대' 국회는 개정 헌법에 따라 국정조사권을 발동해 1988년 11월부터 5공 청문회를 개최합니다. TV로 처음 생중계된 국회 청문회는 국민적 관심이 컸고 노무현 의원 등 청문회 스타도 등장했습니다. 광주 민주화 운동 진상규명을 위한 광주청문회, 전두환 비자금 조사를 위한 일해재단 청문회, 신군부의 언론 장악 음모를 파헤치기 위한 언론 청문회 등이 열렸지만 광주 민주화 청문회가 가장 열기가 높았습니다. 청문회 결과 전두환 구속에 대한 국민적 요구가 높아졌지만 5 공비리에 관련된 전두환 형제들만 구속되고 전두환 본인은 국회 증언을 회피하고 대국민 사과문을 발표한 뒤 11월 23일 백담사로 칩거에 들어갑니다.  

5공비리 청문회에 출석한 전두환과 명패를 던지는 노무현 의원

 

민주화의 열기와 통일운동의 전개

비록 야권의 분열과 후보 단일화 실패로 선거를 통한 정권교체에는 실패했지만, 6월 민주항쟁 과정에서 축적된 민주화의 열기는 87년 대선, 88년 총선 이후 사회 각계각층으로 확산되어 갔습니다. 사회문화계에서는 87년 민족문학작가회의, 88년 12월 민예총 등 각종 문화운동 단체가 탄생하였고 <임을 위한 행진곡>, <솔아 솔아 푸르른 솔아>, <광야에서> 등의 민중가요들도 큰 인기를 얻었습니다.  학원계에서는 학원민주화, 교육민주화 운동이 일어나 1989년 5월 참 교육의 기치를 내세운 전국교직원노조(전교조)가 만들어집니다.



통일운동의 일환으로 북한을 방문하고 구속된 임수경 전 국회의원



1980년대 초반에서 1990년대까지 대학가는 이른바 '사회과학의 전성기'로 불렸습니다. 공산권 국가와의 수교로 그동안 금기시되었던 각종 사회주의 서적들이 자유롭게 출간되었고, 민주화의 바람을 타고 다양한 사회이론과 철학사상에 대한 대학생들의 관심이 높아졌습니다. 이런 이론적 관심은 북한에 대하여는 북한 바로 알기 운동의 형식을 띄며 전개되어 초기에는 순수한 학문적 관심으로 시작했다가 나중에는 분단체제의 극복과 이념적 대립을 뛰어넘으려는 직접적인 통일운동으로 발전했습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89년 3월에는 문익환 목사가, 6월에는 임수경과 서경원 의원이 직접 북한을 방북하여 북한에 대한 관심을 높였습니다. 그러나 이런 급진적 통일운동 방식에 대한 정부의 반발과 보수세력의 공격으로 공안정국이 조성되기도 했고, 학생운동이 탄압받기도 했습니다. 이때 전국의 대학생 조직으로 자리매김한 전국대학생 대표자협의회(전대협)의 활동이 주목할 만했는데. 이인영, 임종석 등이 초대 의장과 2기 전대협 의장 출신이기도 합니다.

13대 총선 후보자 연설회


노태우의 북방정책과 사회주의의 몰락

1989년 1월  노태우 정권은 헝가리와의 수교를 시작으로  11월에는 폴란드와 수교했고  90년 10월에는 마침내 소련과도 국교를 맺습니다. 90.9. 남북 고위급 회담 개최에 이어 드디어 91.9.17. 남북 동시 유엔 가입했고 91.12. 남북 기본합의서,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이 연달이 발표되면서  남북화해 무드는 절정에 이르렀고 공산권 국가와의 국교정상화를 기본정책으로 한 노태우 정부의 북방정책도 결실을 맺습니다. 중국과의 국교정상화는 다소 늦어져 92년 8월에서야 중국과 수교하고 대만과는 단교를 선언하게 됩니다.


동유럽 사회주의붕괴의 시작을 알린 베를린 장벽 붕괴





3 당통합과 지방선거의 실시

한편 총선 결과 생겨난 여소야대 구도로 정치적 입지가 좁아진 정부여당 민정당과 총선에서 김대중 후보에도 밀려 제2야당 자리에 만족해야 했던 김영삼의 통일민주당, 충청권을 지역기반으로 한 김종필의 신민주공화당은 인위적인 3당 통합으로 1990년 2월 거대 보수 여당 민주자유당(민자당)을 창당하고 정국 주도권을 잡습니다.

13대 총선 개표장 현장




3 당통합으로 정국 주도권을 잡고, 북방정책과 남북회담의 가시적 성과를 바탕으로 자신감을 얻은 노태우 정부는 박정희 군부세력이 그동안 미뤄왔던 지방자치의 완전한 실현을 위한 지방선거를 1991년부터 실시합니다.  1991년 3월 기초의회 선거인 구시군의원 선거를 시작으로 9년 6월 광역의회 선거인 시도의원 선거를 실시했지만 약속했던 서울시 등 광역단체장 선거는 보류하여 30여 년 만에 지방자치는 부분적으로는 부활합니다. 광역단체장 직접선거를 포함한 완전한 지방자치의 구현은 다음 김영삼 정부 때인 1995년 6월까지 기다려야 했습니다.


1991년부터 처음 사용하기 시작한 한글식 투표용지와  알루미늄 투표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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