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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트로츠뎀 Aug 28. 2019

87년 민주화의 싹을 틔운 선거

1985년 2월 12일 실시_제12대 국회의원 선거

전두환 신군부의 제5공화국이 수립된 지 약 2년 후인 1983년 신군부는 정권이 안정권이 들어섰다고 판단해서인지 각종 유화정책을 펼치기 시작합니다. 먼저, 1983년 12월 학생들을 포함해서 172명을 사면하고,  해직교수 100명을 복직시킵니다. 무엇보다 대학 내에 주둔하고 있던 군병력을 철수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전두환 정권의 유화정책의 배경에는 점점 증가하고 있는 민주화에 대한 국민적 열망을 무시할 수만은 없었고, 이철희, 장영자 사건으로 대표되는 권력형 금융비리에 대한 국민적 분노를 무마시키려는 의도가 숨어있었던 것입니다.

또한 국제적으로는 1983년 11월 방한한 레이건 대통령 방한과 이어질 교황의 한국 방문에 대한 정권의 선물이었다는 해석도 있습니다.

12대 국선 홍보포스터


전두환 정권에 대한 국민적 저항은 1983년 5월 김영삼이 광주 민주화 항쟁을 기념하며 시작한 단식 투쟁과 6월 <민주화 추진 범국민단체> 구성으로 가열되기 시작해서 1984년 5월 <민주화 추진협의회> 결성으로 결실을 맺습니다. 1985년 2월 12일 실시하는 제12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야권과 학생운동권은 선거참여 문제를 두고 이견이 분분했습니다. 김영삼 지지자들을 중심으로 선거참여를 강력히 주장한 반면 김대중 지지자와 재야 민주화 진영은 야당인 민주한국당이 제 기능을 다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선거참여는 전두환 정권의 정통성을 강화시켜주는 명분만 제공할 뿐이라며 선거 참여를 거부하려 했습니다.

시청앞 홍보선전탑

많은 논쟁과 격론을 거쳐 결국 민주화 세력은 선거 참여를 통해 대안정당을 창당하고 선거를 통해 개헌 문제를 공론화하기로 결정합니다. 그리하여 1984년 12월 학생운동권의 선거참여가 결정되고 1985년 1월 14일에는 <민주 총선 쟁취 학생연합>이 결성되며, 마침내 선거를 한 달 여  앞두고 1985년 1월 18일 '선명 야당'의 기치를 걸고 신한민주당이 창당되어 본격적인 선거 투쟁에 돌입합니다. 1985년 2월 8일 귀국한 김대중이 평화적 정권교체를 위해서는 대통령 직선제로의 개헌이 필요함을 역설하면서 개헌 문제가 선거의 핵심 쟁점이 되었습니다.

선거안내문, 홍포포스터, 홍보 담배갑 표지


1985년 2월 12일 실시한 제12대 국회의원선거는 전두환 정권의 집권 중반기에 실시하는 선거로 전두환 정권에 대한 중간평가의 성격이 있었고,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치러지기 때문에 향후 정권교체의 향방을 가늠해 볼 수 있는 선거였습니다. 또한 김대중과 김영삼을 제외하고 그동안 정치활동이 규제되어 있던 기성 정치인 대부분이 해금되어 선거에 참여하였습니다. 선거전은 초반부터 여당인 민주정의당과 해금 인사가 주축이 되어 창당한 지 두 달밖에 안 되는 신한민주당, 제1야당인 민주한국당, 한국국민당 등이 지역에 따라 3자 또는 4자 대결구도를 보였습니다.

후보자 선거벽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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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거전에서 최대 쟁점은 대통령 직선제 개헌 문제였고, 이는 선거에서 민주화 세력을 통합하는 핵심 이슈로 작동했습니다. 야당은 국민들이 직접 자기 손으로 대통령을 뽑고 싶어 한다며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주장하였고, 여당은 대통령 직선제 개헌에 반대하였습니다. 선거에서는 여당 후보자에 대항해 대통령 직선제를 주장하는 학생들과 재야인사들이 야당 후보를 지지하면서 선거 열기가 달아올랐고 유세장마다 야당 후보자들의 선거 연설 시 환호가 쏟아졌습니다. 이런 선거 열기와 야권의 돌풍은 선거 결과에 고스란히 반영되었습니다.



선거 결과 여당인 민주정의당은 148석을, 창당한 지 1달도 안된 신생 야당인 신한민주당은 67석을, 기존의 제1야당인 민주한국당은 35석을 차지했습니다. 여당인 민정당은 한 선거구에서 2명을 뽑는 중선거구제 덕분에 지역구에서 87석을 얻었지만 서울, 부산, 대구, 인천 등 주요 대도시에서는 단 한 곳을 제외하고 참패했습니다. 서울만 보면 정당별 득표율에서도 신민당이 42.7%, 민정당은 27.0%로 오히려 야당이 앞섰고, 전체 득표율도 민정당 35%, 신민당 29%로 별 차이가 없었습니다. 온갖 관권, 금권 선거에도 불구하고 나타난 이런 결과는 실질적으로 여당의 패배와 야권의 승리로 볼 수 있었고 전두환 신군부에 대한 국민적 반감을 표출한 것이었습니다.  

투표함 이송



선거 후 민주한국당의 당선인이 대거 탈당하여 신한민주당에 입당함으로써 한때 제1야당이었던 민주한국당은 의원 3명만 남은 군소정당으로 몰락했고, 신한민주당은 국회 개원 전까지 의석수 103석을 보유한 사상 초유의 거대 야당이 되었습니다. 선거 이후에도 야권은 선거에서 나타난 국민적 여망을 담아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계속 추진했고 신한민주당과 <민주화 추진협의회>는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위한 천만인 서명운동을 전개하면서 6.10 민주화 항쟁의 불길을 높이 들었던 것입니다.

투표함 개함


이렇듯 독재자와 군부가 와해시킨 선거제도는 부메랑이 되어 그들 자신의 심장을 겨누는 칼로 되돌아왔습니다. 1948년 5.10. 선거로 우리나라에 최초로 도입된 민주적 선거제도는 독재와 장기집권에 눈먼 권력자에 의해 붕괴되거나 형식화되어 독재를 정당화하기 위한 수단이 되기도 했지만, 또 한편으로는 민주화 세력의 구심점과 지표 역할을 했고 민주주의 진영을 결속시키는 계기가 되기도 했던 것입니다. 정치제도의 일부로 도입된 선거제도로 인해 선거 때마다 국민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 독재자와 민주진영의 투쟁이 벌어졌고, 선거 국면에서 열린 의사 결집 과정에서 정권에 대한 비판과 극복이 가능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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